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돌아갈 시간.
* * *
회복실의 안, 먼저 깨어난 쪽은 글라시아였다.
글라시아가 깨어난 것을 본 현성은 의자를 가져다 그녀의 옆에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너. 봐줬지?”
글라시아는 질문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현성에게 되물었다.
“이 몸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는가?”
“너 사람 아니잖아.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고.”
불쾌하다는 표정은 연기였다는 듯 시선을 회피하던 글라시아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 애초에! 그대가 그녀에게 힘을 빌려준 게 잘못이지 않느냐!!”
현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마왕급 힘이라도 빌려준 줄 알겠다? 어? 그 정도 변수도 극복 못 하면 얼음의 여왕이라는 이름 내려놔야 되는 거 아니냐?”
“그, 그래도 봐준 건 아니다!”
글라시아는 여전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현성과 스카지나가 떠드느라 놓친 대련의 끝 부분을 말해주었다.
* * *
마법과 마법이 격돌했다. 얼음 여왕인 그녀와도 맞먹을 만한 위력의 마력. 공방이 이어지면서 글라시아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느낌이지..!’
지금껏 전투로 그녀를 미소짓게 만든 자는 단 두 명, 마왕과 진현성뿐. 한 단계 더 나아갔다고는 하지만 세레나는 그 둘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럼에도 글라시아는 미소를 지었다. 감각만은 그들과 싸웠을 때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혼자 하는 게임보다는 역시 이쪽이 더 즐겁구만!’
그때, 글라시아의 눈에 노란색으로 바뀐 구체의 색깔이 들어왔다.
‘?!’
콰르릉!
번개가 글라시아를 향해 내리쳤다. 그녀는 재빠르게 얼음의 기둥을 생성해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얼음의 창을 세레나에게 쏘아 보냈다.
“읏..!”
구체의 색깔은 연두. 강한 바람이 세레나의 몸을 공중으로 띄워주었다. 그리고 다시, 구체의 색깔이 갈색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바위의 주먹이 글라시아를 향해 날아갔다. 그에 맞춰 글라시아도 그녀의 오른손에 마법을 걸어 거대한 얼음의 주먹을 장착해 그대로 휘둘렀다.
결과는 두 주먹 다 산산조각.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맞부딪힌 글라시아는 데미지가 남았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털었다.
“하아... 하아...”
세레나는 연속된 마법으로 인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마력이 얼마 안 남았어... 그렇다면..!’
얼마 남지 않은 마력. 세레나는 모든 걸 쏟아 붓기로 했다.
‘일단은 퇴로 차단부터!’
구체의 색깔이 빠르게 바뀌어감에 따라 갖가지 원소마법들이 글라시아를 향해 날아갔다.
피하거나 방어하면서 뒤로 물러나던 글라시아는 어느새 자신이 구석에 몰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면을 제외한 곳이 불과 바위 등 원소마법들로 막혀 있다는 것까지.
그것을 보며 그녀는 세레나가 의문의 힘을 얻기 직전에 그녀가 세레나에게 행했던 것처럼 모든 마력을 사용해 그녀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구체의 색깔은 무지개. 세레나의 앞에 생성된 무지갯빛 마법진에서 무지갯빛 광선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현성이 봤다면 특촬물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릴 때 한 번에 모아서 쏘는 필살기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다. 받아주마!’
글라시아는 그녀의 모든 마력을 끌어올려 오른 주먹에 모아 그대로 내질렀다.
콰과과광!!
최후의 일격의 격돌. 하지만 승자는 없었다.
‘이런... 오랜만이라 너무 흥분했나 보군...’
‘더 이상 마력이...’
그렇게 마력이 바닥난 그녀들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결국 즐거움에 앞뒤 생각 안하고 마력을 남발하다 기절했다는 거잖아. 봐준 거 맞네.”
뭘 길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어.
글라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왕이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해주거라. 그리고 저 소녀가 그대가 준 힘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게 졌으면 그렇게 치사하게 나오냐며 원망을 많이 들었을 게 아닌가? 오히려 그대는 내게 감사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스카지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건 스카지나한테나 따지라고. 저 녀석이 지 아내한테 휘둘리지만 않았어도 적응이 끝난 뒤에 대련을 했을 테니까.”
내 말에 스카지나의 몸이 움찔. 하고 떨렸다. 나는 그런 스카지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덕분에 극적인 상황에서 힘이 깨어나는 장면을 봤으니 난 만족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까먹고 있었네. 빌려준 거 돌려받아야지.
나는 여전히 깨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세레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지개 정령의 마력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저건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스카지나가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체험해볼래? 단, 아프다고 주변을 부숴버리면 안 된다?”
내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는지 스카지나는 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싱거운 녀석.
나는 피식. 웃으며 글라시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 그럼 글라시아. 너 회복 끝났지? 포탈 열어줄 테니까 이제 돌아가 봐. 수고했고 조만간 놀러갈게.”
내 말에 글라시아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괜찮다. 그녀가 곧 이리 올라올 테니 그녀를 따라 가면 된다.”
“뭐? 누가 와?”
올 만한 사람은 이제 더 없을 텐데?
내가 의문의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 글라시아가 그런 나를 의문 섞인 눈으로 보며 말했다.
“느끼지 못한 건가? 그녀가 온 것을? 스카지나는 벌써 느끼고 저기 구석에서 떨고 있지 않느냐.”
내가 시선을 옮기자 방금까지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은 어디 갔는지 어느새 회복실의 구석에서 문을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스카지나를 볼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저 정도로 떨고 있다는 건...
똑똑.
그때, 회복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리엘씨가 서 있었다. 리엘씨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손님이 한 명 와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온 거라며 편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대충 내 손님이라고 답하자 알겠다며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여전히 일처리가 빠른 사람이다.
잠시 후, 다시 회복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문을 열자 루아와 비슷해 보이는 나이대로 보이는, 글라시아가 지금 모습에서 조금 어려진다면 저런 모습일 것 같은 백발의 여인이 회복실의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그녀 쪽을 보며 구석에서 떨고 있는 스카지나를 보더니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스카지나~!!!”
“억!!”
그녀와 충돌한 스카지나는 그대로 그녀와 함께 침대로 쓰러졌다. 그녀는 스카지나의 품에 얼굴을 파묻더니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글리아... 잠깐...”
“싫어요! 요즘 여기 다니느라 제게 소홀했잖아요! 지금만큼은 만끽하게 해달라구요!”
“그쯤하거라 글리아. 병실에서는 조용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글라시아의 말에 글리아라고 불린 여성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나중에 돌아가서 잔뜩 즐기면 되겠죠.” 라며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겠다는 듯 스카지나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나저나 그러고 온 게냐?”
글라시아는 글리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글리아는 응? 하며 그녀의 옷차림을 보았다.
용 상태의 스카지나가 캐릭터 잠옷으로 만들어진다면 딱 저 모양일 것 같은 잠옷을 입고 있는 글리아.
글리아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으며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스카지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며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그렇게 몇 분정도 얘기를 나누던 모녀는 세레나가 깨어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하던 말을 끊었다.
“그럼 슬슬 가자꾸나. 그나저나 오랜만에 너희들 신혼집에서 신세 좀 지고 싶은데.”
“어..?”
“어머, 저희의 집으로 오시게요?”
스카지나와 글리아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내가 너희들의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게 싫은 것이냐?”
글리아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어머니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럼 가실까요~”
스카지나의 목덜미를 잡고 끄는 글리아. 끌려가던 스카지나는 켁켁대며 글리아의 소매를 툭툭 두드렸다.
“자, 잠깐...”
“안 돼요~”
글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스카지나의 몸이 급속도로 얼더니 이내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여전히 무서운 여자다.
얼어있어서 말은 못하지만 스카지나의 표정에서 도와달라는 뜻을 읽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힘내라며 엄지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장모님의 갑작스런 방문... 힘내라 남편!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던 글리아는 문득 내 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가도 되죠? 설마 또 남은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나는 즉시 정중한 포즈로 회복실의 문을 열며 말했다.
“아뇨. 바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혹시 걷기 불편하시다면 포탈을 열어드릴까요?”
“어머, 친절하셔라. 그러면 저희의 보금자리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바로 열어드리겠습니다~”
나는 공간계열 소환수와 합일을 해 한 번 가봤던 곳으로 포탈을 열게 해주는 마법을 사용했고, 우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스카지나의 신혼집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글리아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얼음덩어리가 드르륵. 땅을 끌며 그녀와 함께 포탈을 넘어 사라졌다.
“오랜만에 잘 놀았고, 조만간 또 보자꾸나.”
글라시아가 내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 조만간 보자고. 그리고... 스카지나를 잘 부탁한다.”
내가 넌지시 농담같은 부탁을 던지자 글라시아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탈로 들어갔다.
* * *
“선생님..?”
포탈이 닫히자마자 세레나가 깨어났다. 비몽사몽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그녀와 현성, 둘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챈 듯 현성에게 물었다.
“다들 가신 건가요..?”
“그래. 방금 갔어.”
세레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카지나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못 드렸는데.”
“나중에 또 볼 때가 있겠지.”
“그럴까요... 아..!”
세레나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급하게 현성에게 물었다.
“결과는요? 대련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마지막 격돌 후의 기억이 없어서...”
현성은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무승부. 판정을 내리는 결계석이 너희들의 마지막 격돌로 인해 부셔져서 말이지. 나와 스카지나가 무승부로 합의 봤어.”
“그러면 소원권은...”
“둘 중 하나겠지. 둘 다 하나씩 갖던가. 둘 다 안 가지던가. 네 선택에 맡길게.”
세레나는 당연하다는 듯
“둘 다 하나씩 갖는 걸로 하죠!”
라고 대답했다.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나 보네.’
현성은 터무니없는 소원만 아니길 바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손에 들고 계신 건 뭔가요?”
세레나가 현성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보며 물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 있었지. 편지라고 하던데?”
‘리엘씨가 나한테 온 거라며 준 건데...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는 편지라. 설마 또 국왕은 아니겠지?’
현성은 편지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
“?”
편지의 첫 줄을 읽은 현성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중간쯤 갔을 땐 떨림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고 마지막 줄까지 읽은 그는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갑작스런 현성의 모습에 세레나는 놀라며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현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어? 어... 어...”
말을 더듬으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는 현성을 보며 세레나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현성의 손에서 편지를 빼와 읽어보았다.
그 편지의 첫 줄에는 ‘아이리스 왕녀로부터 현성님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