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축제 준비.(4)
* * *
만월제가 다가옴에 따라 학교에는 들뜬 분위기가 계속됐다.
“저는 사격을 제일 먼저 해보고 싶어요!”
“사격보다는 음식을 먼저 먹는 게 어때요?”
“그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네요!”
꺄르르. 꺄르르. 소녀의 기대에 찬 재잘거림.
“만월제 날이면 우리도 쉴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바쁜 거잖아.”
“거기 두 분. 가만히 있지 말고 여기 좀 도와주시길.”
“네~”
“네...”
메이드들의 분주한 움직임도 계속됐으며.
“어이~ 그건 우리 가게 물품이야! 여기다 두면 돼!”
가게에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 축제의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의 어디를 가도 밝은 분위기였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내가 그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지만.
“어제는 서류에 가게 확인 작업... 오늘은 시설 점검... 힘들다, 힘들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힘내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아스모 씨의 응원에 힘이 조금 나는 기분이었다.
만월제가 시작되기 전에 혹시나 있을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시설들을 점검하고 다니는 일. 그게 지금 내가 아스모 씨와 함께하는 일이었다.
물론 아스모 씨는 내 옆에서 보조만 해 줄 뿐, 대부분의 작업은 내가 다 한다. 어딘가 균열이라도 가 있으면 합일로 소환수의 마력을 빌려서 보수를 해 놓는다던가.
이 일 지옥에서 그나마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이 축제가 끝나면 당분간은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믿음과 베르도 씨의 가게에 있는 만월제의 밤에 즐길 수 있는 꼬치구이와 흑맥주. 두 개 뿐이었다.
만월제가 끝나기만 해 봐라. 총괄 선생의 일이고 자시고 일주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할 거니까. 국왕 급 사람이 부르는 게 아니면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다음은 어디죠?”
내 전속 메이드로 이 학교에 오게 된 아스모 씨가 팔락. 종이 뭉치를 넘겼다.
“이 루트대로라면 다음은 투기장과 연무장입니다.”
제법 문제가 많을 법한 시설들이었다.
투기장은 내가 이곳에 처음 와 왕성 귀족의 딸들하고 대결했을 때 한 번. 세레나가 마법을 알려달라고 찾아왔을 때 대신할 선생을 소개해 준 뒤에 늘어난 실력을 확인해보고자 내 소환수인 얼음 여왕 ‘글라시아’와의 대련으로 한 번. 도합 두 번의 큰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가 복구마법의 힘이 있어도 이상이 없는지 확인은 필수일 것 같았다.
연무장도 마찬가지였다. 여리여리한 귀족 소녀들만이 모인 곳에서 실습도 없는데 누가 마법 연습을 자진해서 하겠는가. 하지만 있었다. 그것도 2명이나.
연무장을 빌리겠다고 오는 애들의 얼굴이 바뀌거나 늘어나질 않아서 그냥 그 둘한테 아무 때나 마음대로 쓰라고 영구 허가를 내려 줬다. 아마 그날부터 자기들 마음대로 펑펑 쓰고 있을 것이다.
“어디부터 가시나요?”
나는 지금까지 온 루트와 앞으로의 루트를 겹쳐 효율적인 루트를 생각했다. 루트대로 라면 투기장으로 가는 게 맞았다. 연무장으로 갔다가 투기장으로 가는 것은 동선 낭비가 심했다.
“연무장으로 가시죠. 투기장은...”
하지만 나는 연무장으로 가기로 했다.
“밤에 써야 되니까요.”
* * *
부웅!
목표로 보이는 흑발의 소녀를 맞추고자 붉은 갑옷이 팔을 휘둘렀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나무로 만든 대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녀도 가만히 맞아줄 생각은 없다는 듯 허리를 뒤로 젖혔다.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도록 묶은 것 같은 말총머리가 땅바닥에 닿았다. 대검이 공기를 가르며 그녀의 바로 위를 지나갔다.
원래대로라면 저 자리에는 나무로 만든 연습용 허수아비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허수아비 대신 좀 더 실전성 있는 것을 배치해 줬으면 좋겠다는 레이의 말에 나는 알트에게서 뺏어. 아니, 정당한 대가를 주고 데려온 붉은 갑옷들을 배치시켜 준 것이다.
어차피 쓸 데가 없었거든. 소환수로 쓰기엔 이미 데리고 있는 강한 녀석들이 많았고, 합일은 더더욱 필요가 없었으며 소환수의 부하로 쓰게 하려고 해도 전부 다 필요 없다며 거절했으니까.
물론 위험하지 않게 갑옷들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는 나무재질로 바꾼 상태였다.
그런데도 위협적인 것 사실이었다. 무기만 나무지 그 외의 것들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휘두를 때마다 부웅부웅 거리며 바람을 가르는지라 잘못 맞으면 뼈가 부러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갑옷을 상대하는 건 이 학교에 단 2명뿐인 ‘연무장 영구 출입허가’를 가지고 있는 흑발의 도도한 맏언니 같은 느낌의 소녀, 레이였다. 가벼운 훈련복 차림의 그녀는 내가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대도 허용하지 않고 착실히 유효타를 꽂아 넣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몇 번의 공격 더 있은 후, 처음에 설정해 둔 데미지가 초과된 듯 붉은 갑옷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겼다. 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승리였다. 하지만 레이는 어딘가 불만이라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4체의 갑옷을 깨워 상대하기 시작했다.
갑옷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방패, 양날검, 창, 흰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스태프였다.
상대 숫자에 맞추겠다는 듯 레이의 주위에 3개의 검들이 둥둥 떠다니며 마치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처럼 그녀의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화염이 휘감고 있어 붉은빛을 내뿜는 검. 바다와도 같은 푸른색의 물이 흘러내리며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검. 바람으로 감싸여 있어 그녀의 옷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검, 그리고 그냥 흰색의 검을 포함해 총 4자루의 검이었다.
먼저 공격을 개시한쪽은 갑옷 쪽이었다.
방패를 든 붉은 갑옷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양날검과 창을 든 갑옷은 방패의 뒤를 따라 돌진했다. 스태프를 든 갑옷은 스태프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마법을 영창 하는 듯 보였다. 스태프에 박혀 있는 보석이 붉게 빛나더니 하늘에 생긴 마법진에서 화염구가 레이를 향해 날아갔다.
돌진해 오는 방패를 오른쪽으로 구르며 피한 레이는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마치 지휘를 하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검들이 자아를 가진 듯 각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염의 검이 휘둘러지자 방패의 왼쪽에 있었던 양날검을 든 갑옷이 불꽃에 휩싸였다. 바람의 검은 다시 레이를 향해 돌진하는 방패를 든 갑옷을 휘감아 날려 버렸다.
위에서 날아오는 화염구는 날카로운 물이 반으로 베어 갈랐다.
도시 미드나에서도 봤지만 몇 번을 봐도 대단했다. 저 나잇대의 소녀에게서 나올 만한
이번에도 역시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박수라도 쳐줘야 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레이가 나와 아스모 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까지 보고 계실 건가요?”
“뭐야, 알고 있었냐?”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할 것이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려 했더니만.
아스모 씨는 레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이도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여전히 쌀쌀맞은 말투다. 진짜 말의 분위기만 보면 얼음여왕 글라시아가 더 따뜻해 보인다니까.
“만월제를 대비해서 설비 점검하러 나온 거야. 니 연습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는 연무장을 대충 눈으로 훑어봤다. 연무장 바닥에 무기가 내려찍은 듯한 자국들이 있는 것을 빼면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됐다. 이제...”
그때, 뒤에서 아스모 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님! 뒤에!”
뒤를 돌아보니 철커덕거리며 아까 레아가 부순 4체를 포함하여 10체의 붉은 갑옷들이 일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내 우리를 상대로 인식한 듯 붉은 갑옷들이 진형을 짜더니 공격을 개시했다.
레이가 재빨리 검을 생성시켜 대응하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마리 상대로 헉헉대는 녀석이 무슨. 지금은 나한테 맡겨.”
무기들과 마법들이 우리에게 향하는 것을 보며 나는 반지가 깨지지 않는 선에서 마력을 개방했다. 조금이지만 억누르고 있던 게 빠져나가는 느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다크 나이트를 상대할 때가 10이라면 지금은 1정도였지만 붉은 갑옷 10체 정도는 충분하다.
“검 좀 빌린다.”
“앗...”
나는 레이가 들고 있던 검중 흰색 빛을 내뿜고 있던 검을 뺏어와 거기에 마력을 담았다. 검의 도신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거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거겠지?
나는 검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검집은 없었지만, 검집이 있다는 이미지를 그렸다. 예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잘 해둔 탓인지, 금방 검집에 검이 꽂혀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아직...
지금!
나는 보이지 않는 검집에서 검을 뽑으며, 그대로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검은 빛이 번쩍임과 동시에 붉은 갑옷들은 산산조각이 나며 날아가 연무장의 벽 여기저기에 박혔다.
“후...”
나는 다시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려다가 원래부터 검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지를 너무 열심히 그렸네.
나는 검을 다시 레이에게 건네주었다. 검을 받아 든 레이의 몸이 잠시 움찔한 것처럼 보였지만 내 착각이라는 듯 레이는 검의 소환을 해제했다.
그나저나 역시 힘 조절은 어렵다니까. 자칫하면 연무장을 반으로 갈라버릴 뻔했잖아?
“저... 현성님..?”
아스모 씨가 마치 퇴근하려는데 잔업이 생겨 억지로 야근하게 된 직장인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내가 한 공격의 여파로 연무장의 벽에 연무장의 반을 빙 두르는 갈라진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툭. 투툭. 갈라진 틈 사이로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아...”
그제야 나는 내가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는 이곳에 왜 와 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