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
* * *
욕실을 나온 나는 소파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제일 기억하기 싫었던 일을 악몽으로 꾼 데다가 씻었는데도 씻지 않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하는 샤워는 항상 피로함으로 시작해서 개운함으로 마무리를 지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씻고 나왔음에도 개운하기는커녕 피로함이 그대로인데다가 찝찝한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전날 술을 질펀 퍼마셔 해장이 덜 됐다든지, 전날의 피로가 덜 풀렸다든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하~ 시원해요~”
자기들은 개운하다는 듯한 얼굴로 수건만을 몸에 두른 아슬아슬한 모습인 채로 샤워실에서 나오고 있는 8명의 여자들이 아닐까 싶다.
금발의 7명은 내가 데리고 있는 소환수인 발키리 자매들이고, 그녀들 사이에 끼어 있는 흑발의 여인은 감정을 가진 특수한 자동인형 메이드 중 맏언니인 아인이다.
“그러고 보니 엘린, 아까 보니 종아리 쪽에 쓸린 상처가 있던데.”
“네? 진짜요?”
여섯째인 엘로나의 말에 다리를 들며 종아리를 확인하는 막내 엘린.
내가 그녀들의 앞쪽에 위치해 있기에 망정이지, 뒤에서 그녀들을 따라나오고 있는 형태였으면 분명 반쯤 들어 올린 다리의 사이로 소중한 곳이 보였을 것이다.
그런 곳을 본다고 부끄러워할 시절은 이미 지났긴 했지만.
“진짜네요? 언제 쓸렸대?”
라며 종아리에 손을 대고 회복 마법을 영창 하는 엘린. 하얀빛이 그녀의 다리를 감쌌다.
“조심해. 작은 상처라고 무시하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까.”
“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엘린과 엘로나의 다음으로 이어진 건 장녀인 엘린과 메이드인 아인의 얘기였다.
“요즘 들어 어깨 쪽 근육이 뭉치는 느낌이 들었는데, 마사시를 받으니 한결 낫네요. 감사합니다, 아인님.”
다른 자매들이 D정도라면 그녀는 G에서 H정도였다. 그러니 어깨가 결릴 수밖에.
아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언제든 말씀만 해주시길.”
“아뇨, 아무리 그래도 바쁘신 분께 어찌...”
“괜찮습니다. 저는 자동인형. 지치지 않으니까요.”
아인의 미소 앞에서 엘렌은 볼을 긁적이더니.
“그, 그럼 진짜 심할 경우에... 부탁하겠습니다...”
순백의 얼굴을 진홍색으로 물들이며 작게 부탁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꽤 결림이 심했던 모양이다.
다음으로 들려온 건 다섯째인 엘레나부터 둘째인 엘리나까지 도합 4명이 나누는 얘기였다.
“오랜만에 만져 본 마스터의 몸... 너무 좋았어요...”
“적당히 근육이 붙은 게 만지는 느낌이 좋았어~”
“게다가 싫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시면서도 저희들을 거부하지 않는 자애로우신 마스터... 너무 귀여우셨어요~”
“응. 마치 고양이를 씻기는 기분이었어.”
그래 저거다, 저거. 저게 내가 샤워를 했음에도 찝찝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다.
조금 전, 나를 따라 욕실에 들어온 8명에 의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 구석구석까지 씻겨지게 되었다.
본인들은 악몽을 꿨던 나를 위로해 주겠답시고 열과 성을 다해 내 몸을 씻겨 주었겠지만, 나로서는 인형이라도 된 듯 몸이 여기저기 끌려 다녔으니 피로감이 그대로일 수밖에.
물론 몸의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좋긴 했다. 그나마 그것이 있었기에 피로함이 ‘조금은’ 풀린 게 아닐까.
물론 내가 알아서 씻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씻겨질 때 봤던 걱정스러움이 담긴 눈을 봤다면 누구라도 나처럼 인형처럼 가만히 씻김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
...그나저나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악몽의 장면이 뇌에서 사라지질 않네.
꿈으로 본 장면이 장면이니만큼 더욱더 오래가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난 날.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날.
“하아...”
“마스터?”
소파에 앉아 뇌리에 강하게 박혀 버려 사라지지 않고 있는 악몽에 한숨을 내쉬고 있자 내 주위로 몰려드는 발키리들과 메이드 한 명.
그녀들이 평소에 입고 다니는 순백의 갑옷은 자신들의 마력으로 만드는 거라 착의 탈의가 마음대로 가능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아직도 옷을 입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가슴골들이 적나라하게 보이었다. 저기서 수건이 조금만 흘러내린다면 아마 분홍색의 그것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크크...”
이런 생각이 드는걸 보니 아직 살만한가 보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으신 거 아니야?”
“아까까지 한숨을 쉬시다가 갑자기 웃으시는 걸 보면 안 괜찮으신 게 맞을지도?”
“얼마나 나쁜 꿈을 꾸셨으면... 흑..!”
“괜찮아, 마스터. 우리 여기 있어. 얼마든지 어리광 부려도 돼.”
방금까지 땅이 꺼질 듯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웃으니 악몽으로 인해 뇌가 망가진 게 아닌가 싶은지 걱정스러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
셋째인 엘로니는 안기라는 듯 두 팔을 벌리기까지 했다.
수건을 손으로 고정하고 있지 않으면 흘러내리는 게 상식이었지만.
엘렌의 다음 가는 흉부가 그 상식을 깨부수었다.
...수건이 수건걸이가 아니더라도 걸쳐질 수도 있구나.
* * *
잠시 후, 하얀빛과 함께 순백의 갑옷을 입은 그녀들의 모습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도 저렇게 빛과 함께 착의와 탈의가 되는 옷이 있다면 편리했을 텐데. 라는 생각과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발키리 자매들처럼 팟. 하고 옷을 갈아입는 능력이 없어 속옷부터 시작해 하나씩 입고 있는 메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는 장면이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보겠지만 입는 장면은 구태여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다 입은 아인은 시간됐다며 일이 있다는 듯이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럼.”
“자~ 가자~!”
엘렌이 살짝 고개를 숙인 것을 신호로 발키리 자매들도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마스터. 무슨 꿈을 꾸신 거예요?”
내가 꾼 꿈에 대해 묻는 엘린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들은 그대로 방문을 나섰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모든 발키리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으며 모든 자매들의 시선이 엘린을 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렌의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
“엘린..!!”
방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발키리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서 ‘악몽’이라고 말할 법한 일은 단 한 가지라는 것을.
물론 엘린 또한 그날의 일에 대해 알고는 있었을 터였다. 다만 그녀가 내게 질문을 한 이유는 그저 순수한 궁금증에 의해서였겠지.
엘렌의 다그침이 있고 다른 자매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자.
“아..! 죄, 죄송해요..!”
그제야 그녀가 내게 한 질문이 어떤 것에 대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는지, 엘린이 내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아. 일부러 물은 것도 아닌데 뭐. 그치?”
“네, 네! 절대 일부러 여쭤본 게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러면 됐어.”
그녀가 내 상처를 건들일 만큼 악녀가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엘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스터의 쓰다듬을 받다니 부러워라~ 나도 모르는 척 여쭤볼 걸~”
아쉽다는 듯 말하는 엘로나.
“...엘로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부릅 뜬눈으로 엘렌이 노려보았다.
“노, 농담이야 언니...”
깨갱하며 꼬리를 내리는 엘로나. 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소환사도 아니면서 나를 소환사로 만들어 동료들을 늘리라고 말해준 스승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꼈다.
내 옆에 그녀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악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이건 다른 소환수들이나 쌓아온 인연들에게도 통하는 말이었지만.
엘렌과 엘로나의 티키타카인지 내 웃음으로 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엘린도 아직 멀었네~”
넷째인 엘룬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엘로나가 동의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숱한 역경을 넘어오셔서 웬만한 건 사건으로 치지도 않으시는 마스터께서 ‘악몽’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면 당연히 그날의 일 아니겠어?”
그렇게 역경을 헤쳐오진 않았는데. 누가 들으면 막 세상이 위험할 정도의 시련들을 겪고 넘어온 줄 알겠네.
몇몇 큰일들이 있긴 했어도 다 잘해결됐으니까 역경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껏 해야 불타 버릴 뻔한 엘프들이 사는 대수림을 구한 거나 고대룡을 소환수로 데리고 오기 위해 산을 몇 개씩 부수면서 싸운 정도의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역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스승을 만나기 전, 아무것도 없던 그 시절에 겪었던 게 전부이지 않을까.
꼬르륵.
악몽을 꾼 여파로 인해 긴장하던 몸에 발키리들과의 일로 긴장이 풀렸는지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키리들을 보내고,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방을 나오자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방에 들어가려는 듯 방문을 열고 있는 흑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저 방은...’
이 학교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 방이었다.
학생의 방문을 열 수 있는 건 총괄 책임자인 나와 방의 주인인 학생의 전속 메이드와 학생 본인 뿐.
총괄 책임자인 내가 여기 있고 흑발의 소녀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지 않았으니, 저 방문을 열고 있는 건 방 주인이 틀림없었다.
“레이~!”
내가 그녀를 부르자 소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려졌다.
어젯밤까지는 붉게 빛나는 루비 같던 눈동자였지만 이제는 흑진주같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제 마력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릇의 재구축이라는 18세의 나이로써는 견딜 수 없을 만한 큰일을 견뎌 내 속박하던 제약을 당당히 부순 장한 소녀, 레이 데 르니아였다.
검집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연무장에서 붉은 갑옷들을 상대하고 돌아온 뒤인 것 같았다.
몸을 괜찮은지도 묻고 겸사겸사 할 말도 있어서 입을 열려던 찰나.
“읏..!”
그녀의 몸이 크게 떨리더니 이내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