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100 대 1.
* * *
“돌아왔습니다. 실비아님.”
응접실로 보이는 방의 안, 후드를 뒤집어쓴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가 무릎을 꿇은 방향에는 귀족들이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고혹적인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다리를 꼰 자세로 의자에 앉아 제목이 없는 책을 읽고 있는 흑발의 미인이 있었다.
“아, 어서 와요. 딜리트.”
실비아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딜리트라 불린 남자는 일어나며 후드를 벗었다. 헝클어진 흑발에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빛나는 건 한쪽뿐, 다른 한쪽은 다친 건지 패션인건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당신에게서 나는 피 냄새로 보니... 알트가 어떻게 됐는지는 안 물어봐도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이번 일을 실패하면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누구라고요?”
딜리트는 그가 본 것을 실비아에게 말해주었다. 현성의 마력의 기운이 급격하게 변한 것부터 다크 나이트의 최후, 최강의 공격을 가볍게 눌러버렸다는 것까지.
“진현성... 당신의 오른쪽 눈을 앗아갔다던 그 남자 말하는 건가요?”
“네.”
현성의 얘기를 꺼내자 딜리트는 과거의 상처가 욱신거리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안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다면 다크 나이트를 이긴 것도 납득이 가네요. 마왕군 시절에 당신과 그의 역량은 비슷했으니까요. 어쨌든 수고했어요, 딜리트. 다음 일을 맡길 때까지 쉬고 있어요.”
딜리트는 꾸벅.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비아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실비아는 들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오셨네요. 두 번째 장기말.”
후훗.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찻잔을 세팅하는 등 손님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백발의 남자가 응접실의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아스모.”
“처음 뵙겠습니다, 실비아님.”
새하얀 피부가 받쳐주는 수려한 외모에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그는 실비아의 반대편에 앉았다,
남자는 찻잔을 한 모금 홀짝였다.
“그래서, 제게 부탁하실 거라는 건?”
“어머,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는 건가요? 조금 더 차의 맛을 즐기시다가 천천히 시작해도 될 텐데요.”
“이곳의 상태를 보아하니 제가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죠. 당신이 부른 게 아니면 이런 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실비아는 이해한다는 듯 짧게 웃으며 얘기를 시작했다.
* * *
슈아악!
의문의 물체가 빠른 속도로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타다다닷!
그 소리의 뒤로 여러 명이 달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저게 신체 강화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사람의 속도라고요..?”
“왠지 자신감 있게 말씀하신다 했어요..!”
“여기는 세레나. 기숙사 2층 복도에서 놓쳤어요. 1층이나 3층으로 가신 것 같아요.”
여러 명이 달리는 소리의 정체는 무언가를 쫓고 있는 20명 정도의 귀족 소녀들이었다.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 소녀들. 그중 연보랏빛 머리의 소녀는 통신 마법으로 누군가에게 현 상황을 알렸다.
“여기는 라네즈! 기숙사 1층 계단에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메이드 언니들 외에는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어!”
땋아진 금발을 오른쪽 어깨에 올리고 있는 소녀가 곰 인형을 귀에다 대며 들려오는 통신마법에 대답했다.
“메이드사이에 메이드로 변장해 숨어들었을 가능성은?”
그들이 쫓는 남자라면 필시 여장을 한다는 부끄러움도 감수하며 이기려들 터. 그것을 잘 아는 세레나였기에 주의에 주의를 요망했다.
“걱정하지 마! 매일 보던 언니들밖에 없었으니까! 수상한 사람은 우리 곰돌이가 잡아낼 수 있다구!”
다음으로 통신 마법에 대답한 사람은
“라헨느... 4층... 메이드 언니들밖에 없어...”
“꺄~ 귀여우세요~”
“그, 그만...”
토끼 인형을 들고 땋여진 은발을 왼쪽 어깨에 올린, 메이드들의 애정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였다.
“레이. 기숙사 5층. 우리들 말고는 느껴지는 게 없어. 나머지에게 여길 맡기고 나도 3층으로 내려갈게.”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이라 불리는 헤어스타일의 소녀는 다른 소녀들에게 혹시나 목표가 올라올 수도 있으니까 잘 보고 있어 달라고 말한 뒤에 계단을 내려갔다.
범인을 몰아넣는 경찰들처럼 서로에게 통신을 하며 누군가를 찾는 듯 기숙사의 각 층에서 두리번거리던 소녀들. 복도의 끝, 모퉁이에서 돌아 나오는 한 남성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3층의 소녀들이었다.
“저기예요! 통신 마법으로 다른 분들께 위치를!”
“네, 네! 여기는 루아! 기, 기숙사 3층 복도에서 발견했어요! 쪼, 쫓을게요!”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분홍 머리의 소녀는 땅을 박차며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칫!”
한 무리의 소녀들에게 들킨 남성은 온 길을 되돌아가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분홍 머리의 소녀, 루아가 오기까지 앞으로 조금이었지만 단시간이라도 체력을 회복해 둬야 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시 숫자는 무시하지 못하겠어. 어딜 가나 소녀들 천지니...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되겠어. 이대로라면 분명 샌드위치 마냥 포위되어서 잡히고 말거야. 시간을 늘리고 무대를 조금 더 넓힐 걸 그랬나?’
왜인지 여러 무리의 소녀들에게 쫓기고 있는 것은 단정하게 정리를 하지 않아 이리저리 헝클어진 검은 머리와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매. 검은빛을 띄는 눈동자를 지닌, 그리고 이 학교의 총괄이자 학생들의 보호자를 맡은 진현성이었다.
‘그냥 대표자 몇 명 선발해서 하자고 할걸 그랬어! 소환수도, 마법도, 합일도 없이 100명과의 술래잡기라니! 반대의 상황은 몇 번 신세를 졌지만 직접 쫓겨보니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
후회를 해봤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 그렇다면 어떻게든 잡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다.
“차, 찾았어요!”
“저기 계셔요!”
“계단이에요, 계단!”
“아이 씨..!”
숨을 고를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몰려드는 소녀의 압박. 현성은 재빨리 계단의 난간을 밟으며 도약해 윗층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추격전.
무엇 때문에 양측 다 저렇게 필사적인 걸까. 무언가 큰 상품이라도 걸린 건지 현성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소녀들이었지만.
“포박!”
“꺄악!”
“앗! 죄송해요!”
현성을 잡기 위해 날린 마력으로 만들어진 밧줄이 오히려 같은 팀으로 보이는 소녀를 휘감는다던지.
“잡았..!”
“앗..!”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현성을 쫓다가 똑같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메이드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부딪친다던지. 등 작은 사건들에 휘말린데다가 이리저리 층과 복도를 옮겨 다니는 현성에 그를 쫓던 귀족소녀들은 대부분 다리가 풀려 귀족의 예법은 개나 주라는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벽에 기대는 자세를 취했다.
귀족의 예법을 중시하는 그녀들의 부모가 이 광경을 봤다면 각혈했겠지만 이 학교는 특수한 곳이라 현성과 학생들, 메이드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까다롭게 예법을 지키는 지 감시하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대부분의 학생이 체력문제로 리타이어되었지만 딱 두 명. 현성과 비슷한 속도로 잡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소녀들이 있었다.
“빠, 빨리 잡혀주세요..!”
그중 한 명은 분홍 머리의, 가슴에 커다랗고 부드러운 흉기를 가진, 귀엽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소녀, 루아였다.
루아는 현성의 손을 향해 그녀의 손을 뻗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보아 현성의 손을 잡으면 이 추격전이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진 않겠다는 듯 현성은 그녀의 손을 쳐 내고는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거절이다! 난 너희의 메이드복 차림을 꼭 보고야 말겠어!”
현성이 이겼을 때의 상품은 아마도 귀족 소녀의 메이드복 차림인 것 같았다. 옷 중에 메이드복을 제일 좋아하는 현성의 특성 상 상품으로 내걸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그, 그건 안 돼요!”
자신이 메이드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했던 것일까.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진 루아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속도를 더 올렸다.
파바바밧!
손을 잡으려는 자의 손과 잡히지 않으려는 자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격돌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말이다.
‘도대체 저렇게 큰 걸 달고 있는데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 거야? 아무리 암살자 클래스라도 너무하잖아!’
더욱 빨라진 루아의 속도에 현성은 겨우겨우 루아의 손만을 쳐 내며 그녀의 추격을 떨쳐낼 방법을 생각했다.
후웅! 후웅!
바람을 일으키며 눈앞을 지나가는 현성과 루아를 본 메이드 중 한 명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의문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는 걸까요? 저분들...”
“어라, 못 들었어요?”
“네? 뭘요?”
“그게 말이죠... 오늘 아침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