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뒷풀이.
* * *
레이를 안아들고 루아와 함께 회복실로 가면서 나는 방금 전의 마지막 공방에 대해 생각했다.
마지막 공방. 공중에서 내려찍는 또 다른 루아의 공격. 그 공격에 대항해 얼음의 벽을 세운다던가, 얼음 방패를 만드는 등 방어를 택했으면 마지막에 땅에 누워있는 쪽은 내가 됐을 거라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만약, 이라는 불안함을 떨쳐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루아는 괜찮은 건가?
나는 루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루아. 넌 괜찮아?”
“네, 네?”
“내가 또 다른 루아 상태일 때 땅에 메다꽂았잖아. 아프거나 그런 곳 없어?”
루아는 확인해보겠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괜찮은 거... 같은데요..?”
"그래? 그럼 다행이네.”
대련이라고는 했지만 좀 심하게 한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 대화를 끝으로 침묵과 함께 어색한 공기가 우리 둘을 감쌌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루아였다.
“저... 아무것도 안 물으시는 건가요..?”
“응? 뭘?”
“그, 그러니까... 또다른 저에 대해서요...”
아, 그건가. 난 또 뭐라고.
“없어.”
“네?”
“없다고. 애초에 그런 걸 묻는 게 실례 아니야? 모르는 게 있으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지. 맞선 보는 것도 아니고.”
내 말에 루아는 생각지도 않았던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 다 왔다.”
그 이후에 어색한 공기를 풀고자 루아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회복실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레이를 안아 들고 있었기에 루아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회복실의 안은 학교의 보건실 같은 느낌이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예쁜 보건선생님 대신에 회복의 결계를 펼쳐주는 결계석이 있다는 정도였다.
빈 침대에 레이를 눕히고 루아에게도 혹시 모르니까 휴식을 취하라고 말한 뒤에 총괄 수속을 밟으러 회복실을 나왔다.
총괄 수속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총괄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듣고, 학생들의 정보를 받은 뒤에 학교 내 시설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총괄 수속을 마치고 애들이 깨어났나 싶어 회복실로 돌아가 보니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회복실의 바깥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련이라 죽지 않고 회복실로 이동된 거지 실전이었으면 확실히 죽었을 상황이었다. 혹시나 후유증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걱정한 나였지만 내 생각보다 더 그녀들은 강인했던 것 같았다.
“저 정도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나는 그녀들의 강인함을 혀를 내두르며 배정받은 내 방으로 향했다.
* * *
회복실의 안. 현성에게 패배한 다섯 명, 아니. 졸고 있는 루아를 제외한 4명의 소녀들은 방금 있었던 전투를 회상하고 있었다.
“확실히 무서웠지? 그 연두색 용...”
라네즈의 말에 라헨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이 언니가 아니었으면 나.. 기절했을 거야..”
"그래도 재밌었지?"
"응..!"
재밌었다는 듯 웃고 있는 라네즈, 라헨느 자매의 반대편 침대에서는 레이와 세레나가 대화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그 느낌... 언니도 느끼셨나요?”
“그래. 분명 실레스틴이란 고대룡을 눈앞에 뒀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어.”
“그렇다면 역시 마지막 마법은 고대룡의 마법이란 소린데... 인간이 사용하는 게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기는 해. 음양사 클래스의 빙의라는 예시도 있고. 고대룡과 계약한 인간도 있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고대룡인걸요? 계약이야 그렇다고 쳐도고대룡급의 마력을 사용할 수, 아니 견디기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는다고요? 게다가 빙의 비슷한 부류라면 고대룡을 두 마리는 데리고 있다는 뜻인데, 그런 분이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요?”
“소환사도 어떻게 보면 계약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강자는 꽤 많아. 백야라고 이름붙인 마왕 토벌단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거의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레이는 무언가 결심한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레나는 레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 설마 대련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또 훈련하러 가시려고요?”
“응. 이번 대련으로 알았어. 난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럼, 저녁에 봐.”
레이는 회복실 문을 나가 훈련장으로 향했다. 세레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헛웃음만이 나올 뿐이었다.
“정말 못 말리신다니까...”
* * *
“역시 현성님이시군요.”
배정받은 내 방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반겨주었다.
“레인씨?”
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은신은 좀 풀어주시죠.”
“아차, 은신상태인 걸 까먹고 있었군요.”
멋쩍은 듯 웃는 소리가 들리고 돌연 한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단정한 갈색머리.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지만 20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동안인 얼굴. 귀족특유의 고급스런 옷을 입은 남성이었다.
레인 아르테미아. 아르테미아 가문의 가주이자 루아 아르테미아의 아버지. 클래스는 루아와 같은 암살자에 이명은 왕가의 그림자. 그리고 암부의 주인이다.
“아내 몰래 나온 거라 들키면 밤에 엄청난 일을 당해서 말이죠.”
“안 궁금한데요.”
“하하, 여전하시네요.”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레인은 품속에서 편지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폐하께서 보낸 편지를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편지 봉투를 뜯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현성에게]
안녕! 나 에디안이야! 에디안 아벨 국왕!
먼저 축하해! 이 편지를 받았다는 건 그녀들에게 이겼다는 소리겠지? 난 믿고 있었다고?
내가 직접 가서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일이 많아서 말이야.
레인을 통해 이 편지를 전하게 하는 것 말고는 축하해 줄 방법이 없더라고.
여하튼, 궁금한 게 많을 것 같은 너를 위해서 궁금해 할 질문을 예상해서 답을 적어봤어.
없으면 어쩔 수 없고~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너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역시 그것이 아닐까 싶어.
절벽 위의 꽃이라고 불리는 귀족 소녀들이 모인 곳에 건장한 성인 남성 혼자만 두는 거.
그거에 대해서 귀족들하고 회의를 좀 해봤어. 그리고 만장일치로 너에게 맡기자고 결정이 났어!
...뭐?
나는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우린 서로 사랑만 있다면 아내나 남편이 몇 명이던지 상관없는 나라인 건 알지?
내가 듣기로 너한테 뿅가있는 그녀들이 많다면서? 이참에 거기에 인간도 추가시켜 보는 건 어때?
아! 그렇다고 너무 어린 애는 건들면 안 된다? 약혼은 괜찮지만 직접적으로 건드는 건...
콰직.
나는 그 이상 읽지 않고 편지를 구겨버렸다.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인은 내가 그럴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듯 한 장의 편지를 더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뭔가요..?”
“폐하께서 당신이 편지를 구겨버리거나 했을 때 전해 드리라던 겁니다.”
“...”
[구겨버렸니? 아니면 불태웠니? 그것도 아니면 찢어버렸니?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번 것도 그러기 전에 빠르게 마지막 말만 하는 수밖에. 다시 한 번 축하하고, 곧 내 딸.아이리스가 그쪽으로 갈 거야. 너를 만나고 싶어 해서 학교 시찰 겸 보내기로 했어. 아, 안전은 걱정 안 해도 돼!왕성귀족 가주들의 장남 장녀들이 동반하기로 했으니까. 그럼, 잘 부탁해~]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레인을 바라봤다. 레인은 말 대신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암부 건이라면 걱정 마세요. 대련이 끝난 직후에 바로 움직이도록 손을 써놨으니까요.”
“...보고 있었습니까?”
레인은 미소를 지으며 허벅지 부근을 가리켰다.
“6년 전의 상처가 욱신거릴 정도였다니까요.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네? 더 물어보실 게 남았나요?”
“대련을 전부 보고 계셨다면 알고 계시겠죠. 당신의 딸, 루아에 대해서.”
“루아한테는 질문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것도 보고 있었습니까?”
무섭다, 무서워. 암살자라는 인간들은 왜 다 이 모양이야?
레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심한 루아가 죽이고 사는 감정들이 모여 태어났다. 라고 그녀는 설명했죠. 그 말 그대로입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감정들을 일부러 뺐다 다시 꼈다. 정도일까요.”
“그게 무슨 소리...”
레인은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오.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곧 있으면 아내가 저를 찾을 시간이군요. 그럼.”
“잠..!”
내가 붙잡기도 전에 레인은 창문을 넘어 사라졌다.
누가 암살자 아니랄까 봐. 더럽게 빠르군. 그나저나 무슨 소리지? 감정을 뺐다 다시 꼈다는 게? 건전지도 아니고 그게 가능한 건가? 가능하다면 왜? 굳이?
등등 수많은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그래, 뭔 사정이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딸인데 위험이 될 만한 일을 했겠어?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고 내일 있을 취임식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은 푹 쉬기로 결정했다.
가자 침대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