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153화 (153/154)

〈 153화 〉 시간선

* * *

한편, 저택에서 느긋히 홍차를 마시던 이브는 저택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에 이마를 찌푸렸다.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찻물에 젖어 축축해지자 불쾌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옷자락에다가 젖은 손을 문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진동의 원인을 찾기 위해 창문 밖을 들여다 본 그녀는 인간의 눈엔 보이지 않아야만 할 것이 보였다.

찬란한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선 다섯 개.

저걸 보고 주머니에 넣었다가 마구잡이로 엉킨 이어폰을 떠올린 이브는 밖에서 바삐 계단을 오르는 인기척에 밖을 보던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제임스를 부축하고 문을 밀치듯이 열고 들어온 에반이 방금 진동을 느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푸흐흐…. 어라?"

그걸 가만히 구경하며 저들을 지구로 보낼 마법을 짜올리던 나는 멀리서 느껴지는 불쾌한 열기에 목을 반대편으로 꺾었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점.

그것을 발견한 순간,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대폭발이 화신을 뒤덮으며 두르고 있던 암흑물질을 거둬냈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거체가 열기를 막아서 저택에 있던 배우들은 무사했지만, 폭발의 여파로 인해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산산조각이 난 잔해 사이에서 배우들을 구하며 인간처럼 만들어진 인형들이 공허 사이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그분께서 그다지 정을 주지 않았으니 굳이 회수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나는 폭발의 근원지에서 나타난 방해꾼과 마주했다.

남의 거주지를 불태운 몇 번이고 죽여도 모자랄 녀석.

형체 없는 불꽃이 한곳으로 뭉치며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녀석의 표정은 안드로이드에다가 얼굴 가죽을 붙여둔 것처럼 움직였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중간 그 어딘가.

인간이라면 불쾌함을 느꼈을 움직임은 곧 촉수가 떨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되었다.

"그 분께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어머? 그러는 너도 허락 받지 않고 그런 적이 있었으면서?"

"나중에 인정 받았으니 괜찮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애처럼 소리친 녀석은 내 손바닥 위에 있는 배우들을 뺏어가려고 했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에게 해코지하리라 생각한 걸까.

"잠시 가만히 있어."

"너—"

더이상 방해받기 싫었던 나는 주변에 있는 암흑물질을 모아 그를 가둘 결계를 만들어냈다.

저거라면 수십 초 정도는 버텨주겠지.

"잘 듣거라. 너희들은 이제 저 시간선들을 고정한 쐐기를 찾아 부수면 된다."

그렇게 말하며 배우들을 보내려던 나는 가운데에 있는 마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리고 네가 좋아할 인간들도 있을 테니, 좋은 연극을 보여주길 바라마."

그 말을 끝으로 이들을 지구로 보내자 암흑물질의 사이로 칼날이 삐져나오는 것처럼 빛이 새어나오더니 폭발과 함께 결계가 깨졌다.

방금의 불쾌한 얼굴에서 다시 원래의 불분명한 형태로 돌아온 그는 배우들이 사라진 걸 깨닫고는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격하며 마법을 전개하던 나는 방금 했던 실수 한 가지를 깨달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인간형 화신으로 설명했을 텐데, 중간에 난입한 어떤 불덩이 덕분에 우둔하신 아버지의 전령인 상태로 말했다는 것.

인간과는 구강 구조나 성대 자체가 아예 다르니 그들의 입장에선 왠 괴물이 이상한 소리를 내뱉더니 지구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이리라.

"그래. 이것도 재미를 더해주겠지."

다시 한 번 펼쳐지는 거대한 폭발을 집어삼키며 푸른 별을 바라봤다.

***

"@#$%#%^##$%^."

저택이 부서지며 나타난 거대한 괴물은 뭐라 지껄이더니 우리들을 어디론가로 보내버렸다.

이대로 한입에 집어삼켜져서는 죽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우려가 현실로 돌아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거의 내팽겨쳐지듯이 바닥에 떨어지자 허리가 아팠다.

쓰라린 부위를 슬슬 문지르며 일어선 나는 주변에 같이 쓰러져 있는 제임스와 에반을 볼 수 있었다.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지 덩치가 많이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제임스 오빠는 방금 봤던 거대한 존재의 마력에 아직까지도 정신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반 오빠는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그 눈동자 안에는 흉폭한 기운이 은은하게 깃들어 있었다.

살짝이라도 건들면 사나운 개처럼 난리칠 것만 같은 눈빛에 나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음…. 뭐지?"

주변을 둘러보면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집들이 보였다.

허공에서 떨어진 걸 보고 인터넷에 퍼트릴 사람이 없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었지만,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창문 너머로 보여야 할 인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은 명백히 수상했다.

혹시 그 괴물이 우리를 이곳에다가 떨어뜨린 이유는 이런 이상현상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허공에서 다섯 명의 사람들이 떨어졌다.

남자 셋에 여자 둘.

모두 생김새가 다른 것으로 보아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상한 조합이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어 보면 방금까지 동굴에 있었던 건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한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놀란 얼굴을 하며 급히 다가왔다.

반응을 보아 하니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으니 그녀를 막으려던 찰나였다.

툭.

"아, 이런."

실수로 에반 오빠의 다리에 발이 걸린 나는 싸늘하게 노려보는 눈빛에 손을 움직였다.

빠악!

저택이 무너질 때 챙겼던 마도서로 오빠의 정수리를 내리치자 눈이 돌아가며 뒤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제임스 오빠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어깨를 흔들며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제임스 씨! 괜찮으세요?"

"으음…."

계속해서 시끄럽게 귀를 찌르는 소음에 제임스 오빠는 눈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도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인지 멀쩡한 눈은 옆으로 돌아가더니 크게 뜨였다.

"에밀리아 양…?"

"제임스 씨!"

여자는 마치 전쟁터에 나간 연인과 다시 만난 것 마냥 포옹을 했다.

제임스 오빠는 당황해 하면서도 오른팔을 들어올려 여자의 등을 쓸어줬다.

"네. 풋풋한 연애 드라마는 거기까지 찍으시고."

"뭐, 뭐라는 거야! 우리는 그…."

"동료랍니다, 이브."

"그래요? 그럼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내가 그렇게 재촉하며 제임스 오빠의 팔을 잡아당기자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더니 저기 쓰러진 에반 오빠를 보고는 의아한 눈초리를 보냈다.

"음? 이봐, 에반. 왜 쓰러져 있어?"

"으윽…. 머리가 아프군."

"어디 머리라도 다쳤나?"

"아니. 아무래도 마주한 존재가 존재이니 만큼 버틴 게 기적이지. 게다가 아무래도 머리부터 떨어진 모양이고."

에반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자그마하게 혹이 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내가 책으로 머리를 내리친 기억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긴, 지구인가?"

주변을 둘러보던 에반 오빠는 어딘가에 시선이 고정되더니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나는 왜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말하려다가 저 멀리 있는 이상한 물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탑처럼 솟아난 반투명한 기둥.

신이 무너뜨렸다는 바벨탑이 저렇게 높았을까 싶을 정도로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들어올려도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쳐다보는 곳을 보더니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히는 걸로 보아 마법사에게만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저곳을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내가 병원에서 거의 지내다 싶이 살 때엔 저런 게 없었으니.

우리가 지구로 떨어진 것과 저게 생겨난 게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 괴물이 저걸 만들어서 우리가 인형극 속의 인형처럼 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기계장치의 신이 나타나 무대 자체를 부수고 우리들을 구원할 테니까.

'게다가 무대를 꾸민 존재도 무슨 불이랑 싸우는 거 같았고.'

어차피 저택에서 마법이나 공부하는 것도 슬슬 질려가고 있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일단 저기 보이는 기둥으로 가 볼까요?"

"…일단 그게 맞겠지."

우리들은 그렇게 길을 따라가며 한 명씩 자기소개를 했다.

방금 제임스 오빠에게 포옹했던 에밀리아 씨, 뭔가 음침해 보이는 메리 씨.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라고 말하는 윌리엄 씨.

일본에서 왔다는 타케시 씨와 하윤이 누나와 같은 나라에 사는 한설 씨까지.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일반인이여서 그다지 도움은 안 될 것 같았지만,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흐릿해진 나에게 일상이란 걸 일깨워주는 듯한 느낌이라서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았다.

그들은 동굴에 대한 것이나 저기 멀리 보이는 탑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더니, 곧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자기는 평소에 어떻게 지낸다는 둥, 오늘 하늘은 어떻고 날씨는 얼마나 좋은지.

그런 대화는 길가에 웅덩이가 만들어질 정도로 뿌려진 피를 발견했을 때 멈추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