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수면 아래에 비친 붉은 달빛의 그림자.
* * *
“그래서, 그냥 몸만 덩그러니 온 거야?”
인형으로 가득 찬 방안, 분홍색 커튼이 달린 침대 위에서 발을 위 아래로 흔들며 인형들을 가지고 놀던 긴 갈색 머리의 소녀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병력만 잃어서 돌아왔다고 말하는 그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 쓸모가 없네. 기껏 언니가 힘을 줬고, 인마 전쟁 때 싸웠던 갑옷들까지 부활시켜 부하로 쓰라고 줬더니만.”
외견으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몇 백 년을 산 마족으로, 현재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의 간부 중 하나였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며 그녀는 필요 없다는 듯 휙휙. 손을 내저었다.
“됐어, 사과들으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 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말하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를 안 하면 되는 거랍니다. 라고 말했단다.”
갑작스럽게 그들의 뒤에서 들리는 나긋나긋한 여인의 목소리에 그녀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고급스러운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그러니 너무 질책하지마렴, 리리스. 트라우마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잖니.”
리리스라고 불린 침대 위의 소녀는 흑발의 여인의 말에 입을 내밀며 불만을 표했다.
“실비아 언니는 너무 물러! 아무리 트라우마가 깊다고 해도 6년이나 지났는데 그걸 못 잊고 상대가 말한 어이없는 이유에 반박도 못하고 돌아온 게 말이 돼? 언니만 아니었어도 실에 매달아서 평생 인형 노예로 지내게 했을 거야.”
“너도 백년이 지났지만 번개가 치는 날이면 무섭다며 내게 같이 자 달라고 하잖니.”
“그,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얘기잖아!”
얼굴을 붉히며 반박하는 리리스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실비아는 문득 그녀가 왜 여기에 왔는지 생각난 듯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알트. 트라우마 때문에 힘든 건 알겠지만 다른 분들은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자리에 없네요. 시간상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알트밖에 없는데, 괜찮나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알트를 보며 실비아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알트. 지난번에 우리 쪽으로 ‘모셔’온 대예언자가 한 말을 들었죠?”
알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었습니다. 흰 태양이 질 때 붉은 달이 떠오른다. 하고 마왕 부활의 열쇠는 만 19세 미만의 귀족들의 딸이라고 말한 거 말씀이시죠? 그래서 간부 분들이 해석하기로, 흰 태양은 마왕님을 쓰러뜨린 백야를 상징하는 것이니 ‘백야’ 출신인 왕성 귀족 가문의 소녀들을 데려와 예언을 실행시킬 방법을 찾겠다고 하셨죠.”
“그래요. 하지만 멍청하게도 하급마족들이 왕성 귀족을 습격하는 바람에 저희들의 계획이 들통 났답니다. 그러니 평생 하급으로 사는 거겠죠.”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때문에 왕국의 귀족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귀족소녀들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한 간부 분들은 아마 그들이 자신들의 딸을 어딘가 한곳에 모아서 강한 사람에게 지키게 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것에 관해서 어제 ‘조력자’에게 정보가 들어왔어요.”
“찾은 건가요?”
“정확히는 기사단의 부단장이 타고 날아가는 페가수스를 쫓아가 보니 우연히 찾게 된 거지만요.”
실비아는 알트에게 학교로 보이는 곳의 위치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 등, 조력자로부터 들은 것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래서 알트, 당신에게 부탁할 것은 내일 아침 일찍 그곳으로 가서 방해꾼들을 없애고 왕성 귀족의 딸들을 데려오는 거랍니다. 시체도 챙겨올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알트는 너무 큰일을 그에게 맡긴다는 듯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실비아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지금 그곳에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포함한 ‘백야’ 출신이 네 명이나 있다는 소리신데, 아무리 실비아님께 힘을 받은 저라도 네 명이나 상대면...”
“걱정 마요, 알트. 그런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있으니까. 리리스?”
리리스는 불만이라는 듯 볼을 부풀렸지만 언니의 말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칫. 하며 혀를 차고서 들고 있던 곰인형의 등 부분의 지퍼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더니 알트에게 집어던졌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받아낸 알트는 그의 손 안에 들린 게 초승달 모양의 은빛 펜던트라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뭔가요?”
“인식표라고 생각하면 되요. 적과 아군을 확실하게 나누기 위한.”
“인식표요?”
알트는 펜던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의 느낌에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펜던트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걸로 뭘 하라는 건가요?”
실비아는 설명을 대신해달라는 듯 리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리리스는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침대에서 일어나 인형들이 가득 쌓여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비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인형들의 눈에 빛이 번쩍이더니 리리스가 서 있는 곳을 기준으로 인형들의 산이 양 옆으로 갈라졌다.
“저건..?”
인형들의 산 밑에 묻혀있던 건 하나의 검은 관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한 걸까. 라는 의문을 그에게 들게 한, 흉흉하면서도 강대한 마력을 내뿜고 있는 관이었다.
“네게 준 그 펜던트는 이 녀석을 네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필요한 거야. 그걸 들고 마법 주문을 말하면 이 녀석이 너를 주인으로 인식해 네 말을 따를 테니까, 이걸 들고 그곳으로 가서 쓸어버려. 아무리 ‘백야’ 라도 넷이서는 절대 이 녀석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네가 아무리 쓸모없는 멍청이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대체 저 안에 들어있는 게 뭐길래...”
상대는 마왕마저 쓰러뜨린 ‘백야’ 출신이었다. 하나하나가 수준 이상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리리스는 저 관 안에 있는, 그녀가 ‘이 녀석’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말해도 못 믿을 테니까 내일 직접 확인해보든지!”
흥! 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리리스. 그녀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 다시 곰인형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저 애도 참... 미안해요 알트. 저 애도 나쁜 의도로 저러는 건 아니니까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말아요.”
실비아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알트에게 사과했다.
알트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제 실수로 인한 일. 이번에 맡겨주신 일을 성공하는 걸로 만회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알트. 그럼 잘 부탁해요. 이번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온다면 제 힘을 더 드릴게요. 그러면 분명 공석인 간부자리에 오를 수 있겠죠.”
“넵! 꼭 해내겠습니다! 붉은 달에게 영광을!”
힘차게 말하며 알트는 방을 나섰다.
* * *
“정말 저런 녀석에게 ‘그’를 맡겨도 되는 거야? 붉은 갑옷들처럼 또 뺏기고 오는 거 아니야?”
알트가 방을 나가자마자 리리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불만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되살리는데 언니의 마력이 얼마나 들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붉은 갑옷들을 잃고 돌아온 그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을 쥐어준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실비아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리스.
실비아는 그런 리리스를 뒤에서 안아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랬다.
잠시 후,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실비아의 손길을 느끼며 미소를 짓고 있던 리리스의 눈에 실비아의 옷차림이 들어왔다.
리리스가 평소에 본 실비아의 옷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오늘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합쳐져 귀족처럼 보이는 그녀의 복장에 리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그 옷은 뭐야? 거의 항상 검은색만 입지 않았어?”
“귀족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거든. 저녁에 잠깐 갔다 올 거란다.”
“정보 수집이야?”
“그런 거지.”
그렇구나. 하며 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실비아가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을 느끼던 리리스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언니. 만에 하나라고 하지만 그가 지면 어떻게 할 거야? 이미 한 번 진 전적이 있잖아.”
“걱정 마렴. 나조차도 삼켜질 뻔 했을 정도로 미련이 강했으니. 그런 미련을 가지고 부활한 자가 네 말처럼 네 명을 상대로 지지는 않을 거란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아련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기사 중의 기사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