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밤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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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 무거워...
무언가가 짓누르는 느낌에 손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무언가에 잡혀 있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가위가 눌렸다는 현상인가..? 이럴 때 어떻게 하더라. 가물가물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면 된다고 들었는데.
“하읏!”
응? 뭐야 방금?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확인해 보기 위해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히야앗!”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움직이려는 찰나.
“마스터... 거기는 안 돼요...”
들려오는 여자의 가쁜 숨소리와 야릇한 목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뭔가 여기서 더 하면 심의 규정을 어길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의해 잡혀 있는 오른팔을 재빨리 빼냈다.
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하기 위해 내가 움직인 오른손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발키리 자매 중 둘째인 앨리나가 눈을 감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내가 이상한 곳을 만진 건 확실해 보였다.
남아 있는 감촉으로 미뤄볼 때 금단의 과실이나 소중한 곳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딜 만진 거지?
“그래도... 마스터의 손길... 부드러워서 좋아... 음냐...”
다시 잠든 듯 앨리나의 숨소리가 다시 안정되었다. 도대체 내가 어딜 건든 거야?
나는 왼쪽을 움직이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해 고개만 살짝 들어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고개를 들자 내 양팔, 양 다리, 허리를 꼭 껴안은 채 새근새근 자는 발키리 자매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애들한테 상준다고 같이 잤지.”
눈앞의 광경을 봄과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 * *
“내가 마스터의 옆에서 잘 거라니까!”
“무슨 소리야 언니! 막내인 내가 제일 마스터의 가까이에서 자야지! 사랑스러운 동생을 위해 양보도 못 해 줘?”
잠옷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소녀들이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말다툼의 이유는 누가 가장 나와 가까운 자리에서 잘 지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그냥 빨리 정하고 잤으면 좋겠는데. 누가 내 옆자리가 됐든 다 내 소중한 애들인데 누가 좋고 나쁘고가 있을 리가 없잖아.
저대로 두면 계속 싸우느라 밤을 샐 것 같았기에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그냥 가위바위보로 결정해... 왜 그런 걸 가지고 싸우고 있어?”
그리고 이어진 가위바위보. 최종 승자는 막내인 엘린과 첫째인 앨렌이었다.
나머지 자매들의 부러운 눈빛을 받으며 엘린은 행복한 얼굴로 내 왼쪽에 누웠다. 이제 앨렌만 내 오른쪽에 누우면 남은 자리를 나머지 애들이 채워 넣을 것이다. 8명이 다 들어가도 남을 만큼 침대는 넓으니까.
“안 와?”
“그... 저기... 저는 굳이 마스터의 옆이 아니라도 되니까... 동생들한테 양보해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기는. 말끝을 늘이는 것에서 이겨서 좋긴 한데 맏언니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좋다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라고 말하는 게 다 보인다 이것아.
나는 둘째인 앨리나와 셋째인 엘로니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들은 씩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에잇!”
“꺄악?!”
엘렌을 그대로 밀어 버렸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엘렌은 그대로 밀려 내 품에 폭. 하고 안기게 되었다.
“너, 너희들..!”
“승부는 승부! 언니는 잠자코 마스터의 옆에서 주무시라고요!”
“맞아요! 괜히 언니의 체면이니 뭐니 그런 거 따지지 마시고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그냥 형식적인 말일 뿐, 실제로는 행복하다는 게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진짜 괜찮다면 내 품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다시 시작된 남은 자리 차지하기 가위바위보. 이긴 애들과 진 애들의 표정차이가 명확했다.
“다 정했어? 그러면 자자... 나 슬슬 피곤해...”
“그러면 불 끌게요!”
발키리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한 뒤에 나는.
“언니! 조금만 더 옆으로 가 봐요!”
“나도 자리 없어!”
내게 조금이라도 더 붙으려는 기 싸움을 펼치는 것을 봄과 동시에 내 몸 양쪽의 튼실한 과실들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감촉이 이렇게 생생한데 잘 수 있을까. 와 지금이 여름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함께.
* * *
“그렇게 잠들었었지.”
밤의 기억이 떠오른 나는 여전히 옴짝달싹 못하는 몸을 보며 그녀들을 깨워야 되나 생각했지만.
“그래, 좀 더 자라.”
내가 조금 힘들면 그만이지. 아니면 이대로 다시 잠들어도 되고. 그래, 그게 좋겠다. 괜히 내가 여기서 움직이면 애들도 깰 테니까. 어차피 곧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게 될 거야.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지 못했다. 똑똑. 하며 노크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현성님. 리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벌써 리엘씨가 나를 깨우러 올 시간인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대로 몇 분 뒤에 다시 오겠지만 깨어 있는 상태라 대답을 안 하기도 그랬다. 괜히 왔다 갔다 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
그래, 이런 상황을 보고 호들갑을 떨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네, 일어나 있어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리엘씨가 방으로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일어나 있다고 말하면 ‘알겠습니다.’ 라고 갈 텐데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편지라던가 전할 게 있는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그녀는 침대 위의 상황을 보더니.
“도와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만큼은 풀어지게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곧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게 될 거다.
“편지라도 온 건가요?”
“네, 르니아 가문의 가주, 아이테르 드 르니아님께서 현성님께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 인간은 뭔 아침부터 편지를 보내고 난리지. 또 실없는 소리만 써놨을 것 같은데. 그리고 말할 게 있으면 어제 여기 왔을 때 말했으면 됐잖아.
“보시다시피 지금은 읽을 수 없는 상태니 저기 책장 위에 두고 가시면 애들 일어난 뒤에 볼게요.”
리엘씨는 책장에 편지를 올려 두고는 침대 위의 상황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발키리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현성님께서는 꽤 절륜하신가 해서요. 일곱 분이나 상대하실 정도면...”
“예..?”
내가 이해를 못한다는 표정을 짓자 리엘씨는 작게 웃었다.
“후훗, 농담입니다. 일곱 분이나 상대하셨으면 아직 주무시고 계셨겠죠. 그리고 저분들의 옷도 흩트려짐 없는 상태고요. 게다가 제가 보기에 현성님과 저분들은 연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딸 쪽에 더 가까운 것 같고요.”
말을 마친 리엘씨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방을 나갔다.
리엘씨, 섹드립도 칠 줄 알았구나...
* * *
리엘씨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스터, 일어나셨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발키리 자매 중 첫째인 앨렌이었다. 왔군. 기상나팔.
“응. 일어나 있기는 한데 일어나지는 못하는 상태야.”
“네? 일단은 들어가겠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앨렌은 침대 위에서 내 온몸을 가지고 놀고 있는 발키리 자매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의 옆이라고 풀어져서는...”
스읍... 앨렌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기상!!”
“꺄악!!”
“엄마야!”
우당탕!! 발키리들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의 속박이 해제되었다. 역시 맏언니다.
침대에서 떨어진 발키리들은 아침이라 비몽사몽할 법도 한데
“당장 옷 갈아입어. 아침 훈련 시작이다.”
“네? 벌써요?”
“조금만 더 있게 해 주세요~!”
셋째인 엘로니와 넷째인 엘룬이 귀여운 반항을 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마스터께서 계셔서 이 시간까지 잘 수 있었던 거다. 자, 빨리!”
투덜거리며 나머지 자매들은 환복을 시작했다. 환복이라고 해봤자 변신물 마냥 몸이 번쩍이면 자동으로 옷이 바뀌는 게 끝이다. 책이나 애니에 나오는 속옷을 봐버려서 맞는 장면은 얘네들에 한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지.
어차피 이미 볼 거 다 봐서 괜찮긴 하지만.
자, 그럼 나도 슬슬 일어나볼까.
“응..?”
둘째인 앨리나부터 여섯째인 엘로니까지. 대부분 환복을 완료했지만 딱 한 명 환복은커녕 일어나지도 않은 녀석이 있었다.
“음냐... 헤헤...”
나를 꼭 껴안은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키리 자매 중 막내인 엘린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앨렌의 기상나팔에도 일어나지 않다니. 의외의 강적이 있었군.
앨렌이 한숨을 내쉬며 엘린을 깨우려고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얘는 놔둬.”
“네?”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깨울 수는 없잖아. 내가 이따가 깨울게.”
“...알겠습니다.”
“치사해요!”
“맞아요! 왜 엘린만!”
“저희도 마스터의 옆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잘 수 있다고요!”
바로 다른 자매들의 반발이 빗발쳤지만 그래 봤자 둘째부터 여섯째다. 맏언니인 앨룬이 씁! 하며 노려보자 금세 멈추는 그녀들의 반발이었다.
“그럼, 아침순찰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아~”
“엘린 부럽다~”
여전히 내 품에서 자는 엘린을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보며 발키리들은 한 명씩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그녀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반쯤 감긴 눈으로 하품하며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엘린.
“그래. 잘 잤다.”
“다른 언니들은요..?”
“아침 순찰.”
“아~ 그렇군요... 아침 순찰... ...네?!”
아침 순찰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엘린은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 창문 밖을 살폈다.
“진짜 순찰 중이잖아..! 서, 설마 저... 늦잠 잔거예요?! 크, 큰일이다..! 앨룬언니 늦잠 자면 엄청 잔소리하는데!”
패닉에 빠진 듯 덜덜 떠는 엘린. 그녀의 설교는 기본이 1시간, 길면 7시간도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잘 듣고 있는지 확인까지 하니 완전 지옥이 따로 없다.
내가 그녀에게 설교를 딱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날 이후 절대 앨룬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기로 다짐할 정도니까.
“걱정하지마. 내가 잘 말해놨으니까.”
엘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엘린마저 언니들을 따라 학교 순찰을 나섬으로서 방 안엔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앨렌에게만 말해 두었다. 라는 말은 구태여 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야 그 편이 재밌으니까. 한동안 고생 좀 할 거다.
“그럼, 씻으러 가 볼.. 윽.”
발키리 자매들에게 온몸을 사로잡힌 채로 밤새 있느라 굳어질 대로 굳어졌는지 움직일 때마다 우둑 우둑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너무 굳었어...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간신히 이끌며, 발키리 자매들의 소동으로 인해 리엘씨가 건네준 르니아 가문에서 왔다는 편지는 까맣게 잊은 채로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 * *
반짝.
“...”
반짝. 반짝.
“끙...”
반짝. 반짝. 반짝.
“하...”
나는 지금 도망치고 있었다. 뭐로부터? 나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소녀의 눈빛으로부터.
검은 갑옷, 다크 나이트의 습격이 있던 게 바로 어제였다. 왕성 귀족의 장남 장녀인 프리무스, 리안, 하이네, 루이네가 쪽도 못쓰고 당해 버린 상대를 마법 한 방으로 날려 버렸으니 귀족 소녀의 나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신뢰와 관심도가 올라가는 건 좋긴 한데, 이건 너무 부담스럽잖아.
어딜 가나 반짝이며 뭐라도 말을 걸어보려는 소녀들.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지 우물쭈물하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저기..!”
“응?”
“아, 아니에요!”
가끔 말을 거는 소녀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했는지 금방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꺄악! 꺄악! 거리며 떠들고 있다.
하도 저쪽에서 안 오기에 내가 다가가서 나한테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예인을 본 소녀팬마냥 꺄악거리며 도망치더니 귀퉁이에서 고개만 내밀고 살펴보는 둥 영문 모를 행동만 계속됐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하란 말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부담스러워서 사망! 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거꾸로 뒤집어져 눈에는 X자가 그려져 있는 개복치가 되어 버릴 거야.
저 애들, 분명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을 텐데. 어떻게 하면 말하게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멀리서만 지켜보는 소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해가며 생각했다. 이내 나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서로의 견제든 부끄러움을 타는 거든 말을 못 하는 거라면 말하게 해 줄 명분을 만들어 주면 되는 거잖아.
그것은 바로 내게 원하는 게 있는 듯한 소녀를 전부 대상으로 하는 소원내기. 나한테 원하는 게 있지만 왜인지 말을 못 하는 소녀들에게 내가 직접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내 뇌는 빠르게 회전을 시작하며 내기의 룰과 장소, 시간과 보상 등 아이디어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충 정리를 마친 나는 제일 중요한 귀족 소녀를 한 곳에 모을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첫 번째. 내가 직접 간다. 당연하지만 이건 안 된다. 내가 다가가기만 해도 대부분의 귀족소녀들이 피하니까. 애초에 내가 직접 말하는 게 됐으면 번거롭게 이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잖아. 총괄 선생의 힘을 쓰면 간단하겠지만 그러려면 한 명 한 명 찾아다녀야 하잖아.
메이드들도 안 된다. 청소니 뭐니 지금 한 창 바쁠 시간이니까.
바쁘지도 않고 귀족소녀들이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때, 모퉁이에서 돌아 나오는 루아를 발견했다.
찾았다. 바쁘지도 않고 귀족 소녀들이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 귀족 위의 귀족. 왕성 귀족 가문인 루아의 말이라면 다른 소녀들도 들어 줄 것이다.
“루아!”
내가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나인 걸 확인하자 왜인지 한숨을 내쉰 그녀였다.
“저, 저 찾으셨어요..?”
“아니, 아니. 찾은 건 아니고, 도움이 필요했는데 마침 네가 지나가서.”
“도움이요..?”
“응. 너밖에 못 하는 거야.”
지금은 당장은 말이지.
“뭐, 뭔데요?”
나는 루아의 어깨에 턱. 양손을 올렸다. 루아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루아는 당황한 듯 나를 올려다봤지만 내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애들 좀 모아주라.”
* * *
대강당의 안, 내가 단상에 올라가자 200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뭔가 익숙한 장면인데 이거.
그래,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도 이런 광경이었지.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그때와는 달리 반짝이는 눈으로 선망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려나.
그나저나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은 다 대강당으로 모이게 해 달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진짜로 다 온 거야..?”
물론 다 오라고 한 건 나였다. 하지만 나는 한 몇십 명 쯤 모일 줄 알았지, 설마 100명 전부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왜 저 녀석들까지 여기 있는 거야?
나는 귀족 소녀의 인파 속 중간, 다른 소녀들보다 현저히 눈에 띄는 왕성 귀족 4가문에 속해 있는 5명의 소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애들이 끼면 밸런스 파괴란 말이야.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세레나는 내게서 더 배우고 싶은 게 있다고 쳐. 라네즈는 재밌어 보여서 참여한 것 같고. 라헨느는 언니가 가자고 해서 이끌려 온 거겠지. 루아도... 그럴 수 있어.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레이는 왜..?
아무리 생각해도 레이가 왜 이 게임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게임인 걸 모르고 온 건가? 그렇다고 해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은 녀석은 아닌데.
물론 그녀를 본 건 얼마 안 됐지만 내가 보는 레이는 이런 시시한 내기에 참여할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저 녀석은 훈련이니 뭐니 해서 빠질 거로 생각 했는데.
이제라도 핸디캡은 없앨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한 여성 분도 100명과 싸운 전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나라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그녀들’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내 실수니까.
“자, 자. 조용.”
원래부터 조용하긴 했지만, 이런 건 한번 말해주는 게 국룰이지.
“루아한테 들었지? 나한테 원하는 게 있는 사람은 다 모여 달라고. 너희들이 왜인지 서로 눈치 보느라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도 말을 안 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먼저 답답해 터질 것 같아.”
나는 못 이기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소심한 너희를 위해 내가 한 가지 준비해 왔다. ‘너희들 전부 대 나’로 술래잡기. 제한 시간 안에 나를 잡으면 승리인 걸로. 너희들이 이길 경우엔 내가 너희 전부에게 딱 한 번 너희들이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소원권을 줄게. 물론 소원은 내가 들어 보고 가능한지 여부를 결정할 거지만.”
겸사겸사 나도 요즘 너무 나태하게 지내느라 굳어 버린 몸도 풀 겸 말이지.
웅성웅성. 소녀들 사이에서 잡음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너희들은 반박하겠지. 다크 나이트조차 한 방에 쓰러뜨린 나를 자신들이 어떻게 이기냐고.”
끄덕끄덕. 몇 명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너희에게 유리하도록 나한테 제약을 걸게. 나는 이 술래잡기가 끝날 때까지 소환 마법, 합일, 그리고 어제 너희들이 봤던 그 제복의 모습을 사용하지 않기로.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한 핸디캡이지?”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소녀의 반응을 살폈다. 저 정도면 할 만 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다들 동의한 거지? 그러면 룰을 설명할 건데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나는 그녀들에게 아까 생각한 것들을 말해주었다.
첫째, 제한 시각은 30분. 무대는 5층까지 있는 기숙사 건물 전체.
둘째, 그녀들의 승리 조건은 제한 시간 안에 내 손을 잡는 것. 손목은 인정 안됨. 패배 조건은 제한 시간 안에 나를 못 잡았을 경우.
셋째, 뒷정리를 하느라 고생했으니 다시 부서지지 않게 마법은 통신 마법외에는 금지.
“질문 있나?”
“질문이요!”
세레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뭔데?”
“손을 잡으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얼마 동안 잡고 있어야 하나요?”
“아, 맞다. 그걸 까먹고 있었네.”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노란색의 솜털들이 날아가 강당에 있던 소녀의 양손에 닿더니 눈이 녹는 것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이건..?”
“오래 잡고 있을 필요 없어. 너희들 중 누구라도 내 손을 잡으면 잡자마자 너희들 모두에게 게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가 갈 거니까.”
이게 무지개 정령의 힘인 건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자, 이제 더 없지? 그러면... 시작!”
내가 신호하자 미리 짜 놨던 대로 내 옆에 서 있던 리엘씨가 손가락을 튕겼다.
번쩍! 섬광탄이 터지듯 강당에 밝은 빛이 번쩍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