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학교?에 가다.(2)
* * *
***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은 아이테르는 얘기를 이어갔다.
“아까 내가 말했다시피 폐하께서는 그 사건에 대해 들으시고는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셨네. 모든 귀족에게 호위 병사를 보내자니 서쪽의 제국을 견제하기에도 병력이 부족하니 말일세. 그러다가 제3왕녀이신 아이리스님께서 폐하께 한 가지 제안을 하셨지. 귀족들의 딸을 모두 한 곳에 모으면 어떻겠냐고.”
“...”
“아이리스님의 제안이 마음에 들으신 듯 폐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을 내리셨네. 지금 보이는 사진 속의 학교를 지어 귀족의 딸들을 한 곳에 모으자고. 그래서 그곳만 지키자고 하시더군.”
“......”
“물론 우리들은 찬성했지. 한 곳에 뭉쳐있을수록 지키기도 쉬워지니 말이야.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네.”
아이테르는 여기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자존심 센 귀족 딸들을 모아놓다 보니 이번엔 그들이 말썽이었네. 우리들 네 가문의 딸들도 포함해서 말이지.”
“......쿨. 엇.”
휴, 잠들뻔.
마치 월요일 1교시에 나이 지긋하신 한국사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기분이야. 가뜩이나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서 지금 다시 자라해도 잘 수 있는 기분인데 말이지.설명만 듣다 하루가 다 갈 것 같은데,간단하게 3줄 요약으로 해주면 안 되나?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올리느라 고생중인 내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테르는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허울만 선생인 거,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선생이 아니면 들이지 않겠다고 하지 뭔가. 적어도 4가문의 딸들과 대련을 해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 나머지 애들도 거기에 동의했고. 그래서 수십 명의 이름 알려진 사람들이 도전했네. 만약 이겨서 귀족 딸들의 호감이라도 얻는데 성공한다면 미래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모두 처참하게 깨졌다네. 우리 왕성 귀족 4가문에서 보낸 사람들까지 말이야.”
...이 인간들. 딸들을 얼마나 강하게 키운 거야? 아무리 물려받은 마력이 있어도 그렇지, 4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면 분명 마왕 토벌단 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 사람들까지 다 이겼다고?아니, 오히려 기뻐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군. 자기 딸들이 그렇게 강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니까. 지금 저 사람처럼.
“후훗, 아무리 잘 키웠다지만 누굴 닮아서 그렇게 강한지 모르겠군.”
봐봐, 저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워 미치겠다는 표정.
그런 표정을 지우지도 않은 체 아이테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메이드장에게 운영을 맡겨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 생각난 게 바로 자네일세.”
그의 얘기를 다 들은 나는 별로 탐탁지 않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곳에 호위 겸 선생으로 가서 얻는 이득은요? 그때도 그렇고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저는 용사가 아닙니다. 제 이득이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아요.”
아이테르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귀족 가문 딸들의 호감도? 잘 하면 미래의 아내를 만날 수도 있지 않겠나? 지금까지 도전했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일세.”
“......”
신분상승을 노렸을 거면 이미 4년 전에 국왕의 제의를 받아들였겠지.
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농담일세.”
전혀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아이테르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찾는 그녀를 찾을 때까지 암부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은 어떤가? 이미 레인하고도 끝난 얘기일세.”
“...!”
그 녀석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그것도 무제한으로?
“그렇게 까지 할 정도의 일입니까?”
암부를 온전히 나만을 위해 움직여 주겠다는 얘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불확실한 일을 하는 동안 그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다. 가뜩이나 요즘 서쪽의 제국과 사이가 안 좋아진 터라 병력을 국경 쪽으로 집중시켜서 암부말고는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자네를 믿는다는 얘기지.”
“제가 진다면요? 저도 전쟁이후로는 그냥 집에서 놀다보니 몸이 좀 굳었는데요.”
아이테르는 내가 한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듯 피식, 웃었다.
“훗, 자네가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나에게 그런 말은 농담으로 밖에 안 들린다네. 뭐, 자네가 진다면 이런 얘기는 없었던 것이 될 뿐이지. 자네에겐 손해 볼 게 없는 제안 아닌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아, 그러면 하나만 묻죠.”
“말해보게.”
“귀하게 자란 귀족 소녀들만 모인 곳인데, 남자인 저를 보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뭐 어른들의 밤놀이를 한다고 마력을 전부 잃는 페널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건장한 남성으로서 차려진 밥상은 거부하지 않는 게 내 신조다. 하물며 지금 가려는 곳은 금남의 화원과도 같은 곳. 아무리 이성을 잘 붙잡을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아이테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들을 이기지 못하면 할 필요 없는 걱정 아닌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수락한다는 의미로 봐도 되겠나?”
애초에 수락할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어놨으면서 몇 번이나 확인하는 척 하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말했다.
“암부를 움직일 준비나 하고 계시죠.”
슬슬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게 질리기도 했고, 조금쯤은 일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잘 부탁하네.”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아이테르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고 얘기가 끝난 것을 눈치챈 하리스씨가 응접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아, 맞다.”
중요한 걸 까먹을 뻔했군.
나는 접시에 놓여있는 과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 좀 포장해주세요.”
***
끼익 쿵.
현성이 문을 닫고 나가자 아이테르는 잔에 남아있는 홍차를 마저 비웠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안 마시는 건지 모르겠군.”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법 아니겠습니까.”
하리스의 말에 공감하듯 아이테르는 작게 웃은 다음 현성이 거의 다 가져가버려 조금 밖에 남지 않은 과자를 하나 먹으며 말했다.
“하리스. 자네는 어떻게 보는가?”
“현성님께서 아가씨들을 이기실 수 있는 지를 물어보시는 거라면, 솔직히 말해 낙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강함은 저도 그때 봤으니까요.”
“하하하,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군.”
“그런데, 말씀 안 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응? 뭘 말인가?”
“루아 아가씨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이 진 이유가...”
아이테르는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며말했다.
“그 정도 변수에 승패가 갈릴 정도라면 그도 거기까지인 거겠지.”
접시에 남아있던 마지막 과자까지 사라지자 아이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슬슬 가볼까.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지.”
응접실을 나가며 아이테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집으로 돌아오자 엘리아가 나를 맞아 주었다.
“왔어?”
“응. 리리에는?”
“정원에서 놀고 있어.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래?”
나는 저택에서 아이테르와 했던 얘기를 엘리아에게 말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엘리아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주인이?? 학교를 총괄하는 선생이 된다고? 내가 아는 주인 맞아?”
“아직 된 건 아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엘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깨워주는 사람이 없으면 늦잠은 기본이고 술 약속을 빼면 방금처럼 밖에서 누가 불러야 잠깐 외출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갑자기 한 학교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니까 그러지. 주인을 아는 사람이면 다들 나 같은 반응을 보일걸?”
“...”
사실이라 할 말이 없군.
“그나저나 잘 됐네. 주인이 4년, 아니. 8년 동안 찾아다니던 사람을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진 거잖아? 그 누구지? 레이..레이.. 아! 레이나 카렌말이야.”
“글쎄다.”
내가 별로 기대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자 엘리아가 물었다.
“왜? 암분지 뭔지 그 녀석들이 뒷세계 최강이라면서? 그러면 이제 뒷세계의 정보까지 들어오게 되니까 더 찾기 쉬워지는 거 아니야?”
객관적으로 보자면 엘리아의 말이 맞다. 양지의 정보는 이미 수집중이고 여기에 음지의 정보까지 들어오게 된다면 사람 하나 찾는 일 정도는 사막에서 모래 찾기만큼 쉬운 일이 되겠지.
하지만 아무리 귀족 소녀들을 돌보는 게 어렵다고는 해도 암부로 인해 얻는 이익이 더 클텐데...
내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려 입을 열기 전에 또다시 그녀의 질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그렇게 찾는 거야? 헤어진 애인이라도 돼? 아니면 복수하고 싶은 대상? 8년 동안 찾아다닐 정도면 헤어진 애인 쪽이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어...”
엘리아의 물음에 나는 거의 다 열렸던 입을 다시 닫았다.
내가 귀찮음을 감수하며 레이나 카렌을 이렇게 열렬히 찾는 이유.
그 이유는 바로 내가 그녀에 의해 이 세계로 오게 된 이세계인이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겠지만 나조차도 이곳에 온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21세기 대한민국의 학생이었을 뿐인데 말이지.
기억하기로 여기로 오게 된 날에는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게임을 하다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울려서 누가 보냈나 하고 봤더니 레이나 카렌으로부터. 라고 되어있었다.
레이나 카렌이 누구야? 하며 메일을 열자 은발 미소녀의 얼굴이 데헷~ 하고 나에게 윙크를 하더니 갑자기 컴퓨터에서 빛이 확하고 났고 그대로 내 방과 함께 이쪽 세계로 오게 된 것이다.
처음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니.
으득.
그때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이를 갈며 부들부들 떨었고, 그 소리와 함께 달라진 내 분위기를 읽은 듯 엘리아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주인...?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 말했어...?”
이런. 조금 흥분했나보군.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나를 진정시킨 후, 고개를 저으며 엘리아에게 사과했고 엘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여하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애인보단 원수쪽에 가깝겠지."
내가 레이나 카렌이란 이름과 은발의 미소녀란 생김새만으로 8년 동안 그녀를 찾는 이유. 그것은
8년 전, 평범한 학생을 치트능력 하나 없이 이곳에 보내 1년 이상 개고생을 하게 만든
“그것도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세게 때리고 싶은 원수."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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