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46화 (46/146)

〈 46화 〉 레이.(4)

* * *

[그녀를 안는 걸세.]

“예?”

레이를 안는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나 묻는 겁니다만 안는다는 게 그냥 껴안는다는 뜻이 아니죠?”

당연하다는 듯 아이테르가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네. 성교.]

“...”

알고는 있었지만 입으로 직접 들으니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다.

[물론 이것도 위험한 방법일세. 서큐버스 퀸의 마력은 너무나도 강대해서 남자 한 명의 정기는 식사는커녕 간식도 안 될 테니까. 게다가 정기를 모두 흡수당한 남성은...]

“죽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퀸 미만 급의 프린세스나 일반 서큐버스들은 그런 짓했다간 토벌 대상에 올라가기 때문에 먹고 살 만큼만 가져가던가, 여러 명한테 조금씩 가져가잖아요.”

정기라고 말은 하지만 그 실상은 결국 마력이다.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에게 정기를 전부 빨린다는 건 흡혈귀한테 몸 안의 모든 피를 빨린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잘 알고 있군.]

“뭐, 겸사겸사죠.”

과거에 서큐버스를 소환수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조사하고 다녔던 터라 서큐버스에 대한 웬만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내 마력의 강함을 눈치채고 내 정기를 노린 프린세스급 몇 명이 나한테 왔다가 역관광 당하고 돌아간 날 이후로 내게 오는 서큐버스는 없게 됐지만.

지금도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들의 방식으로 맞받아쳐 준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같은 마족이니 뭐라고 알 만한 게 있을 것 같아 앨리아한테 물어봐도 ‘아하하...’ 거리며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흠흠, 이야기가 샜군. 여하튼, 레이의 ‘저 상태’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아까 말했듯이 그녀와 성교를 하는 거네. 그녀와 성교를 해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상쇄시키는 거지.]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상쇄한다고요?”

[그렇다네. 하지만 상쇄하려면 서큐버스 퀸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마력을 지닌 자가 필요하지.]

“그렇겠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먹혀 버려서 미라마냥 말라버릴 테니까요.”

프린세스 급으로도 빨리기 전과 후의 차이가 확실히 보이는데 퀸 급은 어떻겠는가.

나는 프린세스 급을 만났을 때가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보기 싫은 장면 베스트 10중 10위를 장식하는 서큐버스가 빨아먹을대로 빨아먹은 자의 모습이었다.

좀비도 그거보단 뚱뚱할 거야...

[게다가 그런 자를 찾기도 어렵다네.]

“뭐가 문젭니까? 모험가 길드에 S랭크들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게다가 프리무스나 하이네도 있고요. 그 녀석들에게 부탁하면...”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 녀석들도 역량만 놓고 따져 보면 S랭크 상위권에 위치해도 이상할 게 없는 녀석들이다.

혼자서는 감당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여러 명이서 분담하면...

...음. 이건 좀 심한 생각이었던 것 같네.

아무리 체질을 고치기 위해서지만 첫 경험을 난교로 시작할 순 없잖아.

나는 이 실례되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러고는 아이테르의 대답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마력을 잃는다고 해도 말인가?]

아이테르의 목소리는 ‘내가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 했을 것 같은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예? 마력을 잃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작해야 몸을 좀 겹치는 일 가지고 마력을 잃는다고? 그랬으면 나는 벌써 복상사로 사망했겠네.

[그렇다네. 서큐버스 퀸 본인이라면 자네가 말한 방법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레이는 서큐버스 퀸과 인간의 혼혈이지. 서큐버스 퀸의 마력이 상쇄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되겠죠.”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세. 잘 된다면 레이만 마력을 잃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잘 못된다면...]

"둘 다 마력을 잃는다. 이거죠?"

[그래서 성녀님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로 억제하는 정도로 끝내는 거라네. 영구적으로 억제제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과 재능을 살려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마력을 잃거나 마력으로 인해 오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니까.]

아이테르의 한숨 소리가 강낭콩 너머로 똑똑히 들려왔다. 저쪽도 어지간히 답답한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성녀의 마력으로 억제만 할 게 아니라 아예 정화를 해 버리면...”

[자네가 말한 것을 포함해서 방법은 많았네. 하지만 대부분이 마력을 잃는 쪽이라 레이가 전부 거절했네. 평생 억제제를 달고 살아도 되니까 마력은 남겨달라고 말하더군.]

하긴, 나라도 마력이 전부인 세상에서 마력이 없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내가 직접 경험했으니까.

마력이 없었을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나저나 지금까지 봤던 것들이 전부 마력이 억제당하는 상태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거지?

그녀가 제약을 받지 않고 전력을 낼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나 더 물어봐도 됩니까?”

[뭔가?]

“친딸이 아닌 레이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성녀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아니, 성녀인 그녀는 자원봉사자의 마음가짐으로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교황, 그 인간이 그냥 허락했을 리가 없다.

아, 물론 교황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평소에는 인자한 할아버지 그 자체니까. 나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마(?)와 관련된 거에 눈이 돌아간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전쟁 때 자기가 직접 교단에 속해 있는 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했을 정도니까.

그런 인간이 서큐버스, 그것도 퀸 급과 인간이 결혼해서 낳은 딸의 치료를 위해 성녀의 마력을 그냥 내준다? 말이 안 되지.

앨리아의 처분을 두고 나와 대판 싸웠던 영감이 절대 그냥 줄 리가 없어.

대충 따져 봐도 아마 그때 봤던 작은 병 하나에 웬만한 마을 하나 먹여 살릴 예산 정도는 들어갈 것이다.

[긴 얘기가 될 텐데. 궁금한가? 내 친구와 만났던 순간부터 내 친구와 그의 아내의 마지막까지 말일세.]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생각해 보니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뇨. 다시 생각해 보니 안 들어도 될 것 같네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낭콩 너머에서 껄껄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하튼, 자네가 어떻게든 힘써 주게나. 만월제만 끝나면 새로운 억제제가 도착할 테니. 만월제는 즐기지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물론 그럴 거긴 한데...”

왜인지 찝찝하단 말이지. 들을 필요가 없는 사정을 들어서 괜히 떠맡겨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앨리아한테 레이의 상태를 들었으면 달라졌으려나?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앨리아한테 들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 같다.

앨리아에게 들었다면 아이테르의 연락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바로 내 쪽에서 그에게 연락을 걸었을 테니까.

[질문은 더 없는가? 슬슬 다과회 시간이라. 늦으면 아내가 삐질 수도 있거든. 한 번 삐지면 일주일은 간단 말일세.]

‘그러니까 당신네들 꽁냥거리는 거 안 궁금하다고.’

“예, 끊어도 되겠...”

끊어도 되겠다고 말하려 할 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하나만 더요.”

[말해 보게.]

“저를 여기로 보낸 게 레이의 ‘이 상태’를 고치게 할 의도가 끼워져 있었습니까?”

강낭콩의 너머에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책상을 톡톡 손가락으로 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체감상 1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네. 하지만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네. 그렇기에 학교 총괄 선생을 그녀들과 대련해서 이기는 사람으로 결정하겠다는 그녀들을 막지 않은 것이니까.]

자기 딸들이 얼마나 강한 지 세간에 보여주고 싶어서 가만히 둔 건 줄 알았는데.

[그녀들 전부를 이길 만한 강한 사람이면 레이의 ‘저 상태’도 안정화 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네. 그녀들과 지내다보면 자네처럼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자네를 부르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녀들을 이기지 못했지. 이 나라에 이렇게 인재가 없는지 몰랐네.]

인재가 없는 게 아니라 당신네 딸들이 너무 강한 거겠지. 내가 오기 전에 이곳에 온 사람들의 명단을 보니 짱짱한 사람 많더만. S랭크의 모험가라던가, 나와 같은 '백야'출신이라던가.

“...일단 알겠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죠.”

[아닐세! 자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까도 말했듯이 자네 책임이 아니...]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속으로는 좋으면서 튕기는 척하고 있어.

“일입니다. 일. 학교 선생으로서 곤경에 처한 학생을 가만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레이에게 빚을 조금 지게 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러니 암부에게 똑똑히 전해 주세요. 제대로 된 정보 안 가져오면 뒷세계에서 일하는 것 같지 않게 생긴 그 몸으로 갚게 할 거라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도 몇 분 동안.

그리고 침묵의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기다리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나였다. 아마 발소리의 주인은 아스모 씨일 것이다.

“저기요..? 슬슬 끊어야 될 타이밍이 오는 것 같은데요?”

[아! 미안하네.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얘기하다 말고 회상에 잠기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차라리 잠들었다고 했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되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있다.

껄껄대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강낭콩을 타고 내 귀를 따갑게 했다.

[하하하하!!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감사 인사는 일이 해결된 후에나 하시죠.”

[그래, 그러지. 레인에게도 언질을 넣어 두겠네. 혹시 더 궁금한 거나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강낭콩은 언제든 받을 수 있는 상태로 해둘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아이테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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