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다크 나이트.(1)
* * *
“이곳인가.”
실비아가 알려준 길을 따라 학교로 보이는 곳의 정문에 도착한 알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문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봐도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귀족의 자제들을 모아둔 곳인데 호위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혹시 그가 잘못 온 건 아닌가 생각도 해봤지만 현재 이곳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깨닫자 호위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인과 마. 세계가 두 종족의 편으로 나뉘어 싸웠던 대전쟁인 인마 전쟁.
그 전쟁을 끝낸 것은 40명의 정예들이었다.
얼음 여왕 글라시아가 지키던 글라시아 설원으로 시작해 마왕에게 도달하는 관문을 지키고 있는 간부들을 지나 마침내 마왕마저 전부 쓰러뜨린 그들.
그랬던 자들이 4명이나 이곳을 지키고 있으니 호위를 둘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웬만한 자들은 근처에 다가올 엄두조차 못 낼 테니 말이다.
그건 알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의 옆에 놓여있는 검은색의 관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그의 상관, 실비아의 말이라도 어떻게든 거절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알트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흐리네요. 비가 오려는 걸까요? 루이네님은 비가 오는 날씨를 좋아하시나요?”
“응. 방 안에서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빗소리를 좋아해서 비가 오는 날이 좋아.”
“저도요, 저도요! 천둥만 안 친다면 말이지만요...”
“후훗, 나도 천둥은 싫어해. 라네즈하고 라헨느가 무서워하거든.”
그때, 긴 백발에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열 댓 명의 귀족 소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알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벽 뒤에 숨으며 얼굴만 살짝 내밀어 상대를 확인했다.
귀족 소녀들 사이에서도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여인에 알트는 품에서 실비아가 그에게 건네준, 이곳의 위치를 알려준 정보원에게서 받았다고 말한 왕성 귀족 장남 장녀의 사진을 꺼내서 그녀와 대조해보았다.
긴 백발에 새하얀 피부, 팔랑거리는 흰색의 드레스에 허리춤에 찬 검집까지, 사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아리아 가문의 장녀이자 현재 기사단의 부단장, 루이네 아리아라는 것을 확인한 알트는 기습을 위해 그녀가 등을 돌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습을 한 다음 그녀가 당황한 틈을 타서 저 관 안의 무언가를 꺼내 그녀를 빠르게 해치운 뒤에 열 댓 명의 소녀들을 인질로 잡는다. 가 그가 바로 그 자리에서 세운 계획이었다.
잠시 후, 루이네 일행이 그가 숨어있는 벽을 지나쳐 근처의 분수대를 반 바퀴 돌아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마법을 영창했다.
검은 화염의 덩어리가 그의 손 안에 생성되었다.
‘조금만 더...’
그때, 루이네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곁에 있던 귀족 소녀들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질적인 마력을 눈치 챈 건지 루이네는 몸을 돌린 다음, 귀족 소녀들을 그녀의 뒤로 물렸다.
“루이네님?”
의아해하는 귀족 소녀들의 물음을 뒤로하고, 루이네는 알트가 숨어있는 방향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손님으로 오신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나오세요.”
‘쳇.’
앞으로 한 걸음이었다. 한 걸음만 더 갔으면 알트의 불덩이가 그녀의 뒤를 노리고 날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 건지, 루이네는 귀신같은 타이밍에 알트의 존재를 눈치 챘던 것이었다. 게다가 우연이 아니라는 듯 그가 숨어있는 곳을 정확하게 바라보기까지 하고 있었다.
“역시 백야출신이로군.”
알트는 대단하다는 듯 박수를 치며 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마족!”
루이네의 뒤에서 무슨 상황인가 의아해하던 소녀들은 알트의 머리 위에 달린 붉은 색의 뿔을 보더니 그가 마족임을 눈치 챘다.
책으로 읽거나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마족의 모습에 대부분의 소녀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
루이네는 그런 소녀들을 온화한 말로 달래며 자신이 이곳을 막고 있을 테니 어서 가서 집무실에 있을 프리무스 일행에게 적이 왔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소녀들은 빠르게 집무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스릉.
루이네는 알트가 그녀들을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고 생각해 검집에서 검을 빼들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왜인지 알트는 그녀들을 그냥 보내주었고 그런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던 루이네는 도발을 조금 섞으며 넌지시 그를 떠보기로 했다.
“안 쫓아가시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제 동료들까지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의외로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들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약하지. 아무리 그분께 힘을 받았더라도 고작해야 상급 마족 정도일 텐데, 그 정도 가지고는 마왕님마저 쓰러뜨린 너희들을 이기기는 고사하고 공격이 스치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알트는 품에서 리리스에게 받은 초승달 모양의 은빛으로 빛나는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 안 하려고.”
씨익. 웃는 알트를 보며 그가 들고 있는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지는 펜던트를 경계하던 루이네의 눈에 문득 어느 샌가 알트의 옆에 놓여있는 검은색의 관이 들어왔다.
‘저 관...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
흉흉하면서도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는 검은 관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하려는 듯 펜던트를 관 위에 올려놓는 알트.
그것을 보자 루이네의 모든 감각이 동시에 경종을 울렸다. 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일어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네 주군으로써 명한다.”
루이네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알트를 향해 날아갔다.
투쾅!
한 번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그녀는 땅을 박차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 곳의 중앙의, 희미하게 사람의 잔상으로 보이는 것을 향해 마력이 담긴 검을 휘둘렀다.
챙!
“읏..!”
하지만 그녀의 공격은 무언가에 의해 막혔고, 그녀는 지잉. 하며 몸에 전해지는 떨림에 얼굴을 찡그리며 크게 뒤로 물러났다.
철커덕.
그때, 흙먼지의 안에서 갑옷이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그렇게 몇 번 정도 갑옷이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루이네는 침을 꿀꺽. 삼켰고,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부웅!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흙먼지의 안에서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쿠과과과!
동시에 흙먼지를 반으로 가르며 검게 빛나는 검기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큿..!”
막을 수 없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한 루이네의 몸은 옆으로 굴렀고, 간신히 피하는데 성공했다.
콰과광!
방금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를 검게 빛나는 검기가 베어 가르며 지나갔고, 검기의 경로에 있던 분수대가 검기에 맞아 산산조각났다.
두근. 두근. 두근.
그 광경을 본 루이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몸이 1초만 더 늦게 반응했거나 막는다는 판단을 했다면 산산조각이 나는 건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성능 확실하네!”
알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이네.
알트의 옆에 서 있는, 알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툭툭 두드려 대고 있는, 그녀에게 검기를 날린 존재를 확인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집무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던 프리무스, 리안, 하이네는 사색이 되어 황급히 집무실로 들어온 귀족소녀들에게 루이네가 정문에서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하던 것을 내팽개치며 정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정문의 근처에 도착해 루이네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던 프리무스 일행의 눈에 산산조각이 나있는 분수대가 들어왔다.
“분수대가 박살나 있는 걸로 봐서는 이 근처일 텐데...”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몰랐기에 프리무스 일행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투쾅!
슈아악! 쾅!
그때, 굉음과 함께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어떤 물체가 그들을 빠르게 그들 사이를 지나가 분수대가 있던 자리에 처박혔다.
“뭐야?!”
그들은 날아온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 분수대가 있던 자리로 황급히 달려간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여기저기 상처가 나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루이네였다.
“루이네! 괜찮아?!”
“아, 아직...”
“말하지 마! 상처가...”
“막... 아..!”
쿠과과과!
루이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 빛의 검기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고, 프리무스는 재빨리 뒤로 돌며 마법을 영창해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소환했다.
투쾅!
“큭..!”
간신히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방패가 쨍그랑!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하이네! 정령의 힘으로 루이네에게 치유의 마법을 걸어줘!”
한 번의 공방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프리무스가 검기가 날아온 쪽을 응시하며 하이네에게 외쳤다.
“이미 하고 있어!”
하이네가 마법을 영창하자 초록색의 정령이 나타나며 무어라 중얼거렸고, 초록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체들이 루이네의 상처들에 들어가 번쩍였다.
상처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가쁜 숨을 고르던 루이네의 호흡이 점점 안정되어 갔다.
“아~ 이제야 다 모이셨군? 기다리느라 잠들 뻔했어~!”
능글맞게 말하는 목소리에 프리무스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획! 하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돌려졌고, 반갑다는 듯 두 팔을 벌리며 서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루이네를 이렇게 한 건가?”
프리무스가 묻자 알트는 아쉽다는 듯 입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랬으면 기분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야. 저 아가씨를 저렇게 만든 건 이쪽.”
딱! 하고 알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알트의 옆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철커덕거리며 검은 갑옷이 걸어 나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갑옷을 본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설마...”
“아니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프리무스 일행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검은 갑옷은 등 뒤의 검을 꺼내들었다.
모든 빛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칠흑같이 어둡고 거대한 양날검이었다.
“칠흑검...”
그들이 아는 자가 생전에 그들을 향해 휘두르던 검이었다.
검은 갑옷은 검을 땅에 박더니 검을 향해 손을 내밀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투확!
그러자 땅에서 검은 불이 솟구치더니 불꽃의 안에서 다그닥거리는 발굽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안장의 부분을 제외한 모든 몸에 검은 불꽃을 두른 말이 불꽃 속에서 히히힝! 하며 힘차게 울부짖으며 달려 나왔다.
콧김을 내뿜으며 달리고 싶다는 듯 앞발로 땅을 긁기 시작한 말을 달래며 검은 갑옷은 안장에 올라탔다.
“나이트메어...”
그들이 알던 자가 생전에 몰던 말이었다.
“진짜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저 검은 갑옷이 그들이 아는 그 자가 아니라고.
직접 싸워봐 그의 강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 4명으로는 저 자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니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그들이 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검은 갑옷은 그가 맞다고.
“다크 나이트..!”
검은 불꽃을 두른 말에 올라타 그들을 내려다 보는 검은 갑옷을 보며, 프리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