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모험가들의 연회.
* * *
내가 레이가 회복실에서 쉬는 동안 남은 커피를 비우기 위해 가게로 돌아오자, 세레나가 황급히 내게 달려오더니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레이가 그녀에게 나한테 전달해달라고 말한 것을 전달하지 못해 혹시나 큰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하는 듯 불안한 표정의 세레나를 진정시키며 지금까지의 일을 말해주었다.
내 말이 끝나자 세레나는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이의 상태를 보고 오겠다는 세레나에게 이왕 가는 거 나 대신 그녀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 달라고 말했다.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고, 나는 다시 아이리스의 옆, 내 원래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들었을 때,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주변을 둘러보니 라네즈 자매와 루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어?”
“배부르고 졸려서 먼저 숙소로 가시겠다고 하셨어요. 루아님은 라네즈, 라헨느님께서 양손을 잡고 끌고 가셨지만요.”
...도시 안이기도 하고 루아도 데려갔다고 했으니 걱정할 건 없겠지.
어떤 의미에서 레이보다 더 믿음직 한 녀석이니까.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었네.”
안타깝게도 커피는 다 식어서 아이스커피가 되어 있었다.
꽤 빨리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관우처럼은 안 되는 건가.
한 잔을 더 시키기에는 곧 다시 모험가 길드로 돌아가 봐야 해 시간이 애매했기에 어쩔 수 없이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마시는 걸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미안하네.”
갑작스런 내 말에 아이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쓴 거 말이야. 안 그랬으면 너 데리고 다른 곳들도 가볼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이 지나면 아이리스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간다. 왕녀라는 특성상 오늘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놀러 다닐 기회는 앞으로 거의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리스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지난 몇 년보다 지금의 몇 시간이 저에겐 더 즐거웠으니까요. 다만...”
“다만?”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이리스는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아쉬워하는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분명히 가뜩이나 귀족 소녀들을 돌보느라 힘든데 편히 쉬자는 취지에서 온 관광을 그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거다.
나와는 다르게 한없이 착한 마음씨를 가진 그녀가 나를 배려주고 있는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리스. 솔직히 말해봐. 너, 아직 아쉽지?”
“네? 그게...”
“더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내가 쉴 시간을 뺏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거잖아.”
내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아이리스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네...”
“그럴 줄 알았다. 자, 가자.”
“어딜요?”
그렇게 묻는 아이리스에게 나는 잡고 일어나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가 가고 싶은데 어디든.”
* * *
아이리스와 함께 즐길 거리는 즐기고 먹을거리는 먹고 볼거리는 보며 돌아다니던 와중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까 내게 언데드 사태에 대해 설명해주었던 모험가 랭크 A랭크의 흑발의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그에게 묻자 그는 이번 언데드 사태로 인해 꽤 많은 돈을 번 모험가들이 주점을 통째로 빌려 연회를 열자는 말이 나왔고,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 인원수를 채우기 위한 사람을 찾던 중 아이리스와 걸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해 연회에 오지 않겠나. 물어보기 위한 거라고 대답했다.
“지난번에 빚진 것도 갚을 겸 말이죠.”
모험가들이 여는 연회라. 괜찮을 것 같은데?
귀족들이 하는 고급스러운 연회는 왕녀인 아이리스가 많이 겪어봤을 테니 이참에 투박한 모험가들의 연회를 경험시켜 주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험가들이 먹는 영양이라고는 없이 맛만 챙긴 음식들을 잔뜩 먹인데다가 술까지 마시게 했다는 것을 알면 시종장뿐만이 아니라 여왕도 날 죽이려 들겠지만, 들키지 않으면 장땡이다.
“아이리스, 네 생각은 어...”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아이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어지간히 그런 거에 흥미가 있었나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는 작게 웃으며 내게 입장권처럼 보이는 것을 건네주었다.
“시작 시간은 밤 열 시에요. 혹시 더 모셔오실 분이 계시면 딱 한 분정도는 더 가능하니 팍팍 모셔와 주세요. 그럼!”
말을 마친 그는 우리에게서 등을 돌려 떠나갔다.
데려올 녀석이라...
나와 같이 이곳에 온 녀석들 중에 음주가 가능한 사람은 아이리스와 레이, 둘 뿐이었다.
권유나 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레이 녀석 성격에 그런 자리에 참석할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우리 둘만 가지 뭐. 오늘의 주인공은 아이리스니까.
나는 그를 상대하느라 놓았던 손을 다시 아이리스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우리는 다시 걸어볼까? 열 시까지는 아직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네!”
내 손을 맞잡으며 아이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 * *
“그래서 내가 그 녀석들을...!”
“알았으니까 잔 흔들면서 말하지 마!”
“3번 테이블에 맥주 추가!”
“주인장! 여기도 맥주 더 줘!”
주점에 들어서자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들과 점원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빈자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님~ 여깁니다, 여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역시나, 흑발의 청년이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옆에 동료로 보이는 듯한 3명의 여자들이 앉아있다는 것이었다.
...저기에 껴도 되는 거야?
애인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는데 애인이 눈치 없이 10년 지기 친구를 데려온 것 같은 분위기잖아.
그는 그런 그녀들의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반가운 얼굴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절하기에도 그랬다. 우리가 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확신한 것 마냥 음식과 맥주잔이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 둔감한 건 여전한 건가.
나중에 다른 자리가 비면 나도 모처럼이니 애인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그가 자신의 동료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맨 왼쪽의 마법사로 보이는 은발머리의 여자가 시온. 가운데의 성직자로 보이는 흑발의 여자가 크리시. 맨 오른쪽의 그녀의 몸 만한 대검이 옆에 놓여 있어 전사로 보이는 푸른 단발의 여자가 마린이라고 했다. 참고로 그의 이름은 카이다.
전형적인 모험가 파티로 보이는 그들이었다. 남자가 둔감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도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리스에 대해서는 왼손 약지의 ‘인식 저해 반지’를 보여주며 내 애인들 중 하나라고 농담식으로 둘러댔다.
아이리스가 항의하는 듯 내 소매를 잡아 당겼다. 나는 씩.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카이의 옆에 앉아있는 세 명이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나 지금이라면? 이라는 듯 시온이 카이에게 머리를 내밀었다.
“응? 왜 그래, 시온? 뭐 묻었어?”
당연하지만 둔감 Max인 우리의 카이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시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파이팅.
* * *
“자, 여러분~! 달려보자고요!”
"“와아~!!!”"
“...”
엄청난 환호성이 주점에 울려 퍼졌다. 주점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희가 춤을 추는 무대를 향해 맥주잔을 들어 보이며 마치 아이돌의 콘서트에 온 팬들마냥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래, 이런 게 모험가의 연회지. 귀족들이 보면 예의가 없다, 야만스럽다. 이럴 테지만 모험가들만 모인 곳인데 누가 그렇게 말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분위기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무대에는 춤을 추는 무희 대신에 맥주잔을 들고 흔들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아이리스였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당장 말려야 할 상황이었지만 아이리스가 왕궁에서 얼마나 절제하며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저렇게 예의범절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그녀를 그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간 뻗겠지. 그럴 기미가 보이면 그때 가도 늦지 않아.
벌써 열 잔을 넘게 마시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저렇게 잘 놀 수 있는 걸 왕궁에서는 어떻게 참고 지냈대. 나였으면 벌써 뛰쳐나왔겠다.
그렇게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점점 커지는 환호성과 함께 열 두잔 째의 맥주가 담긴 잔을 들이키던 아이리스는 맥주잔이 입에 닿은 채로 우뚝. 멈췄다.
곧 뒤로 쓰러질 것이라는 신호에 나는 재빠르게 한쪽 팔로 아이리스의 허리를 휘감았고 다른 손으로는 아직 맥주가 남아있는 맥주잔을 아이리스의 손에서 빼왔다.
아이리스를 보니 헤롱헤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까딱하고 있길래 나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꽉 잡아.”
내 말에 아이리스가 양팔로 내 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으며 내 품에 볼을 비볐다.
“현성! 현성! 현성!”
그대로 나가려던 찰나, 카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무언가를 원한다는 듯 소리치기에 관객석을 보니 다들 그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눈빛들이었다.
조금 식어버린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려 주기를 바라는 듯 반짝이는 눈빛들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저 녀석이 진짜.
나는 카이를 원망스럽다는 눈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술의 힘이 더 강했는지 카이는 휘파람까지 불어가며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하고 나갈까 생각하던 찰나.
화악!
아이리스가 내 목을 휘감은 두 팔에 힘을 주며 그녀 쪽으로 당겼다.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와아아아!!”
다음 순간, 지금까지 들은 것보다 훨씬 큰 환호성이 터져나와 주점을 가득 메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