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아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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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이 막 아이테르와 강낭콩으로 대화를 시작했을 무렵, 방을 나온 아스모가 향한 곳은 현성과 함께 갔었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의 점검을 위해 들렀을 때, 현성에게 들키지 않게 최소한의 마력만 사용해 멀리서 붉은 갑옷들을 건드려 깨워 현성의 실력을 보려고 했던 아스모였다.
하지만 너무 순식간에 현성이 붉은 갑옷들을 날려 버렸는지라 제대로 보지 못 했다.
그렇기에 현성이 날려 버린 붉은 갑옷들에게서 마력의 잔재를 확인해 그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연무장에 온 것이다.
덤으로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유능한 메이드마냥 현성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 것처럼 보여 그녀의 신뢰도가 상승하는 것도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급히 방을 나온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계속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성이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냐고 말할 때까지 방에 있었다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어깨 또한 기쁨으로 인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 여자인가. 하고 이상한 눈으로 볼 테지만 그녀의 심정이 되면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찾을 줄은 몰랐어요. 서큐버스 퀸의 딸!’
100년 동안 찾아다니던 다음 단계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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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더 이상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서 흡수하는 정기로는 채워지지 않는 느낌에 아스모는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이 이상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쁨에 몸이 떨렸다.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여기서 더 성장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민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어떻게 다음 단계로 나아간단 말인가?
전 대륙에 로드 급은커녕 인큐버스 킹 급은 아스모 혼자였기에 물어볼 만한 자도 없었다. 웬만한 인큐버스들은 토벌당하는 게 무서워서 딱 먹고 살 만큼의 정기만 흡수하기 때문이었다.
아스모는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살아가는 데 그렇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프린세스’ 급의 서큐버스로부터 그녀보다 더 높은 등급인 ‘퀸’급의 서큐버스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있다’라는 말 하나에 의존해 찾기 시작한 지 50년이 흘렀다. 하지만 ‘서큐버스 퀸은 존재한다.’ 수준의 저급 정보밖에 없었다.
그쯤 되니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까지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아무런 정보나 단서가 없는 것이 서큐버스 퀸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도 그랬으니까. 인큐버스 로드 바로 밑 등급인 인큐버스 킹이라 불리는 등급까지 올라오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모습을 바꿔가며 천천히 힘을 쌓아왔으니까.
정보 수집을 위해 모험가 길드에 평범한 모험가로 잠입했을 때 자기 예전 모습들이 적혀 있는 현상 수배지를 보고서 얼마나 웃었던가.
그렇기에 아스모는 자신과 동급인 서큐버스 퀸급 정도면 자신처럼 정보를 차단하며 살아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40년이 더 흘렀을 때, 아스모는 자기 생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스모가 서큐버스 퀸을 발견한 장소는 교단이 그녀의 부탁으로 마련해준, 웬만한 마족은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소멸해 버린다는 성녀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성역이었다.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 곳에서 관찰한 터라 뒷모습만 살짝 보이는 정도였지만 아스모는 그녀가 서큐버스 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설마 서큐버스 퀸 정도의 존재가 인간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신성력으로 결계가 쳐져 있는 성역에서!’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힘이 줄어드는 성역의 결계를 해제하는 것과 서큐버스 퀸이 거주하는 통나무집 주변을 배회하며 지키고 있는 무수히 많은 교단의 기사들의 숫자를 줄이는 게 먼저였다.
서큐버스 퀸이라 불릴 정도의 존재면 필시 그와 비슷한 수준의 강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을 최대한 아끼기 위함이었다.
먼저 결계를 유지하는 성녀를 처리하기로 했다.
성녀를 직접 건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성녀가 어리다고 해도 몸에 들어 있는 신성력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기도하는 곳을 지키는 기사들을 매료시켜 교회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성녀는 크게 다치게 되어 성역의 결계가 한순간 약해졌고, 그 틈을 타 결계에 공격을 가해 결계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던 교단의 기사들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물론 아스모에게 그 정도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백 년을 살아오면서 수백의 정기를 먹어치워 당시의 S랭크 모험가들을 여럿 해치운 적도 있었는데, 고작해야 모험가 A랭크 급의 인간 기사 몇 명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달려드는 모든 기사들을 처리하고, 겸사겸사 그들의 마력까지 흡수한 아스모는 집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데?’
아니, 생각보다가 아니라 너무 깨끗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듯이.
‘설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덜컹! 열려 있던 문이 세차게 닫혔다. 동시에 문에 빛나는 자물쇠가 걸쳐졌다. 상대를 가두는데 쓰이는 마법인 ‘도어 락’이었다.
‘이까짓 잠금 마법..!’
문과 잠금 마법을 한 번에 부숴 버리기 위해 아스모는 오른손에 마력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가 노린 것이었다.
퍼버버벙!!
아스모의 시야에 흰색 빛이 번쩍이는 것이 들어왔다.
아스모가 근처까지 추격해 왔음을 눈치챈 서큐버스 퀸이 함정을 설치해 둔 것이었다.
폭발의 정체는 집안 곳곳에 설치해 둔 마(?)의 마력에 반응해 폭발을 일으키는 성녀의 마법진이었다.
신성력이 한가득 담긴 폭발에 직격한다면 살아남을 마족은 없을 것이다.
아스모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위해 둘렀던 마력을 그대로 방어로 바꾸지 않았다면 폭발이 그에게 직격해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막아 낼 수 있던 건 반절에 불과했다.
“큭..!”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살기가 가득 담긴 마력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옆으로 구른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곳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피하지 못했다가는 반으로 갈라지는 게 그가 되었을 것이다.
가쁜 숨을 내쉬며 살기가 느껴지는 곳을 보자 기다란 흑발에 아스모와 같은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아스모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서큐버스 퀸이라고.
그것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얼마든지 먹고 마시고 유린할 수 있는, 최강의 존재가 될 수 있기까지 단 한 걸음이라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가 적임을 확인한순간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로서는 처음 겪는 힘겨운 전투였지만 결국 이긴 건 그였다. 왜인지 서큐버스 퀸은 처음의 공격을 한 뒤로 제대로 된 공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아스모가 밀렸던 이유는 성녀의 마력이 담긴 마법진의 폭발에 휘말렸기 때문임이 컸다.
사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서큐버스 퀸은 인간 남자와 결혼한 이후로 다른 자들의 정기를 흡수하지 않았고, 자식을 낳아서 마력이 나눠진데다가 아스모의 추격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성역에서 살다 보니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스모와 서큐버스 퀸의 전투로 인한 소란으로 추가된 기사들까지 전부 정리한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큐버스 퀸에게서 마력을 전부 흡수했다. 이제 그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의 몸은 기쁨으로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스모는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전부 흡수했음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속이 꽉 찬 느낌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흡수한다면 로드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스모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 답을 알 수가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서큐버스 퀸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 닫혀 있는 펜던트의 가운데를 누르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펜던트가 열렸다.
그 안에는 서큐버스 퀸의 모습과 남편으로 보이는 금발의 남성이 딸로 보이는 흑발의 소녀를 안아 든 모습을 그려 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 발로 온 이유가 있었군.’
그녀는 시간을 끌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최대한 늦게 알아차리도록. 자기 반항이 최후의 발악으로 보이도록.
‘딸의 얼굴로 보아 여덟 살 정도인가. 그렇다면 가정을 꾸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이것을 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감각을 집중시켜봐도 이곳에 느껴지는 건 아스모 자기 마력뿐이었다.
아마 그가 오기 전 미리 딸을 빼돌리고 지금보다 더 꽁꽁 숨겼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아스모는 그녀의 자식을 찾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은 말이다.
어차피 그에게 시각은 많았다.
그는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물려받은 자라면 분명히 이름을 떨칠 만한 강한 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가서 먹어도 늦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처음 겪는 힘겨운 싸움과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다는 허무감에 빠져 폭발로 인해 집의 대부분이 날아갔는데도, 아스모와 다른 사람들의 전투가 있었음에도 멀쩡한 장롱을 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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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반쯤 포기했는데...’
처음에 연무장에서 붉은 갑옷들을 상대하는 레이의 모습에서 서큐버스 퀸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붉지도 않을 뿐 더러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물려받았다고 하기에는 마력이 너무 약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다 억제제 때문이었다. 제시간에 억제제를 복용하지 못해 효력이 사라지자 서큐버스 퀸의 마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그 당시 현성은 서큐버스 퀸을 만나 본 적이 없었기에 레이의 저 상태가 뭔지 몰랐겠지만, 서큐버스 퀸을 만났던 데다가 상대하기까지 했던 아스모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르니아라니. 설마 그 남자가 입양했을 줄은 몰랐네요.’
아스모도 아이테르 드 르니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방어 마법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보호아래에 있었으니 아스모로서도 찾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그 남자는 여기에 없죠.’
지금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이곳의 총괄인 진현성이라는 남자였다. 그에 관해서 대부분의 정보를 모르는 아스모는 먼저 정보부터 수집하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의 안에 들어간 아스모는 복구되어 우뚝 서 있는 붉은 갑옷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갑옷들에 남은 마력의 잔재를 확인해 현성이 어떠한 마법들을 사용하는지 유추해 보기 위해 갑옷에 손을 댄 아스모는 이내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 가만히 있던 10체의 붉은 갑옷들이 갑자기 철커덕거리며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들의 주인에게 해로운 일을 하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무기가 아스모를 향했다.
‘설마 제가 이럴 것을 눈치채고 아까 설정을 바꿔놨던 것인가요..!’
물론 아니었다. 현성이 설정해 둔 명령은 그저 건드리면 깨어나라. 는 것뿐이었으니까.
10체의 갑옷이 전부 일어난 이유는 레이가 쓰러지기 전, 한 번에 10체를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재설정을 안 해 뒀으니 당연히 전에 설정해 뒀던 대로 10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스모는 역시 귀족 소녀들이 모인 학교를 총괄하는 사람답게 사소한 위험이라도 일어나지 않게 치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근처에 다른 사람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자기 정체를 들키면 귀찮아질 것이 뻔했으므로 누가 오기 전에 처리하기로 했다.
‘먹을 것도 없는 빈 깡통들에게 본 모습을 보이긴 싫었는데.’
아스모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양 머리에서는 산양과도 같은 둥근 뿔이 돋아났으며 등에서는 검은색의 박쥐모양 날개가 돋아났다.
‘당장에라도 저 영혼 없는 빈 깡통들을 쓸어버릴 수는 있지만 너무 강한 걸 사용하면 그 남자가 눈치챌 수도 있으니...’
그녀가 자신에 대해 조사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붉은 갑옷들을 재조정해 놓은 남자다. 그런 남자가 강한 마법이 발동될 때 방출되는 마력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아스모가 선택한 건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시키는 신체 강화 마법이었다.
현재 그녀의 상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적, 최강의 마법이었다.
신체 강화 마법은 마력을 온몸으로 흘려보내 신체를 강화시키는 마법이기 때문에 신체를 접족해 남은 마력의 잔재를 느끼지 않는 한 마력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남지 않는다. 이것이 그녀가 신체 강화 마법을 선택한 이유였다.
게다가 몇백 년을 쌓아온 그녀의 마력으로 하는 신체 강화 마법이라면 그저 주인이 설정해 놓은 대로만 움직이는 영혼 없는 갑옷들은 방금 전 현성마냥 손짓 한 번으로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력이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 공격할까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10체의 붉은 갑옷들은 그 남자의 소환수로 취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갑옷들이 파괴되는 것을 못 느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고 급히 날개를 펼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이내 그녀는 현성이 갑옷들을 밖까지는 나가지 못하게 해 뒀으리라 판단, 재빨리 연무장을 나왔다.
‘설마 밖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죠?’
밖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보자 당연하게도 붉은 갑옷들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몇 겹으로 꼬아 놓은 함정에 걸려들 뻔했다. 라고 생각한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일단 돌아갈까요.’
날개로 인해 등 부분에 구멍이 뚫렸던 메이드 복을 복구 마법으로 말끔히 수선한 그녀는 더 이상 방심하지 않고 최고의 메이드를 연기해 현성에 관한 것을 낱낱이 파헤친 다음 확실하게 처리하겠다. 주먹을 꽉. 쥐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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