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레이.(3)
* * *
검은색의 강낭콩모양이자, 진짜로 이름이 ‘강낭콩’인 물건을 귀에 꽂으며 마력을 흘려보내자 익숙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마력은... 현성인가?]
“역시나 당신이었군.”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목소리.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레이의 아버지이자 왕성 귀족 4가문 중 하나인 르니아 가문의 가주, 아이테르 데 르니아였다.
[그나저나 자네가 왜 이걸 받은 건가? 강낭콩은 분명 레이에게 줬을 텐데.]
다 알면서 모르고 있는 척 하긴. 여전히 능구렁이 같은 남자라니까.
“통신 마법이 아니라 강낭콩으로 통신을 건 걸 보면 내가 받을 걸 알고 있던 거 아닙니까.”
[흠, 들킨 건가. 역시 같이 지낸 시각은 속일 수 없나 보구먼.]
“그다지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지만요."
내 가시 돋친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생각하는지 껄껄대며 웃는 아이테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죽고 싶은 거냐며 당장 예의를 차리라며 질타했을 장면이었다.
상대는 이 나라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사람 중 한 명이자 마왕 토벌단 백야 출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메이드나 집사들이 있는 그의 저택에서나 예의를 차려 줬지,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이곳에서까지 그에게 예의를 차릴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아이테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저렇게 껄껄대며 웃고만 있을 뿐이지.
껄껄대며 웃던 아이테르는 이내 목을 고르는 듯 흠흠 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여하튼, 자네 말이 맞네. 레이의 메이드에게 소식을 들었으니까. 아마 지금쯤 연락하면 자네가 레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네. 그래서 이 미약한 지식으로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연락을 취한 거네.]
“제 마력은 언제 등록해 두셨습니까.”
강낭콩은 마력이 등록된 자들끼리만 통신이 가능하게 해주는 장비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저 ‘강낭콩’에 내 마력을 담는 장면이 없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내 마력을 추출해서 나도 모르는 새에 등록시켜 놨을 것이 분명했다.
[그거야 자네와 처음 싸웠을 때 몰래 추출해 둬서 보관하고 있었지. 자네가 학교에 간다고 말한 그날 강낭콩에 저장시켜뒀네.]
그때부터였냐!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버틴 거야?! 거의 7년은 넘은 이야기잖아!
존버도 이 정도면 아사(?死)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 수준인데?!
[그래서, 질문은 없는가?]
무엇이든 물어보라며 내 질문을 기다리는 듯 말이 없는 아이테르.
이따금 무언가를 마시는 듯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무엇을 먼저 질문할까 싶어 침대 위의 레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가빴던 숨소리는 어느새 안정되어 있었고, 그 덕에 레이의 입에서는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덩이 같던 이마 또한 다시 짚어보니 미열 수준으로 내려가 있었다. 또다시 데일까 싶어 손끝으로 살짝만 만진 건 비밀이다.
앨리아는 여전히 침대 옆에서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레이..."
원래는 레이의 저 열이 나고 숨을 가쁘게 내쉬는 감기 같은 상태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발키리의 마력이 담긴 반지가 은은하게 하얀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앨리아에게 묻는 것만 생각하느라 제대로 안 보고 있었는데, 저 반지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은 억제하는 마력이 마(?)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저 반지는 평범한 마력을 억제하는 용도가 아니라 마(?)의 마력을 억제하는 용도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질문이 흘러나왔다.
“레이, 인간이 아니죠?”
이 질문부터 나올 줄 몰랐다는 듯, 강낭콩 너머로 호오. 하며 감탄하는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역시 신기한 사람이군. 나는 레이가 내 친딸인지 물어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레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가?]
“앨리아가 마안으로 봤거든요. 게다가 발키리의 마력으로 걸었던 큐어(CURE)도 안 먹혔고. 그리고 친딸이라면 방어 관련 클래스로 마력이 특화되어 있었을 텐데 ‘마검사’잖아요? 머리색도 금발인 당신네 가문과는 다르게 흑발이고.”
레이의 성격상 염색 같은걸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겐 그녀가 있었지? 이거, 내가 연락을 안 했어도 알아서 답을 찾았을 것 같군.]
아이테르가 말하는 그녀란 아마 내 옆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앨리아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후우...하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강낭콩 너머에서 들려왔다.
[인간은 맞네. 정확히 말하면 서큐버스와 인간의 혼혈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서큐버스 퀸과 내 친구였던 인간의 혼혈이지.]
“...서큐버스 퀸? 서큐버스 퀸이 인간하고 결혼을 해 아이까지 나았다고요..? 아니, 그보다 서큐버스 퀸이라는 게 진짜 있는 존재였습니까?”
서큐버스는 남자의 정기를 흡수해 살아가는, 종족은 마족이다.
서큐버스의 등급은 3가지로, 하급 마족급이자 제일 낮은 등급인 서큐버스. 상위 마족급인 ‘서큐버스 프린세스’. 최상위 마족 급인 ‘서큐버스 퀸’으로 나뉜다.
그리고 그건 남자 서큐버스라고 불리는 인큐버스도 마찬가진데, 최상급 마족 급인 인큐버스는 인큐버스 킹이 아닌 인큐버스 로드라고 부른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서큐버스 퀸은 최소 몇백의 남성의 정기를 흡수해야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존재가 한 인간 남성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나았다고 들으니 뭔가 아이러니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프린세스’급은 만나 봤어도 ‘퀸’이라니. 나도 찾다가 포기한 건데.
아이테르도 이해한다는 듯 내 놀람에 동조해주었다.
[나도 놀랐다네. 내가 아직 그냥 귀족일 시절에 친구가 아내라며 소개해 줬을 때 처음 봤으니까. 방어 계열 마법에 정통한 나조차도 버티기 힘들 정도의 달콤한 향기였다네. 참는 게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그날 밤 아내를...]
“...거기까지는 안 궁금합니다만.
큭큭거리며 작게 웃는 소리가 강낭콩을 타고 들려왔다. 하지만 이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그를 말렸다면...]
“예?”
[아닐세, 아무것도.]
아련한 듯한 목소리였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 초 후에 회상에서 돌아온 듯 크흠흠.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레이의 상태는 ‘마력 감기’와 비슷한 거라네. 너무나도 강대한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물려받은 나머지 인간의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거지. 저 상태가 지속되면 성욕에 미친 화신이 되거나, 몸이 터져 죽고 말겠지. 어느 쪽이든 레아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 테지.]
심각한 말을 담담하게 하는 아이테르에 소름이 돋았지만 그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되기까지 레이의 몸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 눈에 훤했다.
친딸은 아니지만 친딸처럼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와 만나오면서 느꼈으니까.
지금까지 레이가 그의 친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떻게 버틴 겁니까? 서큐버스 퀸 급의 마력을 억제할 수 있는 건 성녀 정도밖에 없을 텐데.”
[정답일세. 성녀님의 마력을 추출해 만든 마력 억제제와 몸을 움직여 마력을 사용함으로써 지금까지 버텨 온 걸세.]
본의 아니게 정답을 말해 버렸네. 퀴즈쇼였으면 야유를 엄청 들었겠어.
[하지만 메이드의 실수로 이번 달 분량의 억제제가 든 병이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더군. 이유를 말하라고 하니 진땀을 빼기에 듣지 않았지만. 혹시 자네는 이유를 아는가?]
“아뇨.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 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난날의 기억이 있었다. 시각은 1대100 술래잡기를 할 때. 장소는 지금, 이곳, 내가 루아의 추격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고자 숨어들었던 레이의 방.
내 시선은 내가 그때 숨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래, 정확히 저기다. 침대와 작은 원형 테이블의 사이.
거기에 숨어 있던 나를 보고 놀란 메이드가 있었다. 그때 분명 손에서 무언가를 놓치는 걸 봤어. 아주 작은 거여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나는 그녀의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들킨 것을 깨닫고 방을 급하게 나왔는데...
설마 그 작은 것이 지금 아이테르가 말하는 성녀의 마력을 추출해 만든 마력 억제제는 아니겠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삼키는 것을 잊어 입에 고인 침이 꿀꺽. 목을 넘어간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한테 잘못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현성?]
강낭콩을 타고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저 때문이네요.”
[자네 때문이라니?]
나는 아이테르에게 1대100 술래잡기를 하던 날에 있었던 사건을 말해주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아이테르는 작게 웃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자네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메이드가 미숙했던 거지. 리엘이었으면 무덤덤했을 거 아닌가.]
아이테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리엘 씨였으면 분명 무덤덤하게 ‘수고하시길.’ 이라면서 할 거 하고 나갔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게 책임이 0퍼센트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억제제 말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발키리의 마력이 담긴 반지로도 억제하는 게 고작이었다.
[당연히 있다네. ‘저 상태’를 완전히 끝내는 것도 가능하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하지. 하여간 제일 좋은 방법을 뜸 들이며 말하다가 놓치는 건 만국 공통이라니까. 미리 물어보길 잘했어.
“뭡니까? 그 방법이란 게?”
[그녀를 안는 걸세.]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