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100대 1.(2)
* * *
번쩍! 섬광탄이 터지듯 강당에 밝은 빛이 번쩍였다.
“꺄악?!”
“뭐, 뭔가요?!”
갑작스러운 빛에 대비하지 못한 소녀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참고로 내가 이겼을 경우에 너희들은 한 달 동안 메이드복으로만 생활해야 한다~!”
“네?!”
“뭐라고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그러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먼저 물어 봤어야지! 난 먼저 간다~!”
“치사해요!”
소녀의 원성을 뒤로하고, 현성은 강당의 문을 넘어 사라졌다.
“빨리 쫓아야 돼요!”
“하지만 앞이 안 보여요!”
우왕좌왕. 마음만 앞선 소녀들은 여기저기 부딪치기 일쑤였다.
“모두, 진정해.”
그런 그녀들을 진정시킨 것은 레이의 목소리였다.
“레이님?”
“너희들처럼 우왕좌왕 하는 게 선생님이 노린 거야. 금방 시력이 돌아오니 조금만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
레이의 말에 방금까지 우왕좌왕하던 소녀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하며 강당의 안은 순식간에 진정을 되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소녀의 눈이 뜨였다. 그녀들의 시선은 어느새 단상에 올라가 있는 레이에게로 향했다.
“무턱대고 움직여 봤자 금방 지칠 거야. 그러니...”
레이는 다른 소녀들에게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 * *
“그렇게 시작된 거고, 그래서 제가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죠. 시간이 되면 알리기 위해.”
현성의 부탁으로 시간을 재고 있는 메이드가 상황을 궁금해하는 다른 메이드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런가요. 그런데 시각은 어떻게 재고 계시는 건가요?”
“이걸로요.”
그녀는 손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노란빛의 입자들이 숫자가 되어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무슨 정령의 힘이라고 하셨는데, 잘 모르겠네요. 이게 1분이 지날 때마다 외쳐달라고 하셨어요.”
“신기하네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줄어가는 숫자를 보고 있던 그녀는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저는 가 봐야겠네요. 맡은 일이 있어서.”
“이따가 다과회 시간에 늦으시면 안 돼요!”
꾸벅. 인사를 한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그녀가 도착한 곳은 레이 드 르니아. 라고 방문에 적혀 있는 곳이었다. 레이의 방에 들어간 그녀는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의 안에는 작은 빛을 내뿜고 있는 하얀 색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햇빛을 받아야 된다고 하셨으니...”
그녀의 눈에 햇빛이 바로 들어오는 창틀 밑, 램프가 놓아져 있는 원형 테이블이 들어왔다.
“저기다 놓아두면 되겠네요.”
그렇게 원형 테이블의 근처, 침대까지 온 그녀는.
“잘 보이게 여기다.. 꺄악?!”
무언가를 보고는 놀라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의 정체는 겨우 루아를 따돌리고 다른 소녀의 눈을 피해 방 안에 숨어들었던 현성이었다.
“왜, 왜 여기에 계세요..?”
“잠시 숨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달리다 보니 체력이 딸려서 말이죠. 하지만 비명이 들렸으니 곧 몰려오겠네요.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현성은 다른 소녀들이 오기 전에 재빨리 방을 나갔다.
한 차례 작은 폭풍이 지나간 후, 방 안에 남은 그녀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다시 유리병을 원형 테이블에 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무언가 허전한 느낌. 그녀는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아까 현성에 의해 놀랐을 때 떨어진 건지 유리병이 사라져 있었다.
침대 밑을 포함해 유리병이 떨어졌을 만한 곳을 전부 찾아봤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빛을 내뿜고 있어 햇빛만이 조명인 어두운 방 안에서 안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서, 설마.”
열려 있는 창문으로는 매정하게도 따사로운 햇빛만이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 * *
“거, 거기 서세요!”
메이드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방을 나왔지만 바로 근처에 있었는지 루아와 소녀들이 추격해 왔다.
하지만 괜찮다. 곧 계단이 나올뿐 더러 지금까지의 루아는 내 속도를 이기지 못했으니까.
“서라면 설 것 같아?”
파바바밧. 잡으려는 루아의 손과 잡히지 않으려는 내 손이 격돌했다.
갑자기 느려진 루아의 속도. 지친 것으로 보였다. 이내 계단도 눈에 들어왔다.
좋았어. 계단이다. 지금 느려진 루아의 속도라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어. 한 번만 따돌리고 근처의 방에 들어가서 잠깐 쉬어야겠다.
“얼마 안 남았다 루아야~ 네 메이드복, 기대하고 있을게!”
놀리려고 한 말인데,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달려오던 루아는 트윈 테일을 묶은 끈을 풀었다. 사르륵. 양 갈래로 올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생머리가 되었다.
저것도 괜찮은데? 그런데 왜 갑자기 머리를 풀은 거지?
그에 대한 대답은 루아가 대신해 주었다.
“꺄하하~! 술래잡기다 술래잡기!”
정확히는 루아이자 루아가 아닌 사람이었다.
180도 바뀐 루아의 분위기. 처음 이곳에 와서 그녀들과 대련했을 때 봤던 ‘또 다른 루아’임이 틀림없었다.
“너무하잖아!”
조기축구의 시합에 메시가 왔어!
파바밧!
다시 루아의 손과 내 손이 격돌했다. 하지만 아까의 루아와는 달리 이번엔 하나하나 쳐 내는 것도 버거웠다.
그렇게 한 차례의 공방이 끝난 뒤,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루아는 기쁘다는 듯 활짝 웃으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역시 오빠야! 분명 지친 게 보이는데 쌩쌩한 나랑 공방을 펼칠 수 있다니!”
“너까지 부를 정도로 메이드 복이 부끄러운 거였어? 수영복으로 할걸 그랬나?”
수영복도 꽤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저 몸의 중간에 달려 있는 튼실한 과실이 특히나 부각될 것 같아.
“수영복은 더 부끄럽다는데?”
또 다른 루아... 귀찮으니까 그냥 루아라 하자. 나중에 제대로 이름을 붙여주던가 해야지.
“어쨌든,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루아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달리는 데 방해된다는 듯 머리를 묶어 올렸다.
“제대로 놀아보자고~”
...좆 됐네.
* * *
“헉... 헉...”
겨우 또 다른 루아를 따돌리고 2층으로 내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같은 층을 뱅뱅 돌았다. 곧 이 근처로 날아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소녀들은 체력이 없어 그로기 상태다. 여기저기 뻗어 있는 소녀를 메이드들이 각자의 방으로 옮겨 놓는 것을 봤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나를 쫓고 있는 건 루아와 레이, 그리고 몇 명의 소녀들뿐. 이대로만 도망다니며 버틴다면 내 승리가 확정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먹고 자기만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다. 게다가 상대는 한창 크는 소녀들. 체력전으로 가면 내가 불리할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체력전을 선택해 같은 층을 빙글빙글 돌아다닌 이유. 나를 쫓는 소녀를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였다.
곧 올 순간을 위해서.
아직인가?
슬슬 이 근처를 지날 때가 됐지만 왜인지 들리지 않는 날갯짓 소리에 초조해졌다.
“저기 계셔요!”
“쳇!”
반대편에서 오는 세레나와 소녀를 본 나는 다시 한번 층을 한 바퀴 돌기 위해 달리려는 자세를 잡았다.
“이런.”
반대편에서도 소녀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한 층을 계속 돌아다니시는 것을 보면 체력이 떨어지신 것 같은데, 이제 포기하시는 게 어때요?”
세레나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남은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는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이끌던 것으로 보이는 조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충 눈대중으로 10명 정도인 것으로 보였다. 반대편에도 비슷한 숫자의 소녀들이 있었다.
“모든 통로는 저희가 봉쇄했어요. 이제 도망칠 곳은 없으실 텐데요?”
“전부 모인 건가?”
“네, 다른 분들은 선생님께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을 쫓아다니다가 지쳐서 쉬고 계세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을 전부 데리고 온 거랍니다.”
지금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배관공마냥 저 애들의 머리를 발판삼아 뛰면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아득바득 이겼다치자. 그런데 그다음에는? 목숨이 걸린 싸움도 아니고 고작 애들을 상대로 그런 짓했다가는 총괄 선생으로서의 위엄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포기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펄럭. 날개 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스 타이밍!
나는 재빨리 창틀을 밟고 열려 있는 창문의 밖으로 몸을 던지며.
“엘린!!”
순찰을 위해 근처로 날아온 이 구역 순찰 담당, 엘린을 불렀다.
“마스터?!”
발키리 자매 중 막내, 엘린이 2층에서 몸을 던진 나를 보더니 쏜살같이 날아왔다.
“받쳐!”
내 의도를 눈치챈 듯 엘린은 재빨리 배구선수가 공을 받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엘린의 손을 받침대 삼아 점프했다. 목표는 3층의 열려 있는 창문. 요즘 몸이 굳어서 제대로 될까 싶었다. 다행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창틀에 착지할 수 있었다.
창틀에 기대 밑을 내려다 보면서 나를 세레나를 놀려주었다.
“하하하! 걸려들었구나 세레나! 이것이 내 도주경로다!”
“잠깐만요! 반칙 아닌가요?!”
창문 너머로 얼굴을 내민 세레나가 올려다보며 항의했다.
“그러게 룰은 잘 숙지했어야지. 소환 마법이 금지지 이미 소환된 애들을 이용하는 건 금지가 아니잖아? 우리 엘린은 이 시간에 이곳을 순찰한다고!”
“치, 치사해요..!”
뭐라 뭐라 항의하는 세레나를 뒤로하고 나는 승리를 확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은 시각은 30초 남짓. 지금 2층에 있을 소녀들이 출발한다고 해도 여긴 계단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이 거리는 레이가 출발한다고 해도 절대 시간 안에 올 수 없을 것이다.
“마스터! 괜찮으세요?”
엘린이 황급히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다. 내 지시대로 따르기는 했지만 사전에 말도 없이 위험한 행동해서 놀란 것 같았다.
“정말... 다음부터는 미리 말해 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보답으로 엘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엘린은 내게 신신당부한 뒤에 다시 창문을 넘어 날아갔다.
남은 시간 초를 크게 외치고 있는 메이드를 보며,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움직인 영향인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만약 지금 그 상황이 오면 지금 상태의 나로는 99퍼센트 졌다고 생각했다.
“찾았다!!”
모퉁이의 끝에서 나를 발견한 루아가 쏜살같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분위기와 말투로 보니 아까 곤혹을 치르게 했던 ‘또 다른 루아’가 틀림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 말은 안 들어맞은 적이 없어.
“10초 남았습니다!”
평소의 루아였어도 그녀와 나의 거리는 10초면 충분했다. 더 강해진 지금이라면 10초는커녕 5초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1초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달리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였는지 스텝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다시 재빨리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잡았다~”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루아의 목소리. 손이라도 방어하고자 몸을 틀자 활짝 웃고 있는 루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도망치기에는 늦었다는 소리였다.
“승리는~ 내꺼~!”
나를 덮치듯 달려드는 루아와 그 덕에 흔들리는 커다란 수박들을 보며,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