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만월제.(7)
* * *
“...응?”
베드로 씨의 가게에서 꼬치구이를 대충 먹고 뒤뜰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길목에 서 있는 한 명의 소녀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앳된 미모를 지닌 연보랏빛 머리의 소녀, 세레나였다.
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지나갈 수 없게 세워둔 얼음의 벽은 또 뭐고?
그녀의 뒤에는 이 뒤로는 지나갈 수 없다는 듯 얼음으로 이루어진 벽이 세워져 있었다.
“야, 세레...”
그녀에게 말을 걸려던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눈의 초점은 풀려 있어 흐릿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밝기보다는 어두운 느낌이었다. 평소의 쾌활한 모습의 세레나가 아니었다.
애초에 평소의 세레나였으면 나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와서 뭔가 도울 일 없나 물어 봤겠지. 아니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 같이 불꽃놀이 볼 사람이 없는 거냐고 놀리던가.
그러고는 어떤 일이 있던 끝에는 은혜를 잊지 말라는 둥 얘기를 했을 거고.
그랬을 그녀가 저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 가설이 맞다면 아마 일정 반경에 들어오면 적으로 간주해 공격을 시작하는 문지기 같은 역할을 수행하게 했을 터.
시험 삼아 한 발짝 더 세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봤다.
우웅.
그녀의 오른쪽 어깨부근에 둥둥 떠 있던 무색의 구체가 붉은빛을 발하려 하기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와씨... 살벌해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여기가 반경의 바로 앞인가 보네.
그나저나 세레나를 이곳에 배치시켜서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는 건 필시 이 뒤에 있는 뒤뜰 정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찌릿대는 느낌이 강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세레나가 조종을 당하는 것으로 보아 같이 있던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적의 목표는 같이 있던 ‘누군가’였을 테니 세레나를 문지기로 내세운 거겠지.
축제라는 중요한 시간에 그녀와 함께 있었을 법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면, 왕성 귀족의 딸들이나 메이드 정도로 후보가 나온다.
하지만 메이드들과 루아, 그리고 라네즈, 라헨느 자매는 불꽃놀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남은 건 레이 정도밖에 없었다.
“...일 났네.”
현재 그녀의 상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게다가 오늘은 만월. 반인반마인 그녀의 마력이 최고조를 찍는 날이다.
누군가와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자칫하다가는 그녀가 폭주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할 시각은 없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가 봐야 했다.
소환수를 소환해 시선을 끌게 하고 얼음벽을 넘는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얼음 여왕 글라시아와의 전투를 통해 세레나가 진심을 발휘했을 때의 모습을 직접 본 나로서는 내키지 않는 선택지였다.
죽이는 싸움보다 살리는 싸움이 몇 배는 더 어려우니까. 잘못하다가 내 소중한 소환수들을 잃는 사태가 일어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미안, 조금 아플 거다. 들리지 않겠지만, 나중에 벌충할게.”
파캉!
반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더할 나위 없는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 느껴졌다.
* * *
“으... 음...”
몸이 계속 흔들리는 느낌에 세레나의 정신이 점점 돌아왔다.
“으...응..?”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기 몸이 마치 짐짝처럼 누군가의 옆구리에 끼워져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몸이 흔들림에 따라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난... 왜 들려져 있는 거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니, 기억을 더듬으려 하려면 지끈거려오는 머리 때문에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술을 질펀 마신 이튿날 봤던 모험가들의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성년자. 술을 마셨을 리가 없었다.
“끄응...”
답답함에 작게 신음을 흘리자.
“이제야 일어났냐?”
“어..?”
익숙한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세레나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선생님..?”
“나인걸 알아보는 걸 보니 확실히 정신이 돌아왔나보네.”
“정신이 돌아와요..?”
“기억 안 나? 처음이라 후유증이 좀 심한 건가? 나라면 진즉에 정신이 돌아왔을 텐데.”
현성의 말에 세레나는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정신을 막 차렸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머리가 지끈거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하나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성의 편지를 본 일부터 시작해 밀회를 염탐하러 근처의 나무에 숨은 일, 마지막에는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던 일까지.
“저, 뭐 했어요? 왠지 어떤 여성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 이후에 기억이 없어서요.”
“너, 조종당하고 있었어.”
“...제가요?”
“그래. 정신을 차렸을 때 머리가 지끈거린다거나 그런 느낌 안 받았어? 술을 엄청 마신 이튿날처럼... 아, 넌 미성년자라 그런 느낌이 뭔지 모르려나?”
“어... 아뇨,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을 봤으니까요... 대충 그런 느낌을 받긴 했어요.”
“아마 네가 들었다던 여성의 목소리의 주인이 너를 기절시키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도록 조종한 거겠지.”
“저... 그런데 누구 다치게 했다던가, 그러진 않았죠..?”
자기 몸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세레나. 현성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나를 다치게 할 뻔했지.”
“제가요? 선생님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세레나가 피식. 웃었다.
“웃을 기운도 있고 살만 한 가 보다? 누군 너 상대하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현성의 말에 세레나는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헤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그전에 왜 선생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 거예요?”
“내가 왜?”
“편지 보낸 거, 선생님 아니예요?”
“뭔 편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현성의 얼굴에 세레나는 그녀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있었어? 나는 그냥 마지막 날이기도 해서 내 전속 메이드인 아스모 씨와 같이 맥주라도 한 잔 하고자 찾던 중에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길래 뒤뜰 정원으로 향하다 보니 조종당하는 너를 보게 된 거야. 그래서 바로 막은 거고.”
“그게 말이죠...”
세레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현성에게 말해 주었다.
현성이 보낸 편지를 보고 레이가 뒤뜰 정원으로 향한 일. 그런 그들의 밀회를 훔쳐보기 위해 근처의 나무에 숨은 일까지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정신을 잃은 일은 정신을 차렸을 때 말했기에 생략했다.
“그렇게 된 건가.”
세레나에게 전해 들은 상황으로, 현성은 앨리아가 말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설마가 진짜일 줄이야.’
자기와 같은 과거의 아픔을 지녔다고 생각했기에 무르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현성은 입술을 씹으며 속도를 올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뒤뜰 정원의 입구에 도착한 그들.
정원에 발을 들인 현성은 자신이 방금 ‘사람 물리기’의 결계를 통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계의 안에 들어오자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에 그들은 고개를 돌리며 어딘가에 있을 레이의 위치를 탐색했다.
“찾았어?”
“저기..!”
저 멀리 레이로 보이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 세레나는 손가락으로 목표 지점을 가리켰다.
동시에 레이가 백발의 남자에게 배 부근을 주먹으로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둘의 눈에 들어왔다.
“언니..!”
“이런..!”
세레나라는 짐을 든 상태로 움직였기에 벌어진 폐해였다. 지금에 와서 세레나를 땅에 버려 두고 달려간다고 해도 간발의 차로 늦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현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그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는 세레나를 흘낏 곁눈질했다.
“...”
“선생님?!”
갑자기 멈춰 선 현성에 세레나는 다급하면서도 왜 그려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 봤다.
“이대로 가면 분명 늦을 것 같거든... 읏차!”
“꺅?!”
세레나를 들고 있는 자세를 바꾸는 현성. 마치 그녀를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는 현성의 모습에 세레나는 불안감을 느꼈다.
“선생님, 설마 저를 던지실 생각은 아니시죠..? 아무리 선생님이 냉혈한이라고 해도 가녀린 숙녀를...”
“걱정 하지마. 보호 마법 걸어 줄 테니까. 프로텍트(Protect).”
현성이 마법을 영창 하자, 얇은 보랏빛의 막이 세레나의 몸에 둘러졌다.
“이거... 믿을 만 한 건가요?”
“이론상 다크 나이트의 공격을 한 번 막을 정도는 될 거야.”
가장 약한 공격이겠지만. 이라고 구태여 덧붙이지는 않는 현성이었다.
“이론상?! 방금 이론상이라고 말씀하셨죠?! 싫어요! 싫..!”
세레나의 반론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 했다.
“꺄아아아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세레나의 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어라..?”
‘분명 직선으로 던질 생각이었는데...’
의도와 달리 목표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듯 날아가는 세레나를 보며.
“...아, 맞다. 나 지금반지 깨진 상태였지?”
힘 조절이 실패한 원인을 깨닫는 현성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