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계약 성립.
* * *
“서, 설마 고대룡..?”
세레나는 입을 벌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최상위 종족 중 하나인 고대룡을 교사로 소개시켜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가능한 건가요? 고대룡은 자존심이 강하며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인간들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세레나의 말은 창문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그 목소리를 따라 세레나와 나의 머리가 창문 쪽으로 돌아갔다. 햇빛에 가려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략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창문에 앉아 다리를 꼰 자세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문으로 걸어 들어왔으면서 왜 창문으로 올라오는데?
세레나가 그를 보며 내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저분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녀석이 내가 어제 빌린 마력의 주인이자 너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한 고대빙룡 스카지나다.”
내 소개에 스카지나는 여어 하는 손동작을 하며 우리에게 인사했다.
“읏차.”
그가 창문에서 내려오자 햇빛에 가려졌던 모습이 드러났다.
하늘색의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쓸데많은 잘생긴 얼굴을 겸비한 그는 구름이 그려진 파란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
“...”
그의 옷차림에 나와 세레나는 동시에 말문이 막힌 듯 그저 그를 바라만 볼 따름이었다. 그는 우리가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응? 뭐야, 왜 둘 다 그런 눈으로 보고 있어? 나 뭐 잘못했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스카지나를 위해 그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 잠옷이냐.”
내 말에 그는 옷차림을 확인하는 듯 시선을 내렸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았지만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잠옷이었던 그의 옷차림은 파란색 와이셔츠에 청바지로 바뀌었다.
하여간 누가 빙룡(?) 아니랄까. 파란색 진짜 좋아하네. 넥타이까지 파란색으로 맞출 줄이야.
“이 정도면 됐나? 후... 이래서 인간모습은 불편하다니까. 인간들은 쓸데없는 걸 너무 신경 써.”
‘그나저나 방 좋네.’ 라며 주위를 둘러보던 스카지나를 보며 나는 찬장에서 홍찻잎을 꺼내며 말했다.
“일단 앉자. 계속 서서 얘기할 수는 없으니.”
* * *
“그래서, 그쪽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합일을 쓰게 한 장본인인가?”
스카지나는 세레나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현성에게 물었다.
“합일요?”
세레나가 ‘그게 뭐죠?’ 라는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봤다.
“네가 추리했던 마법의 이름.”
“아~”
세레나는 ‘합일이란 명칭이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현성은 스카지나의 물음에 부연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정확히는 그녀를 포함한 다섯 명의 소녀들이지만.”
“고작 다섯 명을 상대로 합일까지 썼다고? 내가 알던 현성이 다 죽었네.”
스카지나는 오랜 친구인 그를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가 합일을 쓰게 된 경위를 예측해 보았다.
“분명히 기선제압으로 끝낸답시고 싸우지도 못하는 녀석을 소환했겠지. 실레스틴이 나한테 투덜거리러 왔던 걸로 봐서 소환한 건 실레스틴이었겠고. 하지만 왜인지 상대는 고대룡의 위압에도 멀쩡했으며 소환사의 패널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일을 썼다. 이거지?”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스카지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래도 대단하네.’ 라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실레스틴이 현재 싸울 수 없는 몸이라고는 하지만 저 나이대의 소녀들이 고대룡의 위압을 버틸 수 있을 줄이야.”
현성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저 애들이 평균이상으로 정신력이 강했던 거지! 관중석의 소녀들은 대부분 기절했다가 거의 마지막에 깨어났다고?”
스카지나는 그게 자랑이냐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네 잘못이지 멍청아. 그 정도도 예상 못 해? 나랑 만났을 때의 너가 지금의 너를 본다면...”
“아, 어쨌든 이겼으니 됐잖아. 옛날 얘기는 왜 꺼내는데?”
“저, 저기!”
점점 험악해지는 둘의 분위기에 세레나가 중재를 해보겠다는 듯 손을 뻗었으나
“풉... 푸하하하하!!”
“큭... 하하하하!!”
동시에 터진 그들의 웃음에 싸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그들이 눈치채지 않았기를 바라며 그 손을 그대로 찻잔으로 가져갔다.
한참동안 웃은 그들은 서로의 손을 짝! 하고 맞잡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자식, 오랜만에 봐도 여전하네! 잘 지냈냐? 아내랑 사이는 좋고?”
“당연하지! 우리 사이가 언제 나쁜 적 있었냐? 그리고 너무 잘 지내서 심심해 죽겠다!”
그 이후에 한참동안 일상적인 얘기로 떠들던 그들이 이 방안에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건 세레나가 현성의 옷자락을 잡아끌었을 때였다.
“아, 미안. 오랜만에 보다보니 너무 우리만 아는 얘기로 떠들었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응?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
스카지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레나는 ‘진짜 가능할까요?’ 라고 묻는 듯한 얼굴로 현성을 바라봤다. 현성은 내게 맡기라는 얼굴로 답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 * *
“그게...”
내가 스카지나에게 세레나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꺼내려 할 때,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렸다.
오늘만 3번째 듣는 소리에 나는 오늘따라 꽤 많이 찾아오네. 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아, 선생님..!”
문 밖에 서 있던 건 평상복 차림의 루아였다.
“루아구나? 무슨 일이야?”
“혹시 세레나 언니, 여기 계신가요? 메이드분께 여쭤보니 선생님 방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해서요...”
“응. 잠깐 대화 중이야. 왜? 급한 일이야?”
“아, 아뇨! 그... 다과회 시간이 되어서...”
다과회 시간이 되었는데 세레나가 여기 있어서 데리러 왔다는 뜻이군.
“잠시만.”
나는 소파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세레나! 루아가 다과회시간이라고 너 데리러 왔다!”
내 외침에 세레나는 벌써 그런 시간이 되었나? 라는 듯 시계를 봤다. 세레나는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듯 루아와 스카지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아마 지금 다과회에 가게 되면 스카지나가 그대로 떠나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겠지.
나는 걱정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갔다 와. 갔다 올 동안 저 녀석하고 대화 좀 더 할 테니까.”
내 말에 세레나는 안심한 듯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한 뒤에 루아를 따라갔다.
* * *
세레나를 보내고,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뭘 부탁하려고 그러는데?”
스카지나는 내가 무엇을 부탁할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마법 좀 아까 나간 걔한테 가르쳐 줘라.”
“내 마법? 어떤 거?”
“아무거나.”
“흠...”
스카지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였다. 이내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오랜 친구의 부탁이니.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기브 앤 테이크. 고대룡의 마법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우리들을 만나 배우겠다는 녀석들이 줄을 선 거 알지? 그러니 당연히 공짜는 안 돼. 내가 만족할 만한 걸 줘봐.”
“만족할 만한 거라...”
사실, 스카지나가 저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건 7년을 알고 지낸 사이로써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기의 재산을 공짜로 줄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당연히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게 있지. 미리 준비했다고 하기에는 항상 들고 다니던 거긴 하지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던져둔, 내가 이곳에 올 때 가져온 가방에서 사진첩 한 권을 꺼냈다. 나는 스카지나의 앞에 그것을 놓았다. 스카지나는 ‘이게 뭔데?’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리리에의 사진첩이다.”
스카지나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본인도 모르게 사진첩을 열려는 손을 다른 손이 막고 있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리리에를 끔찍이 귀여워하고 있는 녀석이라면 분명히 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다행히 들어맞은 모양이다.
나는 맛보기로 보라며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주었다. 기저귀를 찬 리리에가 엎어지지 않게 버티며 서서 부들대고 있는 모습. 리리에가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 등 일상적인 모습이 담긴, 본다면 누구라도 딸바보가 될 것 같은 마성의 사진첩이었다.
내가 찍었지만 아주 잘 찍었어.
나는 사진첩을 덮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더 보고 싶으면... 알지?”
“큿...”
스카지나는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고뇌에 빠진 듯 보였다. 더 보고 싶은 자신과 고대룡의 마법을 사진첩 한 권에 팔아도 될까? 라는 자신이 충돌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스카지나의 앞에 사진첩을 한 권 더 꺼내 놓았다.
“리리에의 메이드복, 수영복, 공주님 옷 등 각종 옷들을 입은 사진을 모아둔 거다."
"...!"
스카지나가 한 번 더 몸을 움찔. 하며 크게 떨었다.
거의 다 넘어왔군.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걸로도 안 되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포기하는 수밖에."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상 사진첩도 회수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전에스카지나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스카지나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긴 건 사진을 더 보고 싶은 자신인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가르쳐 줄 테니까... 빨리 줘...!”
나는 씩. 웃으며 스카지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 성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