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악몽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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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불꽃의 화마가 숲을 휘감고 있는 가운데, 불꽃의 한가운데에서 흑발의 소녀를 품에 안은 소년이 있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눈을 감고 있던 흑발의 소녀가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그... 는..?”
“불꽃으로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어! 그러니 기다려! 지금 고쳐줄 테니까..!”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몸에 닿아있는 소년의 손을 제지한다.
“이미 늦었어...”
“늦지 않았어! 근원인 그릇이 파괴된 거니까 그릇을 재구축하면..!”
소년이 여인의 몸에 손을 대며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크헉..!”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소년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소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몸의 이상을 알렸다.
“그만...해...”
“그만 안 하면 당신이 죽잖아!!”
입술을 짓이기며 계속 마력을 주입하려 했지만, 계속 실패할 뿐이었다.
“네게... 넘겨 줬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어... 그러니... 힘을 아껴... 다른 동료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괜찮아... 이제야 편히 쉴 수 있게 된 거니까...”
겨우겨우 손을 들어 올린 소녀가 소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을 타고 소년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고마웠어... 내 사랑스러운...”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소년의 뺨을 쓰다듬던 소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어..?”
소년의 동공이 확장된다. 믿지 못한다는 얼굴을 하며, 소녀를 흔들었다.
“일어나... 일어나 봐...”
미동도 없는 소녀.
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건, 시각으로 인해 보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체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모습 뿐.
“아... 아...”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몸을 끌어안으며, 소년은 절규했다.
“아아아아아아!!!”
* * *
“안 돼!!!”
쾅!!
비명과 굉음이 동시에 들려오며 현성의 상체가 침대에서 튕겨올랐다. 이어 현성의 몸을 중심으로 마력이 방출된다.
방출된 마력으로 인한 충격파가 방 안의 가구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충격파의 여파는 방 안에만 그치지 않았다.
“뭐, 뭐죠?”
“지, 지진..?”
마치 기숙사 건물 자체가 들썩인 듯한 충격파에 건물에 있던 모든 학생들과 메이드들의 몸 또한 크게 들썩였다.
“하아... 하아...”
그 정도의 강한 충격파를 방출한 현성은 현재 가쁜 숨을 내쉬며 얼이 빠진 듯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길게 뻗어 있는 상태였고, 목욕 가운과 그가 누워 있던 자리는 그가 흘린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얼굴 또한 땀으로 범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는 현성. 잠깐 아무런 말 없이 떨리고 있는 그의 손을 응시한다.
‘꿈..?’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려도 한참 동안 몸의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가 꿈에서 본 건,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 * *
“마스터! 괜찮으세요?!”
“주인님! 괜찮으세요?!”
상체만 일으킨 채로 침대에 앉아 악몽으로 인해 멍하니 떨리는 손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쾅!
방문이 강하게 열리며 금발의 소녀와 은발의 여인이 다급하게 들어와 내 상태를 살피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였다.
내가 데리고 있는 발키리 7자매 중 막내인 엘린과 자동인형 메이드 자매 중 맏언니인 아인이었다.
아무래도 악몽을 꾼 여파로 기숙사 건물을 흔들었다는 것이 그녀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안 좋은 꿈을 꾼 것뿐이니까.”
너무나도 안 좋아서 기분이 더러울 지경까지 갔지만 말이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만약 편찮으신거면 참지 말고 바로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때가 늦기 전에 말이예요.”
“그래. 그래.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엘린과 아인.
“마스터!”
아침 순찰이 끝났는지 나머지 발키리 자매들이 연이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 또한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엘린과 아인에게 악몽을 꿨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그녀들에게 해 달라며 대신 떠넘기고, 악몽을 꾸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이상하다. 반지를 끼고 난 뒤부터는 좋은 꿈이던 나쁜 꿈이던 꿈 자체를 꾼 적이 없었는데?’
악몽을 꾼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금지 마법을 썼을 때나 합일이 아닌 내 본래의 마력을 과도하게 썼을 때도 악몽을 꾼 적이 꽤 있었으니까.
하지만 성녀의 마력이 담긴, 내 본래의 마력을 억누르기 위한 반지를 낀 후부터는 악몽은 고사하고 아예 꿈이라는 것을 꾼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오늘 악몽을 꾼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제일 기억하기 싫었던 날을 재생하는 형식으로.
그런 생각하며 반지가 껴져 있을 왼손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왜인지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어야 할 성녀의 마력이 담긴 반지가 없었다.
“아, 맞다. 반지 깨졌지.”
깨졌다기보다는 내가 깨뜨린 거지만.
기억의 톱니바퀴가 되돌아가며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반지가 깨진 건 학교에 쳐들어온 마왕의 4 간부 중 한 명인 검은 갑옷 ‘다크 나이트’를 상대할 때 마력을 해방했을 때였다.
‘다크 나이트를 쓰러뜨린 뒤에 다시 마력을 억누르기 위해 발키리 자매들의 힘을 빌려 두 번째 반지가 탄생했었지.’
그리고 그 두 번째 반지는 서큐버스 퀸의 딸인 레이를 노리고 학교에 잠입해온 인큐버스를 퇴치할 때 마력을 또 해방함으로서 깨졌고.
거기다가 레이의 그릇을 재구축하느라 마력을 꽤 소비했으니, 정신적으로 피로해져 악몽을 꾸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하필이면 제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꿈으로 나오냐.
아무래도 당분간은 기분이 꽤 더러울 것 같다.
“하...”
머리를 헝클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스터... 괜찮으신 거 맞죠..?”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내 상태를 살피는 엘린.
“왜?”
아까까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엘린이 갑자기 또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자 나는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발키리 자매들과 아인 또한 표정이 많이 좋지 않았다.
“그... 얼굴이...”
‘그렇게 심각한 모습인가..?’
거울이 저 멀리 있으니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해하지 못한 다는 얼굴을 하자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투영 마법을 영창해 내 모습을 보여주는 엘린.
“어우씨 깜짝이야.”
투영 마법에 비친 내 얼굴은 관 속에서 나온 미라처럼 퀭해져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아직 악몽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봐도 못 볼꼴이었기에,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컨트롤 해가며 얼굴을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되돌렸다.
“됐어?”
엘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레이는?”
기억에 의하면 내 침대에서 같이 잤을 터. 하지만 일어나서 보니 그녀는 침대에 있지 않았다.
“마스터께서 깨시기 한참 전에 일어나시더니, 목욕 가운을 추스르시면서 다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시던데요?”
시계를 보니 아침 9시 30분이었다. 매일 아침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는 그녀로서는 이미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래? 뭐 이상한 건 없었고? 막 날개가 나 있다거나 뿔이 나 있다거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레이가 마력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고 전 날 밤에 아스모 씨가 염려 했기에, 레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는지 물었다.
“네. 얼굴이 완전 새빨갛던 것만 빼면 순찰 때 보던 레이님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다행히 아스모 씨가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면 아스모 씨는?”
아스모 씨 또한 방 안, 소파에서 잠을 청했을 터.
“검은 머리의 메이드 분이라면 레이님보다 한참 전에 나오셔서 똑같이 어디론가 가시던데요?”
앞으로에 대해 얘기 좀 해 보려 했더니만.
아무 말 없이 떠날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나중에 얘기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머리도 식힐 겸 샤워하기로 했다.
샤워를 위해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으로 나가려는 것 같아 아랑곳하지 않고 욕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는데, 생각해 보니 욕실과 방문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러 명이 동시에 이동하니 발걸음 소리가 겹쳐서 따라오는 것같이 들리는 거겠지. 생각하며 욕실로 들어섰는데.
“...얘들아?”
정신을 차려보니 욕실의 안에 나를 포함해 9명이 들어서 있었다.
욕실이 넓어서 비좁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서 샤워를 즐기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화장실 안 쓸 거면 나 샤워하게 나가주지 않을래..?”
마지막 말이 길게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보는 그녀들의 눈빛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으니까.
철컥.
욕실의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손이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 * *
“흐음...”
여기저기 책들로 가득 쌓인 서재의 안에서, 한 여인이 턱을 괸 채로 책상을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찰랑이는 흑발이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위치하는 곳에는 종이에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온몸을 검은 갑옷으로 둘러싼 말을 탄 기사가 그려져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등에는 박쥐 모양 날개가 돋아나 있었으며 머리에는 뿔이 솟아 있고,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두 개의 그림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붉게 X자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그림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따금 ‘흐음...’ 거리며 탄식음을 내뱉고 있던 그녀는.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들어와요.”
끼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장신의 사람이었다.
로브가 얼굴과 몸을 감싸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몰랐지만, 이내 후드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성별을 확정짓게 해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실비아님.”
남성의 온화한 목소리를 듣자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푸르며 고개를 드는 흑발의 여인, 실비아.
“아, 당신이었군요.”
여전히 얼굴은 가려져 있는 상태였지만, 목소리와 입고 있는 하얀 로브를 통해 상대를 특정한 그녀는 자세를 추스르며 로브의 남성을 응시했다.
“성녀에 관한 건 어떻게 됐나요?”
“말씀하신 대로, 조치를 취해 놨습니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성녀뿐만 아니라 신성국 자체를 손에 넣으실수 있으실 겁니다.”
실비아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가늘게 뜬 눈이 미소와 어우러져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수고했어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등을 돌려 떠나려는 남성을 보며 실비아는 아쉬운 듯한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벌써 가시게요? 차 한 잔은 하고 가시지.”
“몰래 온 거라 금방 돌아가 봐야 해서요. 그럼.”
꾸벅. 고개를 숙인 로브의 남성이 문을 넘어 사라졌다.
로브의 남성이 나간 것을 확인한 실비아는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 그려져 있는 건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소중하다는 듯 종이를 껴안은 그녀는 종이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길. 곧 만나러 갈 테니."
그녀가 사라진 테이블에 남아 있는 건, 수녀복을 입은 체 기도를 하고 있는 백발 소녀의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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