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싸움의 끝. (2)
* * *
검은 갑옷, 다크 나이트와 얘기를 시작한 앨리아를 뒤로하고, 나는 마네킹마냥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멍하니 앞만 보고 있는 알트에게로 걸어갔다.
“야.”
“말도 안 돼...”
“야~”
“그럴 리가 없어...”
“야?”
“다크 나이트라고..? 그 백야조차 10명을 죽였다고 알려진 최강의 일격이 듣도 보도 못한 마법에 밀려..?”
몇 번을 불러 봐도,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봐도, 영혼이 가출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느라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는 알트. 꽤 충격이 컸나보다.
그도 그럴게, 그가 마지막에 내게 날린 공격은 전쟁이 끝난 뒤에 책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우리 ‘백야’의 10명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간, 자기 모든 마력을 검에 담아 한 번에 내지르는 최강이자 최후의 공격이었다.
이 제복 비슷한 옷차림의 모습의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저렇게까지 충격을 먹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알트 녀석은 당연하게도 모를 수밖에 없다. 이 모습을 제대로 알고 있는 녀석들은 다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들뿐이니까.
그의 처지에서 보면 100퍼센트 승리를 따 놓은 당상이라고 볼 수도 있는 공격을 가볍게 파훼시킨 것이었다. 다크 나이트 하나만 믿고 쳐들어온 녀석으로서는 충격이 클 수밖에.
그나저나 어디 가서 쉽게 못 보는 마법이긴 한데, 듣도 보도 못하다는 평을 받다니. 스승이 들었다면 한 대 맞았겠군.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는 알트를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까, 계속 관찰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리리에가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릴 것이 분명했다. 늦었다가 삐져서 ‘아빠, 싫어!’ 소리라도 듣는 날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의 발은 그를 걷어차고 있었다.
“으억?!”
꼴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알트. 땅에 이마를 제대로 박아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우, 아프겠다.
잠시 엎어진 상태로 있던 알트는 천천히 얼굴을 들더니 자기가 왜 바닥에 엎어져 있는지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
“안녕?”
나와 눈이 마주쳤다.
“으, 으아악!”
다시 한번 꼴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이번엔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 알트. 겁에 질린 얼굴이었지만 살고 싶다는 본능이 공포를 이겼는지 벌떡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달리면 세게 부딪칠 텐데.
나는 차마 앞으로 일어날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쾅! 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머리를 세게 박아 뒤로 고꾸라진 알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기절 안 한 게 용할 정도네.
“오, 오지 마!”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보자 겁에 질린 얼굴로 결계의 끝에 등을 밀착시키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결계를 퉁퉁 두드리는 알트. 누가 보면 죽이려 드는 줄 알겠다.
난 그냥 얘기만 좀 하고 싶은 것뿐인데. 저렇게 싫다는 반응을 보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대만 때릴 거 두 대로 늘리도록 하자.
“응?”
그런 생각을 하며 알트의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위화감에 그를 자세히 보니.
“너, 뭔가 어려진 것 같다?”
내가 걷어찰 때만 해도 중년이었던 알트의 모습이 어느샌가 고등학생 정도로 어려져 있었다.
“어, 어?”
내 말에 알트는 자기 얼굴과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법이 풀렸어..? 그럴 리가..! 그분께서 직접 걸어 주신 마법인데..!”
말투가 외견하고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거였군. 이 결계 안에서는 내 마법을 제외한 모든 마법이 무효화되니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온 거고.
자기 외견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믿기지 않음과 당혹함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알트에게.
“자, 그럼 진정한 것 같으니, 우리 얘기 좀 할까? 리리에가 깰 때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짧고 굵게.”
라고 말하며 씩. 웃어 주었다.
* * *
“이, 이게 내가 아는 전부야...”
왜인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내게 얘기해준
“진짜 그게 다야?”
“으, 응! 애초에 난 간부급도 아니라...”
“간부급도 아닌 놈한테 다크 나이트같은 존재를 맡긴다고?”
“가, 간부 바로 밑급이라 그래! 이, 이번 일만 성공하면 나도 간부급으로 올려 준다고 했단 말이야...”
알트가 내게 말해준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랬다.
[예언에 따라 마왕의 부활을 위해 귀족들의 딸을 데려가려고 했지만 예언을 자기들끼리 알아서 풀이해 왕성 귀족의 딸로 목표를 변경, 알트와 다크 나이트를 보내 방해물들을 처리하고 그녀들을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내 덕?에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대부분 아는 정보들이잖아. 목표를 왕성 귀족의 딸들로 바꾼 건 걔네들이 물려받은 마력이 다른 애들에 비해 많기 때문일 거고.
내가 원하는 정보는 적어도 간부가 몇 명이고, 어디에 모여 있고 등의 정보를 원한 거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건지 말하지 못하는 건지 결국 듣지 못했다.
그럼, 이제 이 녀석한테 더 볼일은 없군. 빨리 보내놓고 리리에가 깨기 전에 돌아가야지.
결계를 열기 위해 손가락을 튕기려던 찰나.
아, 맞다. 까먹을 뻔했네.
튕기려던 손을 멈추고 알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응?”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내민 손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는 알트.
“내놔.”
“뭐, 뭘?”
“갑옷 깨울 때 썼던 펜던트.”
“그, 그건...”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알트는 울상을 지으며 내게 초승달 모양의 은빛 펜던트를 건네주었다. 펜던트를 건네받은 나는 손가락을 튕겨 결계의 한쪽을 딱 사람 하나 지나갈 만큼 열어 주었다.
“그럼, 수고했고. 잘 가.”
“어, 어?”
알트는 의외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봤다.
“왜? 가라고 해 놓고는 뒤통수 칠까 봐?”
“그, 그러려던 거 아니었어..?”
얘 좀 봐라. 나를 진짜 쓰레기로 아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말로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죽이려 했으면 6년 전에 처음 봤을 때나, 어제 만났을 때 죽일 수 있었어. 너를 안 죽이는 이유는 그저 그때나 지금이나 네가 자의로 한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도 결국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녀석이니까. 하지만 만약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거라면...”
나는 손으로 목을 슥, 긋는 표현으로 말을 대신해주었다.
“아니지?”
알트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진짜 가도 돼?”
보내주는 건 기쁘지만 진짜
“네가 죽고 싶다면 죽여 줘도 되고.”
나는 손가락을 튕기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을 본 알트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야! 갈게! 바로 돌아갈게!”
벌떡 일어난 알트는 헐레벌떡 결계의 틈 사이로 뛰어나가 이내 내 시선에서 사라졌다. 이럴 때는 정말 날쌘 녀석이다.
알트가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앨리아에게로 걸어갔다. 무릎베개라도 해 줬는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앨리아를 볼 수가 있었다. 내가 다가온 것을 눈치챘는지, 앨리아가 천천히 일어섰다.
“얘기는 끝났어?”
“응.”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기로 했다. 그들만이 아는 얘기일 테니까. 내가 들어서 어디다 써?
“그럼 가자.”
결계를 해제하려고 손가락을 튕기려던 찰나, 앨리아가 내게 물었다.
“괜찮은 거야?”
“뭐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게 되면 주인 귀찮아질 거 아니야. 주인이 일부러 인지도도 그나마 적은 이 왕국에 머물렀던 이유가...”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귀찮아질 만한 것들은 다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너에 관한 건 네가 근처에 있었는데도 못 알아챈 녀석이니 돌아가서도 나에 대한 것만 보고할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하지만...”
“하지만?”
나는 살짝 열려 있는, 내가 알트를 돌려보내기 위해 열어둔 결계의 한 부분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응?”
앨리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리고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아도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다크 나이트라는 존재를 마법 한 방으로 쓰러뜨린 자에게 그렇게 금방 다시 덤벼들겠어?”
“그건 그래.”
“그리고 이거.”
“응?”
나는 앨리아에게 알트에게서 받아온 펜던트를 건네주었다.
“니꺼 맞지?”
펜던트를 받아 든 앨리아의 눈이 동그래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거 어디서 났어? 그날 이후로 사라져서 나도 찾다가 포기한 건데.”
“알트가 가지고 있어서 뺏었... 아니, 정당한 거래로 받았어. 너한텐 소중한 거였지?”
“응... 이건 그가 내게 줬던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으니까.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 주인.”
소중하다는 듯 펜던트를 꼭 껴안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앨리아.
“그나저나 주인...”
펜던트를 목에 건 앨리아가 갑자기 내 팔을 그녀의 양팔로 감더니 유혹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 왔다.
“내가 꺼내달라고 하긴 했어도 이곳에 온 이후로는 안 했는데... 어때? 오늘 밤에?”
그 행동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 하지만 오늘은 안 돼.”
“왜~”
“넌 만월 때 상대해주잖아. 그리고 오늘은 발키리 자매들한테 상을 줘야 돼서 안 돼.”
그녀들이 원하는 게 뭔지는 너무 뻔하니까.
“칫...”
앨리아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신성력 때문에 하지도 못하는 애들이 뭐가 좋다고...”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그보다 급한 거 아니야? 곧 리리에가 깰 시간이잖아.”
“아, 맞다! 빨리 가 봐야... 어라?”
“왜 그래?”
앨리아가 결계를 열려다 만 내 행동을 보고 의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날 기미가 안 느껴지는데?”
리리에에게 걸어둔 특수한 마법으로 인해 그녀가 잠들거나 깰 때는 정확하게 특정할 수가 있다. 보통 이 시간쯤 되면 항상 깨어난다고 알람마냥 머릿속에서 울려대는데, 왜인지 오늘은 조용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 아~ 맞다! 어제 주인 없다고 자동인형인가 그것들한테 동화책 읽어달라고 그러더라고. 주인이 설정해 놓고 간 게 없으니 걔네들은 리리에의 말에 따라 계속 동화책을 읽어줬고, 그렇게 새벽까지 동화책 듣다 잠들었어.”
그런가. 그래서 늦잠을 자는 거구나. 그래도 슬슬 가보긴 해야겠지. 그나저나 내가 있을 때에 아무 말 없이 잘 잤던 건 자기가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내가 못 자니까 더 놀고 싶지만 잤던 거구나. 기특한 녀석. 다음에는 질릴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 줘야겠네.
“그래? 그거면 다행이고. 그러면 조금 여유가 생겼으니 바깥에 있는 애들의 상태를 봐줄 수 있겠네. 넌 이제 들어가 있어.”
“네~”
휘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앨리아의 모습이 사라졌고, 나는 손가락을 튕겨 결계를 해제했다.
* “ ”
결계를 해제하자.
“응?”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귀족을 뜻하는 것 같은 금발. 듬직한 뒷모습. 볼 때마다 입고 있는 귀족식 의복.
프리무스와 레이의 아버지이자 왕성귀족 4가문 중 하나인 르니아 가문의 가주, 아이테르 데 르니아였다.
그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듯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오, 현성! 역시나라고 생각했지만 잘 해결한 것 같군!”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왕녀님을 모시러 왔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이런 상태지 뭔가. 그래서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프리무스에게 듣고 있었네. 하지만 자네가...”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가까워져오는 소리가 들렸다.
“현성님!”
내게 달려온 아이리스는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괜찮으세요?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은 없으시고요?”
오랜만에 힘을 써서 혹시 그때처럼 폭주하지는 않을까 걱정한 건가.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잠시 내 몸을 살펴보던 아이리스는 몇 초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듯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도 많아. 내가 이 힘을 제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고작 한 번의 마법으로 그때처럼 이성을 잃고 날뛸 리가 없잖아. 그래도 걱정해주니 기쁘긴 하네.
“그런데 현성님 혼자서 억누르는 건 역시 그 정도가 한계군요.”
“역시 느껴지는 건가.”
“네, 엄청 찌릿찌릿해요.”
억누른다고 억누른 건데. 역시 그녀의 마력이 아니면 완전히 억누르는 건 불가능한 건가. 내 마력이 마력인지라 이대로 다니면 분명 밤에 악몽꾸는 애들도 생겨날 텐데...
“아, 그래. 아이리스, 방법이 있다.”
“뭔데요?”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리스의 왼손 약지에 끼워줬던, 미드나에 갔을 때 그녀에게 선물했던 ‘인식 저해의 반지’를 가리켰다.
“미안한데 그 반지, 다시 줄 수 있을까?”
“네?”
“너도 알다시피 이 마력은 그녀의 마력이 담긴 반지로 보통 사람의 수준으로 억누르는 게 가능했잖아? 임시방편이지만 그녀와 비슷한 마력을 지닌 애들이 저기 있잖아.”
나는 근처에서 대기하는 발키리 자매들을 가리켰다.
“저 애들의 마력을 여기에 담으면 그녀를 만나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그런가요...”
아이리스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약지에서 반지를 빼내 내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요. 대신, 나중에 제 소원하나 들어 주세요.”
“그래. 이상한 것만 아니면 얼마든지 들어 줄게.”
“맹세!”
“그래, 스승에게 맹세코.”
아이리스에게서 반지를 받아 든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내 신호에 발키리 자매들이 일제히 내 앞으로 날아와 한쪽 무릎을 꿇었고, 나는 반지를 그녀들에게 건넸다. 그녀들의 마력이 담긴 반지를 왼손 검지에 끼니 그제야 날뛰던 마력이 조금 잠잠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스터. 부상자들은 다 회복실로 옮겨놨습니다.”
“잘했어.”
“저기...”
“응?”
아이테르에게 말할 것이 있어서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발키리 자매들이 보내오는 기대의 눈빛에 나는 그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기에 간단명료하게 대답해주었다.
“밤에. 리리에가 잠들고 난 후.”
““네! 마스터!”“
내 말뜻을 이해한 발키리들은 내게 경례를 올리더니 하늘로 날아올라 뿔뿔이 흩어졌다. 아마 잔당이 더 없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겠지.
“아이리스님. 가실 시간입니다.”
“벌써요? 하지만 아직...”
“현성이 있으니 뒷정리는 걱정 안 하셔도 되지요.”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어떻게 알고 바로 처리해주시는군. 여전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니까.
“그래, 가 봐.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딸 바보인 너희 아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하니까.”
“알겠어요... 약속 꼭 지키셔야 돼요!”
“그래, 그래. 조만간 보자.”
아이테르가 타고 온 듯한 고급스럽게 생긴 마차를 타고 아이리스와 아이테르는 반쪽밖에 없는 정문을 지나 이내 내 시선에서 사라졌다.
후우... 이제야 끝난 건가. 이제 좀 쉴 수... 없겠군.
내 휴식을 위한 시각은 몰려든 소녀의 파도에 밀려 삼켜지고 말았다.
“마지막에 쓰신 그거, 뭔가요? 처음 보는 마법인데 나중에...”
“제복차림인가요? 잘 어울리세요!”
“선생님! 아이테르님과 친하게 대화를 나누시던데, 혹시 귀족이셨나요?”
“선생님!” “선생님!”
“...하아.”
소녀의 반짝이는 눈빛과 무수한 질문 세례에 둘러싸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 같네. 힘내라, 나.
* * *
“허억! 허억!”
알트는 달리고 또 달렸다. 이미 도망치려던 목표인 ‘학교’는 저 멀리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분명히 이대로 돌아가면 인형 실에 매달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태로 평생을 그녀의 노예로 지낼 것이 뻔했다.
‘그래도 상황을 설명하면 봐주시지 않을까.’
상대는 그 ‘다크 나이트’가 날린 최강의 공격을 일격으로 막아 낸, 아니. 오히려 삼켜 버린 마법을 사용한 남자다. 정보원한테서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자가 있다고 듣지는 못 했으니 정보원을 탓하면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일단 돌아가서 상황 설명을...”
“그럴 필요 없다.”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알트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들의 사이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건장한 체격을 지닌 사람이 걸어 나왔다.
“넌...”
그는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자, 잠깐..! 여기에는 사정이..!”
“네 사정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내가 아는 건, 그분의 신뢰를 네가 저버렸다는 것뿐. 그것도 세 번이나. 쓸모없는 존재는 붉은 달에 필요 없다.”
스르릉.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에 새겨진 문장들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젠장!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알트는 남은 힘을 쥐어짜네 양손에 검은 불꽃을 둘렀다. 그것들을 후드를 향해 던졌지만 그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후두둑.
무언가가 알트의 주변에 떨어졌다. 나무 위에 있던 새들이었다. 하나같이 어딘가 베인 상태였다.
‘아...’
알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검을 검집에서 꺼내게 한순간부터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겼다.
잠시 후, 검을 다시 검집에 넣은 그는 허리춤에 찬 술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나저나, 진현성이라고 했던가. 설마 그를 호위로 쓸 줄이야. 왕성 귀족도 얕잡아보면 안 되겠군. 돌아가서 그분께 보고해야겠어.”
술병을 다시 허리춤에 꽂은 그는 나무들의 사이로 걸어 들어갔고, 이내 그의 모습이 나무들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