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53화 (53/146)

〈 53화 〉 아침.

* * *

달이라는 지휘자가 지휘하고 풀벌레 악단의 연주하는 밤이라는 악장이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다음 악장인 아침을 연주하기 위해 새로이 태양이라는 지휘자가 올라왔고, 그에 맞춰 풀벌레 악단도 아침 새 악단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지저귐이라는 파트로 시작으로 아침 새 악단의 연주가 세계라는 극장에 울려 퍼졌다.

아침 새 악단의 연주를 듣는 관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멍하니 음악을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한 귀로 흘려듣는 관객들이 있었으며 상쾌한 표정으로 음악을 즐기는 관객들도 있었다.

싫다는 표정으로 음악을 듣기를 거부하며 이불이라는 방음벽을 치는 관객도 있었으며. 밤이라는 음악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귀가 막혀 아침이란 음악이 들려오지 않는 관객도 있었다.

아침 새 악단이 연주를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자리를 떠난 관객도 있었다.

이것이 오케스트라가 아닌 연극이었다면 여주인공을 맡았을 법한 흑발의 소녀, 레이는 흘려듣는 쪽에 더 가까웠다.

덮고 잤던 고급스러운 재질의 이불을 걷은 뒤에 부스스, 몸을 일으킨 레이는 기지개를 폈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몸에 남은 밤이라는 음악의 흔적들을 털어냈다.

아무리 도도한 맏언니 역할을 하는 그녀라도 ‘잠에 막 깼을 때.’ 라는 마수를 이기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30분. 아침 운동을 위해 채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30분은 더 일찍 깨어나 이 시간이면 준비를 완료했어야 됐을 터. 하지만 왜인지 오늘은 30분이나 늦잠을 잤다.

왜인지 오늘은 잠자리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를 못 복용해 점점 강해지는 마력 때문에 잠자리가 불편했는데, 오늘의 아침은 싫은 기억들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 낸 듯 맑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상쾌한 공기까지 마시면 최고의 아침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운동이고 나발이고 다시 침대와 베개에 몸을 맡기고 다시 한번 꿈의 바다로 잠기고 싶었다. 이 기분이 언제까지 갈지 몰랐기 때문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다시 몸을 맡기고 싶다는 자신과 하루 이틀 씩 빼먹다 보면 게을러진다고 억지로라도 일어나라는 자신이 싸움을 벌였다.

1분간의 설전 끝에 이긴 건 억지로라도 일어나라는 뜻을 지닌 자신이었다. 게으름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로 싫어하는 단어라는 점을 이용한 공격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간 것이었다.

그렇게 하품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는 항상 손이 닿는 거리에 놔두던 머리 끈을 찾아 원형 테이블의 위를 뒤지려 했다.

“...?”

하지만 언제나 같은 장소에 놔두던 머리끈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머리 끈을 놔두던 원형 테이블조차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이어서 느껴지는 위화감. 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흐릿한 눈앞을 제대로 보기 위해 초점을 바로잡았다.

그제야 조금씩 방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원형 테이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서랍장이 존재하고 있었다.

침대 또한 그녀가 항상 누워 잠들던 침대보다 반 이상은 더 커 보였다.

그렇게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레이는 이내 자신이 잠들었다 일어난 방이 자기 방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러면 그녀가 아침을 맞이한 방은 누구의 방인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안개가 낀 듯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방 안에서 힌트를 얻기로 했다.

먼저, 방의 크기를 확인해 보았다.

대충 가늠해 봤을 때, 그녀의 방이나 그녀가 가 본 다른 소녀의 방과 비교해 봤을 때 1.5배 정도 더 넓은 것 같았다.

거기서 일단 다른 귀족 소녀의 방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면 메이드의 방인가?

침대가 하나만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현성의 전속 메이드인 아스모와 자동인형 메이드 5자매를 제외한 메이드들은 2인 1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답을 얻은 것은 서랍장의 위를 봤을 때였다.

파란색 바탕의 두꺼운 노트 한 권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무의식적으로 들어든 노트에는 ‘리리에’라는 제목이 써져 있었다. 노트를 펼치자 밑쪽에 적힌 시간 별로 나눠 정돈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용족으로 보이는 뿔을 달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가 찍혀 사진들이었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모습. 수박을 입에 한 가득 물고 볼이 빵빵해진 모습. 양파를 보며 눈이 매워서 우는 모습 등, 여러 장의 사진들이 노트의 끝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사진 하나하나 마다 ‘우리 리리에 너무 귀엽다.’ ‘너무 사랑스럽다.’ ‘말랑말랑한 볼의 감촉이 너무 좋았다.’ 등 감상문이 써져 있었다.

그녀가 집어 든 건 노트가 아니라 사진첩이었다.

‘리리에..?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기억의 틈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던 레이는 그녀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내는 데 성공했다.

‘라네즈와 라헨느와 같이 놀던 그 아이구나...’

가끔 길을 가다 본 라네즈 자매와 함께 놀던 푸른 머리의 소녀. 라네즈가 ‘리리에’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의 틈에서 꺼내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마 선생님의 따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런 그녀가 잔뜩 찍힌 사진들이 이곳에 있다는 건...

‘여긴, 선생님의 방?’

그렇게 첫 번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이어 첫 번째 의문에 꼬리를 물고 두 번째 의문이 생겨났다.

그러면 어째서 자신이 현성의 방에서 아침을 맞이한 것인가?

그 질문에 대답해 준 것은 일단 이런 잠에서 방금 깨어난 모습으로 계속 있을 수도 없었기에 간단하게 세안이라도 해야겠다. 하고 들어간 욕실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었다.

흰 가운 하나만 입고 있는, 그것도 허리띠를 매지 않아 걸치듯 입고 있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몸매가 여지없이 드러나 있었으며, 파격적인 검은색 레이스 팬티가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호텔에서 어른의 밤놀이를 한 이튿날 같은 모습이었다.

“..!”

뇌에 번개가 치듯 찌릿한 감각과 함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동시에 어젯밤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성이 귀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것부터 시작해서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침대로 던져진 일.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한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속삭여 준 일.

쇄골에 입을 맞추기 시작하여 점점 올라가다가 귀까지 도달해 귀를 살짝 깨물린 일.

그대로 익숙해 보이는 혀의 놀림으로 귀와 발을 유린당한 일.

마지막으로 처음 겪는 쾌감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실신한 것까지.

그 모든 것들이 기억났다.

도도한 맏언니. 차가운 얼음 공주. 기계 심장. 등 도도함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지만 실상은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물려받아 주위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게 싫어 자기 스스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소녀였다.

“으... 아...”

그런 그녀가 본방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일면식이라고는 학교에 오기 전에 현성이 르니아 가문의 저택에 손님으로 올 때 멀리서 본 게 전부인데, 자신은 그런 남자와 몸을 섞은 것이다.

그것도 그녀 쪽에서 먼저 안아달라고 말하며.

“아으...”

부끄러움에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가 그런 말을 하려는 자기 머리채를 잡고 방에서 끌고나오고 싶었다.

빙글빙글. 눈앞이 돌기 시작했다. 머리에서는 김이 나는 듯한 착각이 보일 정도였다.

“일어나셨나요?”

“꺄악?!”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놀라는 레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뒤를 돌아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만월제를 맞이해 바빠진 현성을 위해 왕국에서 보낸 그의 전속 메이드를 연기하는, 실상은 마왕을 부활시키려는 단체의 간부인 실비아에 의한 사주로 현성을 조사 후 처리, 왕성 귀족의 딸들을 그들에게 넘기려고 온 인큐버스 아스모였다.

“아,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레이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심호흡을 한 뒤에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몸은 좀 어떠세요?”

아스모의 말에 레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는 등 구석구석 몸의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몸이 한없이 가벼웠다. 살짝 점프를 하려다가 옷을 거의 걸치듯 입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레이는 급하게 허리띠를 맸다.

‘진짜로 효과가 있던 건가..?’

아무래도 현성의 ‘손기술’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 얼굴이 화끈거려오는 것이 느껴졌기에, 레이는 고개를 휙휙 저으며 이상한 생각을 떨쳐 냈다.

“저... 그런데 선생님께선...”

“현성님이시라면 저기에 계세요.”

아스모는 욕조에 설치된 샤워용 커튼을 가리켰다.

“네..?”

레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욕조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람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요 여기.”

아스모가 커튼을 걷자, 그제야 레이는 그녀가 했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욕조의 안에는 항상 입는 흰색의 와이셔츠와 검은색의 긴 정장 바지차림의 현성이 잠들어 있었다. 불편한 잠자리에 꽤 뒤척였는지 옷의 여기저기에 주름이 져 있었다.

무의식중에 계속 불편한 건지 현성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아스모는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현성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하셨는지 밤을 꼬박 새신 것 같으시더라고요. 아침에 현성님을 깨우러 온 저와 마주치셨으니...”

“아...”

“침대가 넓어서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도 잘 자는 애 깨우기 싫다고 말씀하시며 욕조로 들어가 주무셨어요. 혹시나 레이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깨우라는 말씀과 함께.”

당연하지만 이것도 완벽한 메이드로 보이기 위한 연기였다. 주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메이드. 누가 봐도 진정한 메이드의 표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레이에게 메이드의 표본이고 자시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와 있는 건 세상모르고 자는 현성의 얼굴뿐이었다.

“밤을 꼬박 새셨다고요..?”

“네. 하지만 뭘 하시다가 밤을 새셨는지는 모르겠네요.”

‘설마...’

레이는 현성이 어젯밤 그녀에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믿고 기다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낫게 해 줄 테니까.]

‘나를 위해서..?’

당연히 아니었다. 현성이 밤을 꼬박 새운 이유는 만월이 다가옴으로 인한 소환수들의 ‘흥분 상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소환수 중 강함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앨리아와의 싸움이 길어졌던 나머지 싸움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태양이 뜨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레이는 그가 했던 말로 이유를 유추해 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나온 결론이,

‘나를 위해서 내 상태를 고치게 해주시려고 밤새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신 건가?’ 였다.

물론 학교 안의 대부분의 시설은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하지만 현성은 이곳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총괄 선생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느 때건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레이의 가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레이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상태에 숨을 가쁘게 내쉬기 시작한 레이를 보며, 아스모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괘, 괜찮아요! 그. 그럼! 선생님께 감사했다고 전해주세요!”

레이는 황급히 욕실을 빠져나와 현성의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아스모는 왜 저럴까. 의문에 휩싸인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그나저나 저 아가씨.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요?’

* * *

다행이 복도에 다른 귀족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 다행인 건, 그녀와 현성의 방이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다시 잠이 들려고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봤지만 잠이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장 고동 소리가 쿵쿵대며 정신이란 문을 두드려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다시 욕실로 돌아온 아스모는 여전히 잠에 푹 빠져 있는 현성을 바라봤다.

주인을 걱정하는 메이드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를 싸늘하게 현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대체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를 볼 때와 같은 얼굴. 현성이 봤다면 ‘경멸 표정 최고!’ 라고 말할 정도의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냥 이대로 처리할까요.’

실비아와 한 거래는 현성에 대해 조사해서 정보를 넘겨주거나 더 갈 경우 그녀가 직접 그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정보를 더 모은 다음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의 그라는 기회 또한 놓치기 싫었다.

그녀가 마법을 영창하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그녀의 손에 형성화되었다.

이대로 휘두르기만 하면 나약한 인간의 몸 정도는 두부를 자르듯 부드럽게 잘려 깔끔하게 두 조각으로 나뉜 고깃덩어리만이 남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문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가 그녀의 귀에 닿자 마법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계십니까?”

이어서 현성을 찾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모도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쯧. 하며 혀를 찬 그녀가 욕실을 나가 방문을 열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매력적인 클래시컬 메이드복을입은 아인이 서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요.”

방금까지 싸늘하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다시 메이드 연기를 시작한 아스모는 손님을 응대하는 메이드의 얼굴, 그 자체였다.

“네. 밤을 새신 탓인지 아직 주무시고 계셔요.”

“그런가요... 그러면 주인님께서 깨어나시면 도서관으로 와 달라고 말씀을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인이 자리로 돌아가고, 메이드의 역할에 따라 방을 정리하던 그녀는 현성이 잠들어 있는 욕실 쪽을 흘낏. 곁눈질로 보며생각했다.

만월제의 마지막 날. 만월이 뜨는 밤. 레이의 마력을 흡수해진정한 인큐버스 로드가 되었을 때, 세상에 자기 강림을 알리기 위한 발판으로서 삼아주겠다고.

그때가 오면 그가 얼마나 강한 소환수를 데리고 있던 한계를 뛰어넘은 자신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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