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각자의 시간.
* * *
“하아... 하아...”
연무장의 안, 레이는 들고 있던,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검을 내려놓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마냥 그녀의 주위를 돌고 있던 검들이 일제히 챙그랑! 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우...”
그녀는 가져 왔던 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물병을 들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레나의 빙결마법덕분에 장시간 시원함을 유지하던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을 느껴졌다.
물병을 다 비운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 앞에 펼쳐진 전투의 흔적을 바라봤다.
그녀의 정면에는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진 붉은 갑옷들의 잔해 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멈춰 있거나 작동하지 않은 갑옷들이 있는 거로 보아 한 번에 최대의 수인 10체를 상대한 것으로 보였다.
과거의 그녀는 4체를 상대하기도 버거워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힘들긴 하지만 10체를 전부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물론 서큐버스 퀸이라 불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마력의 덕이 컸다. 만월이 다가옴에 따라 그녀의 마력도 점점 강해졌으니까. 하지만 그 마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서큐버스 퀸의 마력이 폭주해 이성을 잃고 사람들을 덮쳐 정기를 빨아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재 그녀의 상태는 현성이 준 반지와 흥분상태를 가라앉혀준 현성의 부드러운 애무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폭주해도 이상치 않았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시원한 해방감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예전이었으면 이렇게 마력을 마음껏 사용하지도 못했을 터, 현성의 도움이 레이에게 크게 도움이 된 것이었다.
“읏...”
다시 그날 밤을 떠올리자 레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레이는 연무장을 나왔다.
* * *
연무장에서 붉은 갑옷들과 몸 풀기를 마친 레이는 그대로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하지만 그녀는 문의 손잡이에 손만 올려놓을 뿐, 문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연무장으로 향하기 전에 행했던 자기 위로의 행동으로 인해 방 안에 서큐버스가 흥분할 때 나온다고 알려진 미향(美?)이 안개가 되어 자욱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기를 한다고 창문을 열어놓기는 했지만, 얼마나 빠졌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안심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향이 학교 전체에 퍼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향을 들이마신 자들은 성적 욕구가 끓어올라 서로가 서로를 덮치거나 유일한 이성인 현성에게 전부 몰려가게 되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미향이 완전히 빠진 것을 확인하기도 해야 했고, 곧 있으면 다과회를 위해 세레나를 포함한 왕성 귀족의 소녀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살짝 문을 연 다음에 혹시라도 남아 있을 미향이 새어 나오기 전에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는다.
잔향이 없다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잔향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방이 조금 어질러지는 한이 있다고 해도 바람의 검을 이용해 전부 날려 보낸다. 그리고 소녀들이 오기 전에 방을 치운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둥그런 문의 손잡이를 잡으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을 세며 문손잡이를 당기려는 순간,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문 앞에서 뭐 하세요?”
“어?”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레이는 당황한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연보랏빛 머리의 소녀, 세레나가 방문 앞에서 안절부절하는 레이를 보며 왜 그러고 있느냐는 말투로 물었다.
“세레나..? 왜 이렇게 일찍...”
세레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일찍이요? 거의 시간 맞춰서 온 걸 텐데요?”
레이가 아는 세레나는 약속 시간에 근접해 오거나 어기면 어겼지 일찍 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늦은 건 레이, 자신이라는 말이 된다.
‘갑옷들을 상대하는 거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을 미처 재지 못한 건가?’
낭패였다. 이대로 잔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방에 세레나를 들이는 건 위험했다.
“여기저기가 젖어 계신 걸 보니 연무장에서 몸을 풀고 오신 거군요?”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힐끔거리며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얼른 들어가서 씻으시죠!”
세레나가 문손잡이를 잡으며 방문을 열려는 행동을 보였다.
“자, 잠깐..!”
레이는 황급히 세레나를 말리려 했지만 세레나가 문을 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레이는 세레나의 손목을 잡아 그녀 쪽으로 끌어당기며 품 안에 세레나를 품었다.
그리고 빠르게 열린 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갔고, 황급히 문을 닫았다.
다행이게도 미향은 전부 날아간 것 같았다. 그제야 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 세레나의 숨에 찬 목소리가 레이의 목 밑에서 들려왔다.
“언니..? 언니 품에 안길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숨이 막히기 시작했어요...”
“아, 미안...”
레이는 힘을 주고 있던 팔을 풀었다. 푸하! 하며 세레나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언니,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하신 거예요?”
세레나가 고개를 들어 레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레이는 변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혼자서 위로한 것도 말해야 했다. 그건 레이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냥. 요즘엔 이러지 않은 것 같아서.”
“언니...”
세레나가 감동받은 표정으로 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 레이의 행동의 이상함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럼, 나 씻고 나올게.”
그렇게 땀을 닦기 위해 욕실로 향하던 중,
‘뭐지?’
레이의 눈에 침대 옆, 원형 테이블의 위에 놓인 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욕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며 손을 뻗어 편지를 집었고,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불꽃놀이가 시작될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뒤뜰 정원으로 와. 다른 녀석들이, 특히 세레나가 알면 왜 너하고만 만나냐. 라면서 뭐라 뭐라 할 게 뻔하니까.]
라는 글귀가 담긴 편지였다.
“오? 선생님께서 방법을 찾으셨나 본데요?”
레이의 옆에서 흘낏, 편지를 훔쳐본 세레나가 대단하다는 듯 감탄했다. 그리고 이내,
“그나저나 특히 세레나가 라니. 선생님도 너무하시네요. 제가 안다고 해서 막 떠벌리거나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안 그래요, 언니?”
라며 볼을 부풀리며 이곳에 없는 편지를 쓴 자로 추정되는 자에게 항의하며 레이에게 공감해 달라는 투로 말했다.
“그러게.”
세레나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레이는 편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저기, 세레나...”
레이는 세레나에게 편지에 대한 건 다른 소녀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레이와 지내옴으로서 그녀에 대해 알만큼 아는 세레나는 그녀의 말에 담긴 의도를 눈치채고는,
“걱정하지 마세요~ 편지에 대한 건 비밀로 해드릴 테니까요~ 그러니, 감기에 걸리기 전에 얼른 씻고 오세요. 다과회 준비는 제가 해둘 테니.”
라고 말하며 장난기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레이에게서 등을 돌려 찻잔과 찻주전자를 테이블위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레이는 말괄량이인 동생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가 완전히 욕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세레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편지를 비밀로 해드린다고 했지 밀회의 장면을 안 보겠다고 말한 적은 없죠~”
* * *
“거 봐. 내 말이 맞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채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앨리아에게 말했다.
아스모 씨는 내 부탁에 의해 한 가지 물건을 가지러 간 상태였다. 아마 몇 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앨리아는 내 말에 반박하려는 듯,
“그러면 그 애가 폭주했을 때는 어떻게 무사했던 건데? 주인도 순간 성욕을 참지 못하고 덮칠 뻔했다면서?”
라며 반문을 제시했다.
“그거야 서큐버스 프린세스니까 어느 정도 매료에 저항할 수 있던 거겠지.”
“서큐버스 퀸의 마력을 온전히 이어받은 그녀의 매료를, 고작 프린세스 급이 저항해?”
“내 보호막도 있었잖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내가 몰래 좀 엿봤는데...”
나는 내 눈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마력의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네가 말하는 급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어.”
“주인처럼 마력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야, 넌 내 눈이 마안이나 용안이랑 같다고 생각해? 당연히 전부 속까지 살펴봤지. 양심에 찔릴 정도로 말이야.”
“그거는 딱 봐도 아픈 과거라 안 물... 잠깐, 너. 왜 그렇게 아스모 씨가 인큐버스인 거에 집착하는 거야?”
흠칫! 앨리아의 몸이 작게 떨렸다.
“그, 그거야... 만약에 만에 하나의 경우로 내 말이 맞았다고 쳤을 때 주인이 지키고 있는 귀족 애들이 피해를 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주인의 목적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우물쭈물하며 횡설수설 하는 앨리아. 식은땀이 흐르는 게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이고.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신경 썼다고. 여기 올 때까지만해도 왜 가냐며 귀찮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어...”
그때, 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 설마, 아스모 씨가 네 친구를 죽인 범인이라고 밝혀지면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냐? 만월제가 끝나면 돌아가기 때문에 단 일 퍼센트의 확률이라도 놓치기 싫은 거고?”
움찔! 앨리아의 몸이 크게 떨렸다. 시선을 회피하는 걸로 보아 진짜로 그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넌 다른 소환수들과 다르다는 걸 잊었어?”
“하지만..!”
간절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앨리아. 그 눈빛에서 나는 소중한 자를 잃었을 때의 내 모습이 보였다.
소중한 자를 잃은 슬픔을 복수로 채울 수 있는데 그걸 마다 할 자가 어디 있겠나. 나 또한 그랬으니까.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다른 소환수라면 몰라도, 앨리아 만은 살생을 저지르게 하면 안 된다.
“안 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앨리아는 포기했다는 듯한숨을 내뱉었다.
“...알았어. 주인에게 맡길게.”
그러면서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진짜 그라는 게 밝혀지면 주인이 완전히 처리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게 해 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속할게.”
“...고마워.”
검은 빛과 함께 앨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일인가.”
어느새 만월제가 바로 이튿날로 다가왔다. 나는 무거워진 머리를 소파에 기대며, 앨리아가 생각한 게 맞지 않기를 바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