〈 152화 〉 시간선
* * *
이상한 공간에 잠시 떨어졌다 돌아오자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폭풍우가 치던 바다는 어느새 맑아졌고, 저 아래에서 헤엄치던 심해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을 쳐다보자 자연스레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처참하게 파괴된 전함 한 척이 반으로 갈라져서는 점점 침몰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쪽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 있는 장면.
나는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원흉에게 물어봤다.
"뭘 하신 거에요? 저 깊어 보이는 구멍은 또 뭐고."
"너, 수련을 더 해야겠구나."
"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머리 위에 올라가서는 살포시 앉았다.
나는 그 말에 담긴 저의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지만, 자기를 '이디안'이라고 칭하던 사람의 말이 떠올라서 집중할 수 없었다.
'에휴, 모르겠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나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윗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몰캉한 촉감에 나도 모르게 올라간 손이 꼬리에 격추당해서 다시 내려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나는 서현이와 왓슨 씨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으윽…."
"머리가…."
간단하게 걸어둔 마법이라 그런지 금방 깨어난 둘은 벌써 끝나버린 상황에 잠시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물어보려는 것처럼 다가오려는 그 순간, 전투부장과 수현 씨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 다행히 두 분은 멀쩡하시군요."
"네. 제가 잠시 마법으로 기절시켰거든요."
"그럼 서현 씨와 서아 씨는 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심해인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해서요."
"저는 도울 일이 없습니까?"
"왓슨 씨였죠? 당신은 그럼 부상자의 차료를 부탁드리죠. 응급처치는 할 줄 아십니까?"
"당연하죠."
"다행이군요. 멀쩡한 사람들은 모두 사후처리에 투입해서 인력이 부족했는데."
말을 끝마친 수현 씨를 따라 이동한 나는 붉게 물든 바다와 미리 와서 사체를 건지고 있던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간단하게 만들어진 소각로가 있었는데,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는데도 역겨운 악취가 조금씩 맡아졌다.
염력이나 수류 조작으로 심해인의 떨어져 나간 팔이나 다리를 줍는 이들의 뒤로 헬쓱한 얼굴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거의 탈진하기 직전까지 마력을 사용해서 그렇겠지.
곧 저 대열에 내가 합류할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내려왔나 싶었다.
그냥 조타실에서 기절한 척이라도 할 걸—이라고 후회하기도 잠시.
방금 뇌를 혹사했던 경험 덕분인지 마력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저절로 떠올라 몇십 분간 마법을 사용해도 멀쩡했다.
그렇게 심해인의 사체를 거의 다 치워갈 때 쯤, 머리 위에 앉아있던 그가 살짝 움직이더니 말했다.
"서아야. 난 먼저 가 봐야겠구나."
"네, 뭐. 어차피 하는 것도 없으셨잖아요."
"요게."
꼬리로 한 대 얻어 맞은 나는 머리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걸 느꼈다.
아무래도 결사단에 있는 내 사무실로 이동한 거겠지.
아직까지도 뺨이 얼얼한 나는 마무리로 바다에 퍼진 심해인들의 피까지 모두 소각해버리는 걸 구경한 다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거의 침몰해서 끄트머리만 보이는 전함.
저들을 구하기 위한 내 노력을 배신하는 것처럼 주변에 구명 보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존재가 저걸 한 손으로 들고 일어설 때부터 그럴 거라고 직감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씁쓸할 따름이었다.
나는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있을 강당 같은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담요 위에 누워서는 붕대를 감거나 부목을 댄 몇몇 이들이 보였다.
아마 거대한 해일이 배를 덮쳤을 때, 잘못 넘어져서 피부가 찢어지거나 뼈가 부러졌겠지.
그들 사이에서 구급 상자를 들고 돌아다니는 왓슨 씨가 보였다.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많이 바빠 보이는 모습에 나는 장로 마법사들을 모아 회의하고 있는 수현 씨에게 찾아갔다.
심각한 얼굴로 알 수 없는 용어가 오가는 한가운데로 내가 등장하자 다들 조용해지더니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음 속의 유교 드래곤이 예의는 어디다가 팔아 먹었냐고 소리지르는 거 같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개를 숙인다면 저들은 절이라도 할 거다.
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늙었으니까.
가장 젊은 사람도 백 년은 넘게 살았을 테니, 정신도 마찬가지로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라니아의 사제인 나는 높으신 분, 그 이상의 존재로 느껴지겠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나요?"
"오오, 위대한 분의 사제시여. 저희들은 지금—"
뭔가 복잡한 말들이 장황하게 늘어졌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게 간단히 격퇴당할 것이면서 왜 이런 일을 벌였냐는 것.
물론 전함 하나와 거기에 타고 있는 모두가 몰살당했으니 이걸 간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라니아가 나서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레이트 올드 원에게 몰살당했을 터이니 이해했다.
"혹시 다른 것들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다른 위대한 옛 것들 말입니까?"
"네."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최근 들어서 지구에 손을 뻗는 존재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오만하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흐음."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있겠군요."
"그게 뭐죠?"
"다곤의 주인이자 지구의 옛 지배자. 지금은 위대하신 분께 태평양 저 아래에 봉인된 존재."
"푸흐흐. 크툴루를 말하는 걸까?"
"…! 누구냐?!"
간드러지며 매혹적인, 그러나 날카로운 식칼을 등골에다가 갖다댄 것처럼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어둠이 빚어지며 나타난 한 소녀가 있었다.
저걸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얼굴에 있는 눈, 코, 입의 생김새가 시시각각 변해가며 다양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목소리는 난잡하다고 할 정도로 섞여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 노인의 목소리, 아이의 목소리가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번 쯤은 광기를 마주해봤을 마법사들도 몇몇은 도망치며 구석에 웅크리거나 토악질을 하거나, 자신의 눈을 파내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녀는 이런 혼란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시시각각 변해가는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며 미소 지었다.
"넌… 누구지?"
이곳에서 가장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그녀에게 질문하자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외신. 우주의 바깥에서 온 전령."
"전령이라면, 무슨 소식이라도 들고 온 걸까…?"
"아니, 이건 우둔하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무지하신 도련님의 뜻은 더더욱 아니고."
"무슨 소리지?"
"그저 무대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연극을 보고 싶다는 욕심일 뿐이다."
무대가 사라진다니, 세상이 멸망하리라는 뜻일까.
나는 꿈에서 봤던 하늘이 떨어지는 광경이 떠올랐다.
"진실에 근접한 자여. 그리고 결사단이여. 그대들은 내가 만든 혼돈을 막아낼 수 있을까."
"뭐라고? 야, 야!"
"태평양에 쐐기가 하나 있다. 그리고 잠들었던 존재가 꿈에서 깨어나고 있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빛에 그림자가 사라지듯이 소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광증에 빠져 있던 마법사들이 점차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단 내륙 지역이 어떤 상황에 빠졌는지 알기 위해 정보부에다가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는 문자들.
현재 일어난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과 함께 최대한 노력해서 알아보겠다는 마지막 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째선지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 같은 하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침착하면서 태연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보세요."
"하윤아! 혹시 바쁘니?"
"아뇨. 언니도 만났죠?"
주어가 생략됐지만 하윤이가 말하는 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어? 너도 이상한 여자애 만났구나!"
"네, 그렇죠. 아무래도 결사단의 정보력이 필요할 거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정보부에서 최대한 노력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일단 네 쪽에서 독자적으로 조사해야 할 거 같아."
"네. 그럼 뭔가 찾으면 연락할게요."
그리고 하윤이가 통화를 끊자 나는 다시 정보부에 문자를 보냈다.
'찾은 정보들은 모두 하윤이에게 보낼 것'이라고.
어차피 우리들은 태평양으로 향해서 그녀가 말한 쐐기를 찾고, 깨어나고 있을 존재를 다시 재우러 가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받아봤자 쓸모가 없을 터.
그렇다면 그걸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줘야하는 법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수현 씨와 장로 마법사들이 회의하는 쪽으로 가자 의견이 갈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급하게 가야 하니, 반대하는 의견을 묵살하며 태평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것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래도 태평양으로 갑시다."
"하오나…!"
"한국이라면 괜찮습니다. 저보다도 훨씬 강한, 위대한 분의 대사제가 있거든요."
"으음…."
"만일 그 크툴루라는 존재가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거 아닌가요? 저는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도 아깝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자 장로 마법사들은 제 뜻을 굽히고는 어디론가로 향했다.
아마 배에 마력을 불어넣기 위한 곳으로 갔겠지.
나와 수현 씨도 조타실로 향해 기계를 조작했다.
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
어째선지 머릿속에 들어있는 좌표를 자동 항법 시스템에다가 입력하자 배가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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