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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37화 (37/146)

〈 37화 〉 소원 들어주기.(1)

* * *

“선생님! 이거 드셔보세요!”

와삭와삭.

“맛있네.”

쪼르륵.

“선생님, 최고급 홍차랍니다.”

후루룹.

“써.”

“쓰세요? 그러면 이 초콜릿을...”

오도독.

“맛있네.”

“다행이네요! 이것도 입맛에 안 맞으시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는 은근히 어린아이 입맛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하 호호. 꽃향기가 휘날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방 안.

나는 소녀들이 주는 홍차와 케이크와 초콜릿과 과자를 먹으며 그녀들과 대화를 하거나,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 다과회라고 불리는, 귀족들이 차와 케이크, 과자등을 늘여놓고 하하 호호떠드는 모임이다.

하지만 보통 귀족들의 다과회랑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그나저나 메이드복이란 거, 뭔가 신기한 느낌이네요.”

“그, 그러게요. 저희들이 평소에 입는 옷하고는 전혀 다른 재질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런 느낌이에요.”

나를 제외한 다른 귀족소녀의 옷차림이 메이드복이란 것이었다.

처음 입어보는 듯한 메이드복에 그녀들은 어색한 듯 이리저리 옷을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역시 귀족들을 모시는 메이드들의 메이드복이다. 귀족의 딸들에게 입혀놔도 그 값을 톡톡히 잘한다.

게다가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가끔가다 새어 나오는 저 부끄러워하는 표정들. 정말로 최고다.

어제 했었던 내기가 아니었다면 저 애들의 메이드복 차림은 평생 못 봤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내기가 아니었다면 이 꽃향기 가득한 수다회에 참가하지도 않았을 거고.

나는 그녀들이 뭐라 뭐라 떠드는 것을 대충 흘려들으며 홍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느끼며, 나는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 * *

내 패배다.

다가오는 패배에 나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웁?!”

내 얼굴은 커다란 과실에 파묻혔다. 한순간에 시야가 어두워진다.

다음으로 느껴진 것은 머리를 감싸는 피부의 감촉이었다. 빙 둘러진 느낌으로 보아 팔로 머리를 감싼 것 같았다.

삐­!!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알림음이 기숙사 건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아, 끝났나 보네.”

하지만 경기가 끝났음에도 그녀는 떨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어디 가서 쉽게 경험할 수 없는 부드러운 감촉에 천천히 느끼며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슬슬 숨이 막혀왔다.

탁탁탁.

나는 숨이 막힌다는 신호로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응?”

내가 왜 그러는 지 모르겠다는 듯한 루아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어지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왜, 그래? 아, 이 상태면 숨을 못 쉬겠구나.”

그 말과 함께 내 몸은 거대한 풍선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헉... 헉... 헉...”

나는 산소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껏 들이마셨다. 가슴은 얼굴에서 떨어졌지만 여전히 내 머리를 두 팔로 감싸 안은 채였다.

얼굴에서 떨어진 거라고는 믿지 못하게 바로 내 눈앞에 있었지만.

“응~? 왜? 술래잡기 아니었어? 술래잡기는 몸만 터치해도 끝나는 거잖아?”

누군가와 얘기를 하는 루아. 아마도 대상은 인격체인지를 한 평소의 루아인 것 같았다.

“손? 껴안는 게 아니라 손을 잡아야 되는 거라고? 미리 말하지~”

아쉽다는 듯 내 손을 잡아 손깍지까지 끼는 루아. 하지만 게임이 끝난 직후 무지개 정령의 마력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 내 손을 잡아도 반응하지 않았다.

“자, 잠깐! 그렇게 억지로 정신을 장악하려 하지 마! 다친다고! 아, 알았어! 내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니까! 메이드복은 내가 나온 상태로 입으면 되잖아!”

정신세계에서 루아가 난리를 치는지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을 호소하는 루아.

“아, 알았어! 내가 나온다고 해도 네 몸이라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 거 알겠다니까! 그러니까 그만 흔들어..! 협상해볼게!”

저쪽의 대화가 끝났는지 루아가 머리를 휙휙 돌렸다. 평소의 루아가 잠잠해진 것 같았다.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왜.”

루아는 멋쩍은 듯 헤헤 웃으며.

“손잡는 게 룰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긴 건데, 무승부로 하면 안 될까?”

그렇게 돼서 생각 끝에 무승부로 정해졌다. 룰에 따르면 그녀들의 패배가 맞았다. 하지만 게임의 막바지에 참가한 또 다른 루아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면 내 패배가 확실했기 때문에 나중에 생색도 낼 겸 무승부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숨 막혀 죽을 뻔했지만 어디 가서 쉽게 못 느끼는 감촉을 느끼게 해준 보답이기도 했다.

나는 귀족 소녀들에게 무승부가 나왔으니 무효로 할지, 아니면 서로 내건 것을 들어 줄지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둘 다. 자기들 전부가 메이드복을 입을 테니 각자 소원권 1개씩을 얻겠다는 뜻이었다.

모두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평소의 루아로 돌아온 루아만이 울상을 지을 뿐이었다.

* * *

어디 보자, 다음은...

다과회가 끝나고, 방을 나온 나는 소원의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펼쳤다. 마치 졸업식날 반에 돌리는 커다란 종이 같이 생겼다. 뭐 이렇게 적을 것들이 많은지 원.

[정원을 같이 산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루아.]

무난하고.

[인형 놀이! 라네즈.]

[소꿉놀이. 라헨느.]

라네즈랑 라헨느의 것은 리리에랑 놀아준 다음에 가면 될 것 같고. 어차피 같이 있을 테니까. 다음은...

[새로운 마법. 진귀한 마법. 화려한 마법. 마법마법마법마법마법마법마법...]

무서워! 왠지 종이가 길다 했더니 3분의1이상을 차지했잖아!

이건 누가 썼는지 이름을 안 봐도 알 것 같다. 고대룡의 마법까지 배웠으면서 욕심이 많은 건지, 학구열이 강한 건지. 괘씸하니 우선순위를 맨 뒤로 미루도록 하자.

그 밑으로 다른 소녀들이 소원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미 들어 준 소원들은 작대기로 지우고, 지금 시간에 할 수 있는 무난한 것을 찾아보았다.

이게 제일 낫겠네.

내가 고른 것은 루아가 적은 같이 정원을 산책해 달라는 소원이었다. 다과회에서 배터지게 먹었으니 걸으면서 소화라도 시킬 생각이었다.

때마침 방금까지 다과회했던 소녀들과 같은 층의 방이기도 했고.

그렇게 루아의 방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죄송합... 실수로 떨어뜨려...”

“괜찮... 실수라면 어쩔 수...”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에 나는 우뚝, 모퉁이를 돌려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왠지 모르게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만 살짝 내밀어 보니 실수라도 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메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대화를 하는 사람이 누군가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 심각한 얼굴의 레이가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 지 아버님께 들었어?”

“네, 네! 아이테르님께 여쭤본 결과, 일주일은 있어야 된다고...”

“일주일...”

레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심각한 얼굴인 것으로 보아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다른 마력 억제제라도 구해 봐야 할까요?”

“안 돼. 너도 알잖아. 보통의 억제제로는 억제할 수 없다는 거.”

마력 억제제? 그걸 왜?

마력 억제제란 말 그대로 마력을 억제하는 약이다. 보통 전투에서 상대를 마력을 억제시켜 상대를 약화시키는데 쓰인다. 또는 마력 감기라는 병을 치료할 때도 쓰인다.

마력 감기란, 마력을 막 각성한 아이들이나 다른 자에게서 마력을 받은 자들 중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병이다. 내가 있던 곳의 감기와 마찬가지로 몸에서 열이 나는데, 그 이유가 몸이 마력에 적응하지 못해서이다.

그렇기에 마력 억제제를 써서 몸이 마력에 서서히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레이 같은 강한 녀석이 마력 억제제를 쓸 데가 있나? 마력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알고 있어요.알고 있는데...”

“일단 방법을 찾아볼게. 정 안 되면... 선생님께라도 부탁드리는 수밖에.”

나? 뭔 방법을 써야 되는데 마력 억제제에 나까지 나와?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으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몰래 그렇고 그런 영상을 보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연보랏빛 머리의 소녀, 세레나가 뭐 하고 있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저기에 뭐가 있나요?”

“자, 잠깐!”

나는 재빨리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의 입을 막았다. 세레나의 눈이 당황한 듯 커졌지만 이내 무슨 짓이냐는 듯 화내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집게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선생님?”

“아...”

그렇게 큰 소리를 내놓고 안 들키기를 바라는 건 양심이 없는 거였나보다. 어느 샌가 모퉁이에서 돌아나온 레이가 나와 세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건가요.”

나는 세레나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으로 윙크를 여러 번 했다. 세레나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말을 맞춰달라는 뜻임을 알아챘다는 듯.

“아, 언니! 선생님께서는 저와 약속이 있어서 여기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여기서?”

“네! 제 방이 여기 근처잖아요.”

“입을 막고 있던 건?”

“미안, 그건 내 버릇이야.”

“버릇?”

“내가 과거에 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서 가끔 예민함이 행동으로 드러날 때가 있거든. 너희들 소원을 들어 주다 보니 힘들어서 세레나를 기다리다가 졸았는데, 얘가 장난삼아 나를 놀라게 하려고 하다 보니 몸이 자동 반사적으로 반응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휴... 잘 둘러댔다, 나.

전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실제로 몸이 살기에 반응해 멋대로 움직일 때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게 잘한 거라는 건 아니지만.

“...”

“그런데 언니야말로 무슨 일 있으세요? 이런 작은 소란에 직접 나오시고.”

나이스 바통터치. 잘 둘러대면서 역으로 질문을 해 화제를 돌려 원래의 화제를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전법. 아주 좋아.

레이는 거짓말인지 판단하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에게 무언의 심문을 하다가.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 일 없었으면 됐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혹시나 숨어 있을까 싶어 모퉁이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봤다. 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긴장해서 참고 있었던 숨을 내뱉었다.

“휴, 한시름 놓았네.”

“제가 도움을 드렸으니까, 제 소원은 맨 위로 올려주시는 거죠?”

얘는 가장 친하게 지내는 언니한테 거짓말하면서 떨리지도 않았던 건가. 바로 이득 챙길 생각부터 하는 걸 보면 싹수가 노란 것 같다.

“넌 안 떨리냐?”

“왜 안 떨려요?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세레나는 자기 다리를 가리켰다. 덜덜 떨리고 있는 다리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제 소원 우선순위는 일등이 되는 거죠?”

“20등.”

“네? 저는 제일 친한 언니를 속인 건데요? 10등!”

“15등.”

“알겠어요. 12등!”

“...오케이.”

세레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숨어계셨던 거예요?”

“뭔가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은 느낌이라서.”

“쓰리 사이즈 같은 거요?”

“비슷한 거야.”

“참고로 제 쓰리 사이즈는요...”

“안 궁금해.”

루아라는 과실도 여의치 않게 맛본 나인데 그보다 못한 과실에 관심이 가겠나.

“어차피 말해 달라고 해도 안 말해 줬어요!”

세레나는 흥! 하며 고개를 돌려 떠나갔다.

못 말리겠네, 정말.

고개를 저으며, 나는 루아의 방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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