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49화 (49/146)

〈 49화 〉 레이.(6)

* * *

“하아...”

하필이면 제일 성가신 녀석이 제일 성가신 오해를 사버렸네. 나중에 오해를 풀던가 해야지 원.

소원이 앞당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저...”

밑에서 들려오는 레이의 목소리에 내 시선은 다시 밑으로 향했다.

아, 맞다. 나 지금 좀 이상야릇한 자세로 있었지.

게다가 곧 저녁 시간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레이도 저녁을 놓칠 것이었기에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미안. 금방 일어날...게...”

하지만 내 몸은 말과 달리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두 팔이 위로 향해 있는 자세라 매끈한 겨드랑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붉게 상기된 뺨이 어우러져 야릇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두근대는 심장 소리만가 귀를 간질였다.

몸이 엉킬 때 풀렸는지 평상복의 단추가 몇 개 풀려 드러난 두터운 흉부로 인한 골짜기가 눈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뇌를 통해 계속 몸을 일으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큐버스의 매료에 걸려 버린 것일까.

뇌는 분명 일어나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데 몸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라고 하고 있었다.

가슴골을 피해 시선을 옮기니 매끄럽게 보이는 쇄골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저 쇄골에 입을 맞춘 뒤에 목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진도를 나가고 싶었다.

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고 싶었다.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으니 거부를 안 하는 거라며 그냥 확 해 버리라는 마음과 그래도 서로 합의하에 하는 게 맞다는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 같은 달콤한 향기가 점점 확 해 버리라는 마음의 편을 들게 하고 있었다.

그때, 붉은 갑옷들을 상대할 때 봤던 레이의 눈빛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껏 이 세계에서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봐온 그 눈빛. 그것이 내 정신을 돌아오게 해주었다.

“현성님. 꽃의 달콤함에 취해 계시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더 지체하시다가는 저녁 식사 시간에 늦으실 것 같습니다.”

덤으로 아스모 씨의 목소리도 정신이 돌아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아, 아아. 맞다. 저녁 시간이었지? 밥 잘 먹어라!”

나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그대로 레이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아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말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전속력으로 달려 중앙 정원의 분수대가 있는 곳의 벤치에 도착한 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덮칠 뻔했어... 무섭다, 서큐버스 퀸 급의 매료..!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레이는 내가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전혀 밥을 먹은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메뉴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귀족들이 생활하는 곳 답게 이곳의 밥은 항상 맛있으니까.

그저 생각할 것이 많다 보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지경이 된 것뿐이었다.

소화나 제대로 될지 모르겠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라도 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지금도 담배를 피워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서큐버스 퀸이라는, 인간이 붙인 서큐버스의 최종 등급인 그녀와 인간의 남자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레이.

서큐버스 퀸의 강대한 마력을 물려받아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현저히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강한 힘인 나머지 몸이 버티지 못해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가 없으면

상태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은 그녀와 성교를 해 동급의 마력을 불어넣어 상쇄시키는 것.

하지만 그러면 레이와 상대 둘 다 마력을 잃게 된다. 아무리 레이가 미소녀라도 서큐버스 퀸과 비슷한 급의 마력을 지닌 강자가 그 페널티를 감수하고 레이를 안을 리가 없었다.

서큐버스 퀸은 마력량만 놓고 따져 봤을 때 앨리아와 동급이라고 앨리아가 말했다.

서큐버스 프린세스 급은 봤어도 퀸 급은 못 봤으니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마족에 관련된 말이라면 그녀의 말이 제일 신빙성이 있기에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인간 남성과 결혼을 했으며 자식까지 낳은 걸까.

생각과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주인. 주인.”

한창 생각을 하던 중, 들려오는 앨리아의 목소리에 앞을 보니 맞은편 소파에 앨리아가 앉아 있었다.

“왜.”

아스모 씨가 준비해 놓고 간 건지, 접시에 과자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집어 먹으며 앨리아가 내게 물었다.

“주인은 무엇 때문에 그 레이라는 애를 도우려 하는 거야?”

“무엇 때문에. 라니?”

“이미 주인의 목적은 달성한 거 아니야? 여기에 정식으로 취임해서 주인이 찾고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인력을 손에 넣는다. 이게 주인의 목적이었잖아.”

“그래.”

“그러면 굳이 도울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매료라도 걸렸어? 아무리 서큐버스 퀸 급이라도 주인한테 매료가 통할 리가 없을 텐데.”

앨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높이 들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듯 천장을 보았다.

“앨리아. 사람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지 알아?”

“갑자기 뭔 소리야? 뭔데?”

“눈을 보는 거야. 눈을.”

“눈?”

“그래.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 라는 말이 있거든.”

“그래서 그녀의 눈에서 뭘 본 건데? 주인에게 반한 사랑에 빠진 눈이라도 봤어?”

나는 몇 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려다보았다. 붉은 갑옷들을 상대하는 레이의 눈에서 본 감정은...

“분노.”

“분노? 그게 뭐가?”

앨리아는 그게 뭐 이상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인간들은 툭하면 분노에 휩싸이곤 하잖아. 저번에 보니 강함에 꽤 집착하는 거 같던데, 그러면 분노는 약한 자신 때문에 나오는 감정 아니야? 붉은 갑옷들 열 놈 정도는 파바박! 하고 없애야 되는데. 라면서 말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녀의 눈에서 본 분노는 얼음처럼 차가운, 자기 자신마저 얼려 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분노였다.

나는 그 눈빛을 수도 없이 봐서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복수. 오로지 복수 하나만 보고 달리는 녀석들이 하는 눈빛이었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앨리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항~ 그래서 주인이 그 아이를 낫게 해주려고 하는 거구나? 하긴~ 주인은 옛날부터 그랬지?”

“그리고 이유는 하나 더 있지.”

“또 있어? 뭔데?”

“스승 왈. 호감도를 쌓고 싶다면 미소녀의 위기는 절대 지나치지 마라! 라고 하더라.”

“...”

앨리아의 얼굴을 보자 ‘저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거래...’ 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게 뭐야... 그러니까 주인의 말은 그녀가 미소녀라 그녀를 돕는 거라고? 그러면 내가 만약 남자였으면 난 여기 없었겠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그 자리에서 바로 데스빔 날려서 보내버렸지.”

“너무해!”

볼을 부풀리며 항의하는 앨리아.

당연히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앨리아가 남자였다면 지금처럼 함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성(無?)이라면 몰라도 동성(??)인 소환수는 스카지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아마 과거의 나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렘을 만들겠답시고 미소녀의 위기는 해결해 줘야지! 호감도를 쌓자! 호감도를! 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녔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뭐가 좋다고 그리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뭐, 인맥도 많이 쌓긴 했고 휘말린 일들도 다 좋게 끝났으니까 상관없으려나.

“농담이다 농담.”

나도 앨리아를 따라 과자를 하나 집어먹었다.

...너무 달잖아. 혀가 설탕에 절겠네.

그렇게 잠깐 방 안에는 과자를 와삭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주인,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나, 좋아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앨리아. 질문을 하기 위한 앞뒤의 개연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보통의 사람이었으면 앨리아 같은 미소녀가 갑자기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당황해하며 말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 없이 그런 갑작스러운 질문을 들어온 적이 있는 나는 내 뇌 속에 있는 ‘미소녀의 깜짝 질문에 대한 대답 매뉴얼’을 펼쳐 바로 대답을 산출해내었다.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과 함께 미소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좋아하지.”

“몇 번째로?”

“열 번째.”

“열..?! 내 앞에 아홉 명이나 있다는 말이야?!”

믿을 수 없어! 라며 충격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는 앨리아. 그러더니,

“그러면 앞의 아홉 명을 처리하면 일 등은 나의 것?”

라며 중얼거렸다.

너무나도 당돌한 그녀의 생각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서라. 앞에 여덟 명이라면 몰라도 마지막 한 명은 아무리 너라도 못 이길 테니까.”

“그게 누군데?”

“그건...”

그때. 똑똑하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스모 씨가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앨리아에게 다시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 다음, 문을 향해 말했다.

“누구세요?”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려온 목소리는 아스모 씨가 아니라 아인이었다.

“아인이구나.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문이 열리고 클래시컬 메이드복을 입은 여인이 방으로 들어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바다를 담아 놓은 것같이 푸른 눈동자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쉬고 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아냐. 혼자 온 거야? 다른 애들은?”

“말을 전하는 건 저 혼자 해도 되기에 동생들은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말해 뒀습니다. 핀프가 주인님을 뵙고 싶다고 앙탈을 부리긴 했습니다만...”

나는 다섯 자매 중 막내인, 다른 메이드들에게 ‘꼬마 메이드 씨’ 라고 불리는 금발의 소녀, 핀프가 나를 보고 싶다고 앙탈을 부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떼어 놓고 오느라 고생했겠네.

눈앞의 아인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자동인형’이라고 불리는 존재니까. 그것도 감정을 담은.

원래 그녀들의 용도는 암살용이었다.

어디를 봐도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에 그것도 미인과 미소녀들로,

하지만 내가 마도 공학제국의 천재 엔지니어를 납치 후, 협박... 아니, 협상을 해 감정을 넣는 등 여러 가지를 개조시켜서 메이드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올 때 데려와 메이드 분들의 일을 돕게 하고 있었다.

자동인형이라 24시간 동안 일해도 지치지 않을 뿐더러 일의 속도도 평범한 인간의 몇 배다.

메이드 분들이 휴식 시간이 생겨서 기쁘다며 그녀들에게 고마움을 표할 때 나까지 기뻐졌다니까.

그렇다고 24시간 내내 일을 시키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잘 땐 그녀들도 잔다.

본인들은 수면시간이 필요 없다며 밤에 순찰까지 돌려고 하는 것을 너희들이 움직이면 내가 잠을 못 잔다고 말하며 내가 역으로 거절하며 억지로 재우는 거지만.

...그나저나 아인이 앞에 있으니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축제 준비할 때 그녀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면 됐을 텐데. 왜 그땐 그런 생각이 안 들었지?

후회를 해봤지만 이미 떠난 버스, 마셔버린 물이었다.

“핀프는 나중에 내가 달래주러 갈게. 그보다, 무슨 일이야.?”

“그날입니다, 주인님.”

순간 그녀가 말한 ‘그날.’이 뭔가 했지만 다행이 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벌써 그날이야?”

한 며칠 더 남은 줄 알았는데.

“네. 장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투기장으로 하자.”

“시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1시 정도로 하자. 그때면 다들 잘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시간 동안 통제해 두겠습니다.”

아인은 고개를 꾸벅. 숙인다음 방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소파에 누워 앞으로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간까지 오게 되었다.

“슬슬 가 볼까.”

투기장으로 갈 준비를 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인이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건가?

하지만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발소리는 계속 문 앞을 왔다 갔다 했으니까. 아인이었다면 바로 다시 노크를 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마치 부실한 점수의 성적표를 받아온 날의 내가 밖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함에 내가 먼저 방문을 열어서 상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던 때, 결심을 한 듯 이내 발소리가 멈췄다.

똑똑. 노크 소리에 나는 그제야 고구마로 막힌 목이 사이다의 청량함에 씻겨 내려간 느낌이 들었다.

“누구세요~”

상쾌한 마음으로 누구인지 묻자,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인물의 등장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 밖에다 세워둘 수도 없었기에 일단 들어오라고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레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평소에 입던 옷은 어디 갔는지, 마치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 마냥 흰색의 가운 차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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