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44화 (44/146)

〈 44화 〉 레이.(2)

* * *

정신을 잃은 레이를 옮겨 온 곳은 회복실이 아닌 레이의 방이었다. 소녀의 방에 무단으로 들어와도 되나 싶지만 방의 주인이 기절해 있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레이가 정신을 잃기 전에 한 말인 ‘여기서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라는 말의 뜻을 말이 나온 앞뒤의 상황과 맞춰가며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니, ‘회복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런 상태를 알리고 싶지 않으니 연무장에서 가만히 있어 달라.’ 가 되었다.

물론 내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막연히 상태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렸다가 더 악화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안 듣고 회복실로 가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아서 결국 사람들의 눈을 피해 레이의 방으로 옮겨 온 거지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옮겨 온 건 좋은데, 이제 어쩌지?

내 소환수 중에 ‘병을 고친다.’가 가능한 녀석은 발키리 자매뿐이다. 하지만 죽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최상급 치유 마법인 큐어(CURE)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방으로 옮겨 오긴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는 건 똑같았다.

‘주인! 주인!’

그때, 머릿속에서 앨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스모 씨에게 잠시만요, 라고 말한 뒤에 통신마법을 듣는 사람처럼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왜?”

[저 애의 상태, 내가 좀 봐도 돼?]

“네가? 너 병도 볼 줄 알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저 애한테서 익숙한 냄새가 나서 그래.]

“익숙한 냄새?”

[응. 지금은 주인을 통해 감각적인 것만 느낄 수 있어서 익숙한 냄새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언제부터 앨리아와 내가 시야나 냄새를 공유할 수 있게 됐지? 난 수락한 적 없는 것 같은데.

[몰라? 그냥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 감각이 공유되면서 보이던데?]

생각도 읽을 수 있는 거야? 사생활 보호가 하나도 안 되잖아.

[걱정하지 마, 주인. 그럴 땐 분위기를 봐서 알아서 비켜 줄 테니까.]

그러면서 볼 거면서. 저 녀석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혹시 싫은 사람의 번호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처럼 차단할 수 있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사생활이 공유당하는 건 싫은데.

나는 감각이 공유되는 느낌이 뭔지 잘 몰라 그냥 전화를 끊을 때를 상상했다. 그러자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앨리아를 불러봤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오, 됐다.

그러면 다시 연결하려면 반대로 전화를 받는 감각으로...

딸칵. 다시 연결되는 느낌과 함께 앨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으악?!”

“현성님?!”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울리는 굉음에 나는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스모 씨가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다. 머리가 우웅­ 거리며 진동하는 느낌에 메스꺼움을 느낀 나는 그녀에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잠시 후, 겨우 말끔해진 정신과 똑같이 말끔해진 위장과 함께 돌아온 나는 앨리아를 소환하기 위해 손가락을 튕기려 했다.

나중에 두고 보자, 앨리아.

[잠깐, 잠깐! 괜찮아?]

앨리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손가락을 튕기려는 나를 막았다.

“뭐가?”

[속을 비워냈다고 정신도 비워낸 건 아니지? 저 메이드, 관계자가 아니잖아?]

아, 맞다. 지금 아스모 씨랑 같이 있었지.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단기 기억상실이라도 왔는지 아스모 씨가 내 뒤에 있다는 걸 까먹었었네. 하마터면 세상을 속이고 있는 비밀을 아는 자가 한 명 더 늘어날 뻔했네.

“저... 아스모 씨?”

“네.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그냥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하려던 말을 대신해 주었다.

이러면 어떻게 그녀를 티 안 나게 방에서 내 보내야 할지 고민했던 내가 부끄러워지잖아.

“...어떻게 아셨어요?”

아스모 씨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메이드하기 전엔 꽤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답니다. 제대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그러다 보니 사람의 얼굴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죠. 지금 현성님의 얼굴은 마치 아내 몰래 첩을 만나러 가야 되는데 아내가 계속 옆에 있어서 어떻게 아내를 보낼까 생각하는 남편의 얼굴이네요.”

“...”

비슷하긴... 하려나? 어쨌든 아내 몰래 첩을 만나는 거나 세상을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들키는 거나 들키면 큰일 나는 건 마찬가지니까. 내가 말고 아스모 씨가.

“1시간 정도면 되나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정원에서 거닐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주시길.”

아스모 씨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 다음 방문을 열고 나갔다.

못 당하겠네, 못 당하겠어. 리엘 씨도 그렇고, 요즘 메이드들은 다 저런 건가?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살짝 열었다. 곧 여기에 소환될 그녀를 보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하는 듯 아스모 씨는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복도의 끝,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졌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아스모 씨.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니 기분 나빠하지 말아 주시길!

들릴 리 없는 사과를 한 후,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번쩍! 방 안에 보랏빛이 번쩍였다. 빛과 함께 빅토리안 메이드의 옷차림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보랏빛의 긴 생머리. 수박이라고 칭할 수 있는 루아에게도 뒤지지 않는 탐스러운 과실만 보면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양 쪽 눈동자의 색이 검정과 보라로 다르다는 것과 머리의 양쪽에 나 있는 한 쌍의 뿔이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보랏빛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곧바로 레이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여전히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는 레이를

앨리아의 오른쪽 눈이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며 그녀의 눈보다 살짝 큰 마법진이 그녀의 눈앞에 생겨났다. 고대룡인 스카지나가 사용하는 용안(?)과 같은, 상태창을 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해 볼 수 있는 눈인 마안(??)이었다.

한참 동안 스캔하듯 레이의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던 앨리아의 눈에서 보랏빛이 꺼졌다. 레이의 몸 상태의 확인을 끝낸 것 같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야.”

“뭐가?”

“하지만 이게 가능한 거야?”

“그러니까 뭐가?”

“아니... 가능할지도... 주인도 해냈다고 들었는데 이 아이도 적응해가는 단계일 수도 있어... 증상만 보면 마력 감기랑 비슷하고...”

“...”

“억제는 가능하겠지만 원인을 모르는 이상 계속 이 상태가 계속 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일단 억제라도 시켜놔야겠어.”

내 물음에도 앨리아는 계속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뭔데?”

“주인이 끼고 있는 반지 좀 줘.”

“반지?

“몇 분 정도는 완전히 억누를 수 있잖아.”

“아니, 뭔지는 설명해 줘야...”

“빨리.”

손님을 맞이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의 앨리아.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홀린 듯 왼손 약지에서 발키리들의 마력을 집어넣어 내 마력을 억제하고 있던 반지를 빼서 앨리아에게 건네주었다.

반지를 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몸 안에서 억누르던 마력이 방출되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가만히 뒀다가는 마력이 방출되는 여파로 마력 폭풍이 몰아쳐 이 기숙사 건물의 한 층이 박살 날 것이다.

“흡!”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대로 숨을 멈췄다. 빠져나가려는 것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느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참을 수 없을지경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나는 마력의 폭풍을 살랑거리는 바람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후...”

더럽게 힘드네. 이래서 내가 마력을 완전히 개방하는 걸 못한다니까.

겨우겨우 마력을 억누른 나는 혹여나 다시 마력이 날뛸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 후, 억누르는 게 점점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자, 됐어. 저 애는 잠깐이지만 괜찮을 거야.”

앨리아가 내게 반지를 돌려주었다. 나는 재빨리 다시 반지를 왼손 약지에 꼈다. 날뛰려던 마력이 점점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것도 임시방편이라 새로 만들긴 해야 하는데.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원래대로라면 반지를 끼자마자 마력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왜인지 평소에 수용할 수 있는 양보다 적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아무리 봐도 반지가 정상적이지 않은 기분이었다.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기분이 아니었다. 실제로 반지는 반 정도 두께가 얇아져 있었다.

나는 이게 왜 이렇게 된 거냐는 듯한 얼굴로 앨리아를 바라봤다. 앨리아는 아무 말없이 레이의 왼손을 가리켰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다시 자세히 보니 레이의 왼손 약지에 나와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두 개로 나눠놨네. 그래서 내 마력을 억제하던 효력도 줄은 거고.

“반으로 나눠놓은 터라 효과도 반으로 줄었을 거야. 게다가 저 애의 마력은 더 강해지고 있어. 아마 버티는 것도 만월까지가 한계일 거야. 주인에게 돌려준 것도 마찬가지고.”

만월...이면 만월제가 끝나는 날이자 하이라이트인 날인가. 만월제가 끝나면 휴가 좀 갔다 오려 했더니만. 휴가를 교회로 가게 생겼군.

“그래서, 레이가 왜 저런 상태인지 말해 주지 그래?”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웬만한 마력 억제제보다 훨씬 강한 마력도 억제할 수 있는 발키리들의 마력이 담긴 반지까지 필요한 걸까.

“그건...”

그때, 띠디디디! 하고 어디선가 알람 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침대 옆 램프가 놓아져 있는 원형 테이블에 위에 있는마치 강낭콩처럼 생긴 물건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이건...”

난 강낭콩처럼 생긴 이것을 알고 있었다. 마도 공학제국의 천재 엔지니어가 만든, 통신 마법으로는 마력에 간섭을 해 도청을 당할 위험이 있어 마력을 등록시켜둔 사람들만이 서로에게 통신을 걸 수 있어 도청과 같은 위험이 없다는 통신 기계였다. 이름은 모양을 본 딴 ‘강낭콩’이었다.

그나저나 계속 울리는 게 거슬리는데. 저러면 앨리아와 얘기를 할 수가 없잖아.

받아서 상대를 확인하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었다. 마력을 등록시킨 사람들만이 걸고 받을 수 있었으니까.

끌 수도 없었다. 통신 마법을 건 쪽에서 끊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게다가 레이는 저런 상태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계속 울리게 두자니 얘기에 방해될 것 같아 어디 서랍에라도 넣으려 했다.

...잠깐.

그때, 내 뇌리에 한 가지 스치고 가는 게 있었다.

통신 마법은 거리에 따라 시간차는 있지만 걸고 받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상대는 통신 마법이 아닌 통신 기계를 통해 통신을 요청해 왔다.

마치 레이가 통신 마법을 못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저건 나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면 그냥 서랍에 집어 넣어버리면 되는 거니까 손해 볼 것도 없지.

나는 그것을 귀에 꽂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팟­하는 느낌과 함께.

[이 마력은... 현성인가?]

“역시나 당신이었군.”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강낭콩을 타고 내 귀에 들려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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