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또 다른 아침.
* * *
* * *
“...여긴?”
눈을 뜨자,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여 봤지만 낯선 천장은 여전했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해 뇌의 회전이 더뎠지만, 그런데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내 침대가 아니라는 것.
내 침대는 이렇게 딱딱하지 않거든. 그리고 애초에 딱딱한 침대가 있을 리가 없잖아.
천장만 봐서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나는 일단 상체를 일으키기로 했다.
팔이 어딘가에 걸쳐져 있는 느낌이 있으니 이대로 팔에 힘을 주면 상체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양팔에 힘을 주었고, 그대로 몸을 밀어 올리...지 못했다.
“어?!”
갑자기 힘이 풀려 버린 팔 때문이었다. 그대로 중심을 잃은 내 몸은 미끄럼틀을 타듯 미끄러졌고,
쿵!
“으악!”
후두부 쪽에 큰 충격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강하게 박은 것 같았다. 눈앞이 빙글. 돌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의식의 전원이 꺼질 뻔했으나 간신히 켜두는데 성공했다.
“아이 씨... 아파라...”
그래도 그 덕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픈 부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걷혀져 있는 샤워용 커튼. 근처에 구비된 샤워용품들. 위로 보이는 건 샤워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건 변기.
이것들을 조합해 봤을 때,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욕조의 안’인 것 같았다.
그래, 목욕할 때 들어가는 그 욕조 말이다.
그렇다면 조금 전에 내가 후두부를 박은 곳은 내가 머리를 대고 잤던 욕조의 모서리라는 말이 된다.
나는 네모난 욕조의 모서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곳에 후두부를 박았으니 눈앞이 돌지. 진짜 기절 안 한 게 용할 정도네.
그렇게 내가 잠들어 있던 곳은 어딘가. 하는 의문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하나의 의문이 해결됨과 동시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며 생겨났다.
내가 왜 침대가 아닌 욕조에서 잠을 잤는가? 였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침대가 아닌 욕조에 들어가서 잘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의문에 대답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들어왔다.
“일어나셨나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만월제 기간 동안 바쁠 나를 돕기 위해 내 전속 메이드로 오게 된 아스모 씨였다.
매끄러워 보이는 우윳빛 피부에 매력적인 반묶음 머리의 흑발.
메이드 복을 입었음에도 부각되는, 자동으로 시선이 갈 법한 풍만한 가슴의 그녀가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붉은 눈동자. 나 또한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현성님?”
너무 오랫동안 응시한 탓일까. 아스모 씨가 왜 가만히 있냐는 듯한 얼굴로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다시 잠든 게 아닌지 확인하려는 용도인 것 같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네요. 그나저나 아스모 씨. 제가 왜 욕조에서 잤는지 아시나요?”
“기억 안 나세요? 밤새 어디서 뭘 하다 오셨는지 퀭한 얼굴로 아침에 방문 앞에서 현성님을 깨우러 온 저와 마주치셨잖아요? 그리고 왜인지 현성님의 침대에 계신 레이님을 깨우기 싫다고 말하시면서 욕조로 들어가 주무셨잖아요.”
“음...”
밤을 샜다고? 내가? 게다가 내 침대에 레이가 있어? 왜?
이상하게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질 않았다. 뇌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해아하나?
마치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퍼마신 이튿날의 느낌이었다.
뇌에 안개가 낀 듯 전날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술은 이곳에 온 이후로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모서리에 후두부를 박은 충격이 아직 남아 뇌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럴 땐 역시 숙취 해소제지. 아니, 숙취 해소 마법이지.
술은 마시지 않았지만.
나는 발키리 자매 중 아무나 골라 합일의 마법을 영창했고, 그대로 내 이마에 오른손을 대며 마법을 영창했다.
[정화(Purification).]
오른손에서 하얀빛이 번쩍였다. 머릿속에 뿌옇게 낀 안개가 걷히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휴...”
이제 좀 낫네.
정신이 맑아지자 다시 뇌가 회전을 시작했다.
“아... 맞다...”
이내 내 머릿속에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째서 욕조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는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레이와 침대에서 뒹군 다음 실신한 그녀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린 일.
만월을 대비하여 소환수들의 ‘흥분 상태’를 막기 위해 투기장으로 가 소환수들과 싸운 일.
앨리아가 칭얼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와도 싸웠다가 너무 길게 끈 나머지 밤을 꼬박 새워 버린 일.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과 함께 방으로 돌아온 내가 잠들어 있는 레이를 깨우기 싫어 무의식적으로 방문에서 제일 가까운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몸을 넣은 일까지.
마치 영화를 틀어놓은 듯, 눈앞에 그때의 장면들이 지나갔다.
“음...”
꽤 화려한 일들이 있었네. 3D 안경과 팝콘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야.
“그런데 계속 욕조에 계실 건가요?”
영화관에 있던 내 정신을 돌아오게 한 것은 아스모 씨의 ‘보기 별로 안 좋습니다만.’라는 뜻을 내제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아. 그러네요.”
아스모 씨의 말마따나 계속 욕조 안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일단 몸을 일으키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뇌가 깨어났다는 뜻은 감각도 되살아났다는 뜻이라는 것을.
“윽?!”
푹신한 침대가 아닌 딱딱한 욕조에서 잔 탓일까.
몸을 움직이려하자 목을 포함한 몸의 여기저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특히 허리 쪽이 제일 크게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내 입에서도 ‘억’소리가 절로 나왔고, 나는 최대한 몸이 비명을 덜 지르고 일어나게 하기 위해 마치 인형극을 위해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팔, 다리, 어깨, 목, 허리가 따로 움직이는 기행을 벌이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세요?”
아스모 씨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중요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허리를 너무 많이 써서 이렇게 된 거라면 억울하지도 않겠네...
* * *
잠시 후, 굳어 있던 몸이 어느 정도 풀렸다. 평소처럼 이대로 간단하게 세안을 하던지 머리만 감은 다음에 활동을 시작해도 괜찮겠지만, 이왕 욕조에 있던 김에 목욕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와이셔츠를 완전히 벗으려던 때였다.
“저기... 아스모 씨?”
분명 씻으려는 동작임을 눈치챘을 텐데, 아스모 씨는 여전히 욕실의 안에 있었다.
“...”
왜인지 대답이 없는 아스모 씨. 그녀를 보니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시선이 와이셔츠를 반쯤 벗은 내 상반신이란 것이었지만.
아스모 씨 같은 미인이 내 상반신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니 어딘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아스모 씨?”
두 번째로 그녀를 부르자, 정신이 든 듯 무슨 일이냐며 물어오는 그녀.
“너무 쳐다보시면 부담스럽기도하고, 지금부터 씻을 거라서요.”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깨달은 듯, 후후.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멋진 얼굴에 멋진 몸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넋을 놓고 보고 있었네요.”
“어... 감사합니다다?”
내가 아스모 씨 같은 미인이 그렇게 말할 정도의 얼굴은 아닐 텐데. 몸도 적응이니 뭐니, 스승 때문에 운동을 하긴 했지만 헬 창 급까지는 아니고...
“그럼.”
아스모 씨는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욕실을 나갔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며 목욕 준비를 계속...할 수 없었다.
“아, 한 가지 말씀드리는 걸 잊었네요.”
이내 잊어 버린 것이 있다는 듯 아스모 씨가 다시 욕실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들어왔으면 내 속옷차림을 보여 줄 뻔했네.
“...뭔데요?”
“아인님께서, 일어나시면 도서관으로 와달라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도서관이요?”
“네, 뭔가 전할 것이 있다는 것 같았어요. 그럼.”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다음 욕실을 나가는 아스모 씨. 혹시나 해서 30초 정도 기다려 봤지만 다행이 그 말이 끝이라는 듯 아스모 씨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나는 욕조의 물을 틀어 적당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물의 온도를 조절했다.
그렇게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몸이 흐물흐물해지며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쌓여 있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지금의 시간을 만끽했다.
“서큐버스 퀸... 서큐버스 퀸인가...”
물론, 앞으로에 대한 것도 잊지 않은 체.
* * *
욕실을 나온 아스모는 그제야 참아왔던 숨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비틀거리면서 근처에 테이블에 손을 짚으며 몸을 지탱한 그녀는 테이블이 있는 벽에 걸려 있던 거울로 자기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마치 발정 난 암컷마냥 흥분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으며,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몸 또한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덮칠 뻔했어...’
탄탄한 근육질의 몸과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기가 문제였다.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만 맡을 수 있다는 그들 종족을 유혹하는 너무나도 달콤한 향기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그를 덮칠 뻔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갔다면 필시 인큐버스를 버리고 서큐버스가 되어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됐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아스모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서큐버스로 보낸 시간보다 인큐버스로 보낸 시간이 몇십, 몇 백 배 더 길었다.
하지만 그 몇백배의 시간이 몇백분의 일의 시간에게 먹힐 뻔했다.
‘...조심해야겠어. 여기까지 와서 쌓은 것들을 무(無)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만월제의 끝이자 만월이 뜨는 날까지 3일. 절대 서큐버스로 타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아스모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