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아이리스 왕녀.
* * *
[아이리스 왕녀로부터. 현성님께.
현성님 안녕하세요? 아이리스에요!
네, 맞아요. 아벨 왕국 제 3왕녀 아이리스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3일 후에 현성님이 계신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학생으로 가는 건 아니고 학교가 잘 운영 되고 있나 시찰 겸. 이라고 해요.
오랜만에 현성님을 뵐 생각에 밤잠을 못 이뤘답니다.
아! 물론 저 혼자 가는 건 아니에요!
왕성귀족의 자제분들께서 호위로 동행해주시기로 하셨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에 많이 이동하면 너무 눈에 띌 것 같다고 저와 프리무스님은 마차로, 다른 분들은 각자의 이동수단으로 시간을 맞춰서 이동하기로 했답니다.
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편지로 쓰려니 너무 길 것 같네요. 나머지는 도착해서 느긋하게 얘기하면 되겠죠!
그러면 3일 후에 뵈요~]
라고 써진 편지를 읽은 세레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체 덜덜 떨고 있는 현성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기껏해야 왕녀가 이곳을 방문하겠다는 편지일 뿐이었다. 그 편지의 무엇이 그를 저렇게 떨게 만들었는지 현성 본인이 아닌 이상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편지를 보낸 아이리스 왕녀라면 알고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여기에 없지 않은가.
세레나는 피어오르는 의문을 잠시 접어두고 일단 현성부터 진정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어느새 현성은 일어나서 무릎을 털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세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현성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응. 오랜만이라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나보다. 잊어주라.”
“오랜만?”
현성은 세레나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어. 그럼 나는 일과가 있어서 이만.”
우당탕!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회복실을 나가려던 현성은 자신의 발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선생님?!”
“...괜찮아. 그리고 미안한데 잠시만 이대로 있게 해주라.”
“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성은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세레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으신 거... 맞죠?”
현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쯤 되면 적응해야지...”
그런 다음 세레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현성은 그럼, 진짜 이만. 라고 말하며 회복실을 나갔다.
‘도대체 왕녀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그녀가 아는 왕녀 아이리스는 ‘인덕의 왕녀’라고 불릴 만큼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녀와 인성으로 견줄 만한 사람은 교회의 ‘부활의 성녀’뿐. 그런 그녀의 존재가 누군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것을 세레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맞으시기라도 한 걸까?’
피식. 방금 떠올랐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으면 최고의 농담이라며 웃어댔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 또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가 볼까.”
두 분의 일을 굳이 내가 알 필요는 없겠지. 라고 생각한 세레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 * *
아이씨. 창피한 꼴을 보였네. 오랜만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어.
내 방으로 돌아가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이리스 왕녀.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성격으로 아마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온다는 소식에 어째서 그렇게 공포에 질린 듯 떨었는가.
내가 이 학교의 총괄을 맡게 된 이유였던, 내가 찾아 헤매는 레이나 카렌이란 의문의 여성에 의해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이세계에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저 살아남기에만 급급했고, 그런 이유로 내 성격은 점점... 뭐랄까, 더러워져갔다.
스승이라 부를만한 사람을 만나고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스승이 모종의 사건으로 죽게 돼서 더 삐뚤어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 하나 잡으려고 네 가문 가주들과 장남 장녀들. 그리고 모험가 길드 상위 랭커들이 전부 출동할 지경에 이르렀다.
싸움은 이틀 정도 이어졌다. 결국 난 수적 열세에 패배했고 이대로 죽나 싶었는데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아이리스 왕녀의 침대 위였다. 아이리스 왕녀만이 풀 수 있는 마력을 봉인하는 팔찌를 찬 채로.
팔찌를 풀어주는 조건은 그녀와 기사의 계약을 맺어 1년 동안 그녀의 전속 기사로 있을 것.
기사의 계약을 하면 그녀에게 거역할 수 없게 되며 계약을 해지할 때까지 그녀 전용이 되는, 소환사의 계약과 비슷한 부류의 마법이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 힘이 없다면 다시 평범한 인간일 때로 돌아가기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기사의 예의를 배워야 된다며 아이리스 왕녀가 직접 나를 가르쳤는데...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몸이 또 덜덜 떨리기 시작했으니까.
거긴 지옥이었어... 차라리 몸으로 뛰는 게 낫지...
뭐, 그래도 그녀와 나를 멈춰준 그들에겐 감사하고 있다. 좀 과격하긴 했지만 그녀가 나를 갱생시켜준 덕분에 인과관계도 원만해질 수 있었고, 나를 멈춰준 그들 덕분에 내가 더 막나가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과 싸웠던 시점에서 막나갈 수 있는 최대치까지 막나간 셈인가?
여하튼, 이런 저런 이유로 내 뇌리에는 그녀에 대한 공포가 깊게 박혔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어 몸이 반응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사의 계약이 끝나 내가 떠나기 전에 그녀가 나한테 뭐라고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음... 기억이 안 나네... 중요한 게 아니었나?
나는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음 일과를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 * *
“후훗.”
등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왕족임을 뜻하는 금색 눈동자. 아벨 왕국 제 3왕녀 아이리스는 그녀의 방 안에서 곧 있을 만남의 기대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왕녀로서 예의를 차리라고 했겠지만 혼자 있는 방 안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던 그녀는 문득 현성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상처 입은 짐승 같으셨지.”
다음으로 떠올린 건, 성을 몰래 빠져나간 그녀가 납치당할 뻔 했을 때 그녀를 구해준 현성의 모습이었다.
“그때는 진짜 멋있었지...”
똑똑.
그렇게 그와의 추억에 잠기던 중,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이리스, 자니?”
익숙한 목소리. 그녀의 언니인 제 2왕녀 아이리의 목소리에 아이리스는
“안 자! 들어와도 돼!”
라고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아이리스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그녀와 똑같이 금색 눈동자의, 제 2왕녀 아이리가 침대로 와서 아이리스의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얘는. 언니가 동생하고 같이 자러 오는데 이유가 있니?”
그렇게 침대에 누운 자매는 오랫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중, 주제가 현성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3일 후에 현성님을 뵈러 간다면서?”
“응!”
“이번엔 성공하길 빌게~”
“무, 무슨 소리야 언니...”
놀리듯 찡긋. 윙크를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아이리에 아이리스는 부끄러움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이내 눈만 내민 채로 아이리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그렇게 티나?”
아이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현성님이 떠나고 난 뒤에 너, 엄청 노력했잖아? 현성님의 취향에 맞추려고.”
현성님은 어떤 취향의 여성을 좋아하시나요?
긴 생머리에 귀여운 외모의 가슴은 중간 이상의 여성.
그 말 한 마디에 그녀는 머리를 길렀으며 몸매를 가꾸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오로지 그의 이상의 여자가 되기 위해.
“하암~ 그럼 언니는 잘게...”
어느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응... 잘 자...”
아이리에게 인사를 한 아이리스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움과 동시에
‘이번엔 꼭...’
무언가를 다짐하며 베개를 꽉 껴안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