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학교?에 가다.(1)
* * *
“아빠! 아빠! 일어나!”
“어? 어?! 뭐야?”
나는 누군가가 나를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가 나를 깨운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적거리며 조금씩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 위에 올라 타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리에...?”
찰랑이는 푸른 머리칼에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 5~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헤헤 웃으며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헤헤, 아빠! 잘 잤어?”
“리리에, 엘리아는 어디가고 네가 온 거야...?”
원래 알람은 그녀였을 텐데.
“엘리아 언니가 자기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 나보고 깨우라고 했어!”
“손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깨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온 손님이라.
“혹시 좀 몸이 크시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이니?”
“응! 엄청 멋있는 할아버지였어!”
“정장을 입고?”
“응!”
대충 누군지 예상이 가네. 분명 그 사람이 보낸 사람이겠지.
나는 리리에에게 밑으로 내려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거지...”
나는 기지개를 펴고 간단하게 씻은 다음, 옷장에서 적당한 옷을 골라 입고 밑으로 내려가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하니 메이드복을 입은 보랏빛 머리칼의 여인이 리리에에게 사탕을 하나 건네주면서 말했다.
“곧 내려오신다고 하네요. 수고했어, 리리에. 자, 여기 사탕.”
“고마워 엘리아 언니!”
리리에는 엘리아에게 사탕을 받아들더니 바로 까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탕으로 애를 꼬셨군. 저 나이부터 사탕 같은 걸 먹어 버릇하면 안 좋은데.
내가 온 것을 눈치 챘는지 노인... 이라기엔 좀 풍채가 큰 남자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현성님.”
“안녕하세요, 하리스 씨.”
하리스 씨는 왕국에서 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왕성 귀족 4가문 중 하나인 르니아 가문의 집사장으로 르니아 가문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지위상 나보다 높은 그들 나름대로의 예의 아니었을까. 는 무슨. 내가 하리스 씨만 오면 두말없이 잘 따라오니까 보내는 거겠지.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벌써 한 달에 한 번 가기로 한 다과회 날인가요?”
하리스씨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오늘은 그 일로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일인데요?”
“그건 저에겐 말씀을 안 해주시고 그저 현성님을 모셔오라는 명만 하셨습니다.”
어라, 다과회 말고 부르는 일은 대부분 하리스 씨한테 말해주고 나를 오라고 하던 사람이 웬일이래.
“알겠어요. 바로 출발하죠.”
가서 들어보면 알겠지.
“엘리아. 리리에 데리고 올라가 있어. 금방 갔다 올게.”
“네, 주인님. 가자, 리리에.”
“동화책 읽어주는 거야?”
“그래, 어제 읽어줬던 다음부분부터 읽어줄게.”
“와아!”
엘리아는 리리에를 데리고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갔고, 하리스씨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내게 말했다.
“몇 번이나 뵈었지만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그녀가 메이드복을 입고 당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존댓말까지 쓰는 게 말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만 저래요. 평소에는 주인~ 주인~ 거린다니까요.”
내 말에 하리스씨는 허허 웃으며 저택의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그럼 가실까요.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주인님께서 모처럼 준비하신 최고급 홍차가 식을 테니까요.”
* * *
...언제 봐도 정말 으리으리한 저택이네.
“어서 오세요, 현성님.”
내가 하리스씨를 따라 르니아 가문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메이드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부담스러워. 내가 올 때마다 이러니까 오기 싫다니까.
“하하, 어서오게나.”
그 메이드들 사이로 금발의 훈훈하게 생긴,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이 걸어 나왔다.
그가 나를 여기로 부른 당사자이자 르니아 가문의 주인인 아이테르 데 르니아.
왕가의 방패라 불리는 이명을 지닌, 인마(人?) 전쟁 때 나와 같은 마왕 토벌단, ‘백야’ 출신으로 제일 앞에서 활약했던 사람이다.
마왕 토벌단의 취지상 제일 앞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감이 있긴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죠?”
“하하하, 내 동료를 보고 싶은 것뿐인데 이유가 있겠나!”
“당신이 이유 없이 부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메이드들은 내가 이 나라를 받치고 있다고 평가 받는 네 개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인 르니아 가문의 주인을 ‘당신’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것을 보고는 흠칫 몸이 떨리는 사람이 몇 명 있었으나 아이테르는 가만히 있었고, 하리스 씨가 일로 돌아가라고 손짓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일단 따라오게. 더 시간이 지나면 특별히 준비한 고급 홍차가 식으니까.”
하리스 씨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들어가자 메이드가 홍차를 내어 왔다.
아이테르가 홍차를 마시는 걸 보고 나도 한 모금 홀짝였다.
...역시 쓰군. 이런 게 뭐가 맛있다고 먹는지 모르겠네.
괜히 혀만 버린 나는 근처에 놓인 달달한 과자를 하나 꺼내 먹었다. 이게 훨씬 낫네. 집에 갈 때 몇 개 챙겨달라고 해야겠다.
아이테르는 찻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 내 딸이 외출 중에 마족들에게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네.”
나는 당황해 되물었다.
“...뭐라고요?”
이 나라에서 국왕다음으로 권력이 높은 왕성귀족의 딸을 습격하는 놈이 있다고?
“괜찮네. 그녀는 무사할뿐더러 오히려 습격해온 마족들을 전부 베어버렸으니까. 나중에 시체를 확인해보니 전부 하급마족들뿐이더군. 대단하지 않나? 아무리 하급마족이라도 10마리는 족히 되었는데 그것들을 혼자 상대했으니! 하하하! 역시 내 딸이야!”
당신 딸 걱정하는 거 아니라고. 하는 표정으로 쏘아보자 아이테르는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그녀가 상대한 녀석들중에 살아있는 녀석들을 암부에게 보냈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암부.
아이테르와 같은 왕성 귀족인 아르테미아 가문의 가주가 이끄는 ‘암부’는 귀족인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를 들어 암살이나 고문, 정보 수집 등을 대신 행하는 뒷세계의 조직으로 그들이 얼마나 잔악하고 악랄한 놈들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던 놈들은 차라리 그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정작 그들을 이끄는 가주인 레인 아르테미아는 전혀 어두운 쪽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성격이긴 했지만. 아니, 클래스가 암살자니 관련이 아예 없지는 않을지도.
“그래서, 뭐래요?”
“그들이 습격을 행하려 한 건 내 딸뿐만이 아니라고 하더군. 정확히 말하면 모든 귀족들의 딸들을 습격할 계획이었던 거네.”
“뭐, 예언이라도 있다고 합니까? 얼마 전엔 대예언자... 그 사람이 마족한테 납치됐다가 돌아왔다고 떠들썩하던데요. 몸 성하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사건 때문에 그 사람 아직도 집에 틀어박혀 산다던데.”
아이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말한 대로일세. 그들은 그에게서 예언을 받았다고 하더군. ‘흰 태양이 질 때 붉은 달이 떠오른다.’와 ‘마왕 부활의 열쇠는 만 19세 미만의 귀족들의 딸이다.’ 라는 두 개의 예언을 말일세.”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흰 태양이라는 건 마왕 토벌단의 이명인 ‘백야’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고, 붉은 달이 떠오른다는 건 마왕이 부활해 다시 한 번 인마 전쟁을 일으킨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굳이 ‘만 19세 미만의 귀족들의 딸.’이 열쇠인 거지? 아니, 애초에 왜 흰 태양이 뜰 때는 어렵게 말했으면서 왜 마왕 부활의 열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거지?
내 생각에 잠긴 표정이 어느 부분에서 그런 건지 자기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아이테르가 말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어째서 만 19세 미만의 귀족들의 딸이 열쇠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네. 그걸 말하려는 순간 그들의 머리가 터져버렸다더군. 마치 누군가 장치를 해둔 것처럼.”
으엑. 상상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아. 어? 잠깐만 난 왜 이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나는 말 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아이테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게 이런 말들을 해주시는 이유가 뭐죠?”
아이테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자네, 요즘 뭐 하고 있는가?”
“요즘요? 그냥 뭐... 평화를 만끽하는 중입니다.”
아이테르의 얼굴에는 잘 됐다는 듯 화색이 돌았다.
“지금 하는 일은 없다 이거군?”
아이테르는 품속에서 몇 장의 사진들을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는 넓은 정원, 수많은 방문, 책이 가득 쌓여있는 도서관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게 뭡니까?”
“국왕폐하께서 자네에게 들려준 것과 같은 얘기를 들으시고 실행하신 계획이라네.”
그렇게만 말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꿀꺽하고 삼켰다.
“저택...인가요?”
“아니, 학교라네.”
“...?”
저게 학교라고? 저택 아니야? 누가 봐도 저택인데? 그것도 엄청 큰.
“저택처럼 보이겠지만 학교가 맞다네.”
마왕 토벌이 끝나고 받은 보수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만 저걸 짓는 데 모조리 들어갔나 보군.
평생 놀고먹을 정도의 돈만 받고 나머지는 알아서 쓰라 했더니만.
“지금 왕국 귀족의 딸들은 모두 이곳에 들어가 있다네.”
점점 더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이런 불안한 느낌의 끝은 항상 좋지 않았는데.
“자네가 이곳의 총괄 겸 선생이 되어줬으면 하네.”
“...중간과정이 많이 생략된 것 같은데요.”
예전부터 설명이 서투른 사람이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군.
“아! 그렇지 참! 설명을 까먹었구만. 하하하하.”
아이테르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얘기를 이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