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내 옆을 점거해놓고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근새근 잘만 자고 있는 라네즈와 라헨느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자,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자.
분명 어제 대련을 끝내고 레이를 회복실로 바래다 준 다음 방으로 돌아와서 적당히 뒹굴다가 바로 잠들었을 터.
라네즈와 라헨느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애내들이 내가 잘 자고 있을 때 들어왔다는 건데...
왜?
어째서?
내가 이런 고민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 고민하면 뭐하냐.
고민한다고 여기서 자고 있는 저 애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잠이나 다시 자야겠다.
나는 다시 누웠다.
“...?”
내가 다시 눕자마자, 분명 잠자고 있었을 터인 라네즈와 라헨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팔을 하나씩 가져가 두 팔로 껴안았다.
“...”
누가 보면 당장 잡혀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광경이군.
잠옷만 입은 어린여자애 둘을 양옆에 끼고 침대에 있다니.
나는 누가 들어올까 고개를 살짝 들어 문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괜한 오해사기 전에 깨워야겠다.
나는 그녀들이 껴안고 있던 내 팔을 조심스럽게 빼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들을 흔들었다.
“우음~ 5분만 더...”
“언니 일어나면 일어날래...”
아니, 잠투정 할 때가 아니라고.
너희들이 안 일어나면 분명 곧 누군가가 들어와 오해를 가득 살게 뻔하단 말이다.
세레나라던가, 세레나라던가.
하지만 한참을 깨워도 그녀들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깨우는 것을 포기했다.
후... 그래, 내가 굳이 깨울 필요 있나. 오해만 안 사게 하면 되지.
깰 때까지 산책이나 하고 있어야겠다.
30분 정도면 깨겠지.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혔다.
툭.
“...!”
“...?”
잠결로 부스스한 눈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윤기 있는 보랏빛 단발 머리. 세레나였다.
“일어나 계셨어요?”
“뭐... 일이 좀 있어서 말이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세레나는 걱정된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혹시 라헨느랑 라네즈가 어디 갔는지 아시나요? 깨우려고 방에 가봤는데 없어서...”
나는 방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방에서 자고 있어.”
“아, 그런가요. 저는 또 밖에 나간 줄 알았... 네?!”
세레나는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방에서 자고 있다고. 왜?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봐?”
세레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라네즈는 몰라도 라헨느까지 같이 있다니...”
나는 방문을 열어 침대를 보여주었다. 라네즈 자매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상태였다. 세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간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아참! 이따가 하는 취임식에 늦으시면 안돼요!”
“그래, 그래. 알았어.”
세레나는 다시 주무시면 안돼요! 라고 마지막으로 강조한 뒤에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해 살 일도 없어졌겠다, 나는 다시 방 안으로 돌아가 취임식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노크도 못 듣고 계속 자고 있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 거지?
* * *
취임식이 열리는 대강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리엘씨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리엘씨. 하나만 여쭤 봐도 됩니까?”
“네.”
“어제 했던 건 취임식이 아니었나요? 왜 오늘 또 하겠다는 건지...”
자기소개와 간단한 질의응답시간. 이 2개면 끝 아닌가? 굳이 왜 또 한다는 거지?
“현성님. 현성님께선 이 학교에 몇 번째로 오신 분인지 아시나요?”
“글쎄요?”
“스물 한 번째 분이십니다.”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그럼 내가 오기 전까지 그녀들은 20명의 강자들과 대련을 해서 이겼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곳이 지어진 지 2개월 정도 됐다고 들었는데 거의 3일에 한 번씩 싸웠다는 소리네. 대단한 녀석들.
“저희 메이드들이 명문가의 메이드들이라고는 하나 큰 반복 작업이 계속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리엘씨는 들릴락말락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준비하고 그대로 치우고, 준비하고 그대로 치우고... 그것이 스무 번을 채웠을 때 제가 대표로 아가씨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대로 가면 메이드들이 과로로 쓰러질 지도 모르니 다음에 오시는 분부터는 아가씨들과의 대련에서 승리하신 이후에 정식으로 취임식을 준비하겠다고.”
그래서 어제 대강당에 의자도 하나 없이 휑했던 거였구나. 그런데, 어차피 보통 학교도 아닌데 제대로 할 필요가 있나?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리엘씨가 말했다.
“귀족 분들의 격식이라는 것이겠죠.”
말하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대강당. 리엘씨가 문을 열면서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성님.”
* * *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뭐?”
취임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레나가 찾아와 내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저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니, 두 번 말할 필요는 없는데...”
“그럼 가르쳐 주시는 거죠?”
“...”
얘가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인 캐릭터였나?
세레나는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때 세레나의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앗! 세레나님 치사해요! 독점하지 않기로 하셨으면서!”
“맞아요! 저희도 선생님께 배우고 싶다고요!”
...더 몰려왔네.
어느새 세레나의 뒤로 30명은 넘을 것 같은 수의 소녀들이 줄을 이루고 서 있었다.
나는 내 방 앞을 빼곡하게 채운 채 내가 먼저네. 아니다 내가 먼저네. 하며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소녀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어.
“조용!”
어제 대련에서 보여준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외침에 시끌시끌하던 복도가 삽시간에 침묵으로 뒤덮였다.
나는 조용해진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내가 들을 수 있겠냐. 한 명씩 봐줄 테니 먼저 온 세레나 빼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
그녀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는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후... 힘들다...”
자식이 100명 추가된 느낌이야.
나는 방문을 열며 세레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 * *
“아, 감사합니다.”
나는 세레나에게 홍차를 내어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네.”
“무슨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선생님께서 마지막에 쓰신 마법이요!”
“...”
내가 마지막에 쓴 게 몇 갠데 그거 중에 하나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침과 함께 다시 내려 보냈다.
“저희의 공격을 막으면서 쓰셨던 마법이요. 제 생각에는 선생님의 소환수의 마력을 빌려와 소환수와 같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마법으로 추측되는데, 맞나요?”
“...어떻게 알았어?”
세레나는 에헴! 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처음에 소환하신 실레스틴이라는 고대룡과 같은 느낌의 마력이 저희들의 공격을 막은 직후와 마지막 마법을 날릴 때의 선생님에게서도 느껴졌거든요. 게다가 소환사는 소환 직후 소환 마법을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세레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계약을 통해 힘을 사용하시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해봤어요. 실제로 상위 종족과 계약을 해서 그들의 힘을 사용하는 클래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면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생각했죠. 필요할 때만 빌려올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요. 맞나요?”
...저 정도면 탐정을 해도 되겠는데? 물론 이 세계에는 탐정이라는 게 없지만.
“...정답이야.”
세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제가 잘못짚었으면 어쩌나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니까... 그래서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가요?”
세레나는 기대를 한껏 품은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네? 어떤 건데요?”
“내 생각에 네가 이 마법을 배우려는 이유가 이 마법을 통해 강한 녀석들의 힘과 경험을 받아 성장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맞지?”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한가지의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세레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그 ‘강한 녀석’은 어디서 얻을 건데? 설마 내가 데리고 있는 애들 중에 하나를 달라고 할 생각은 아니지?”
“~♬”
내 질문에 세레나는 내 시선을 회피하면서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던 거다 이 녀석.
“안... 되나요?”
세레나는 미소녀만이 가능한 비기 중 하나인 ‘밑에서 올려다보기’를 시전했다.
“좋... 아니, 안 돼!”
나는 순간 끄덕일 뻔한 고개를 휙휙 저었다.
매정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합일이야 마력에 적응할 때까지 정신력으로 수련하면 어떻게든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소환수를 주는 건 다르다고! 날로 먹는 다른 소환사들이랑은 다르게 내가 이 녀석들을 모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365일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에도 올라가 봤고! 어? 너무 많아서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고생이란 고생은 실컷 했단 말이야!
“그런가요...”
세레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 녀석 설마, 두 번째 비기인 ‘시무룩해진 척’을 시전하는 건가?
곧 있으면 ‘사연있어 보이는 얼굴하기.’ 까지 나오겠다? 어?
“어쩔 수 없죠...”
저봐, 저거! 고개 반쯤 돌리는 거!
그렇게 4번째 비기. ‘곧 울 것 같은 얼굴’ 에서 나는 패배를 선언했다.
“...소환수는 줄 수 없지만 교사 한 놈 정도는 소개시켜 줄 수 있어.”
“정말요? 어떤 분...”
그때, 누군가 내 방문을 똑똑. 하고 두드렸다. 나는 세레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방문을 열었다.
“현성님. 여쭤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건 리엘 씨였다.
나는 그녀가 무엇에 대해 물어보려 온 건지 대충 예상이 갔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문에 서 있는 파란 머리의 남자라면 제가 아는 사람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 말에 더 이상 확인할 것은 없다는 듯 리엘씨는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명문가의 메이드들이 모인 곳에서 메이드 장을 맡고 있는 사람답게 엄청나게 빠른 일처리였다.
“그래서요? 어떤 분이신데요??”
나는 언제 시무룩해있었냐는 듯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내게 밀착하는 세레나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어제 내가 빌린 마력의 주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