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그의 부탁.(2)
* * *
“우리가 곧 돌아가는 건 알고 있지?”
하이네의 말에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 왕국 제 3왕녀, 아이리스의 조금 불순한 의도에 맞춰주기 위해 각자의 일에 휴가를 내고 이곳으로 온 그들이었기에, 당연히 휴가가 끝나면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검은 갑옷, 다크 나이트의 습격으로 인해 침대 신세를 지게 된 그들이었기에 본의 아니게 휴가가 며칠 더 늘어나게 됐다.
다행이때마침 왕녀를 데리러 온 아이테르가 상황을 알게 되었고, 왕성 귀족의 힘을 이용해 그들의 복귀를 조금 더 미룬 것이었다.
“휴가랍시고 오신 거라고 하기에는 고생만 하다 가시는 것 같지만요.”
세레나의 말에 하이네가 작게 웃으며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여기 와서 한 거라고는 잠깐 학생들을 돌본 게 전부고 나머지는 검은 갑옷한테 왕창 깨져서 침대 생활을 보냈으니까.”
“왕창 깨지다뇨..! 그건 상대가 다크 나이트라는 강자여서 그런 거잖아요..!”
압도적인 강자에게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세레나가 그들의 패배를 합리화시키려 했다.
“그래도 깨진 건 맞잖아.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된 거 아니야?”
그런 세레나를 보며 패배를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는 듯, 하이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치만...”
“여하튼, 기사단 모두가 30분 안에 쓰러진다는 걸로 유명한 루이네의 잔소리를 한 시간이나 들은 현성님께서 죽어 가는 눈으로 우리를 불러 모으시더니 말하시더라고.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며칠만 더 이곳에 있어 주면 안 되겠냐고.”
“다녀올 곳이라뇨?”
처음 듣는 현성의 외출 소식에 세레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니, 그전에 왜 오라버니들에게 남아달라고 하신 거예요? 학교를 지키는 게 명목이라면 발키리 분들이 계시잖아요.”
이미 다 예상하던 질문이라는 듯 세레나가 질문을 마치자마자 하이네가 입을 열었다.
“발키리들도 전부 데리고 가신다고 하시더라고.”
“그러면 나머지 소환수들은요?”
현성이 고대룡을 2마리나 소환수로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세레나였다. 그들 중 한 마리만 학교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시킨다면
“물론 나도 다른 소환수한테 맡기면 안 되냐고 여쭤봤지. 하지만 각자의 일이 있다고 하시더라. 누구는 어디 파견 보내고 누구는 어디 지키고...”
“...”
하이네의 말을 들으며, 세레나는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외출을 잡으신 것도 모자라 발키리분들을 전부 데려가신다라...’
세레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를 따라가면 분명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절하실 경우에는 소원권을 사용하면 되겠죠. 새로운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좀 아깝지만...’
재미난 경험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나였다.
“뭐, 현성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보다, 안 봐도 돼?”
계속되는 질문이 귀찮아진 건지, 아니면 사랑스러운 동생이 투기장에 온 의도가 현성의 마법들을 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챈 건지, 하이네가 투기장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어째서 투기장에 들어와 있는지 기억해낸 세레나는 황급히 투기장의 한가운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일 처음에 물었던 현성의 외출 장소에 대한 질문의 답을 듣지 않은 것은 말끔히 까먹은 채로.
* * *
캉!
“큭..!”
한 차례 공격이 막힌 루이네와 리안은 뒤로 크게 물러나 자세를 재정비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체력을 회복하는 것과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는 것으로 보아 전황은 전적으로 루이네 일행에게 불리해 보였다.
그런 그들에 비해 현성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땀은 당연히 흘러내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 시작했던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현재 그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그들의 다음 공격은 어떻게 자신을 향할까 생각하는 듯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사리 분별이 막 가능해진 어린아이라도 누가 이기고 있는 건지 물어보면 고민 없이 답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후우... 역시 뚫기 힘드네... 프리무스보다 더한 방어력이잖아?”
창을 고쳐 잡으며, 리안이 못 당해내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뚫을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크 나이트를 상대로 지지는 않았겠지.”
대련을 위해 머리를 땋아 올린 상태인 루이네가 심호흡하며 체력을 보충했다.
“현성님하고 싸울 때마다 내가 크루세이더 클래스가 맞는지 의심이 간다니까... 그땐 도대체 어떻게 이긴 거지..?”
방어에 관해서는 명성이 자자하던 프리무스였지만, 지금은 완벽한 상위 호환인 상대를 만나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들만 있는 게 아니었잖아.”
리안이 창을 붕붕 돌리며 다시 돌진할 준비했다.
“거기다, 방어력뿐만이면 이렇게 고전하지도 않았지...”
프리무스가 현성의 뒤에서 검은빛을 내뿜고 있는 무수히 많은 마법진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마법진들의 안에서 나오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이 그들의 체력을 갉아먹어 갔기에, 처음에는 그럭저럭 방어 마법들로 버틸 수 있었던 프리무스도 점점 지쳐가게 되었다.
기껏 무기들을 피해 루이네와 리안이 현성에게 도달했다고 해도 그의 몸을 지키고 있는 마력 결계를 뚫을 수가 없었다.
“하이네 녀석. 강화 마법만 걸어 주고 자기는 편히 쉬다니...”
관중석을 향해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프리무스.
“아무리 현성님의 애인분이 두 자릿수가 넘는다는 말을 실수로 내뱉었다고 해도 말이지, 비밀로 해 줄 수 있었잖아? 친군데. 어? 그냥 마을에서 놀던 친구도 아니고 인마 전쟁을 겪으면서 끈끈한 전우애까지 생긴 친군데. 치사하게 일러바치기나 하고. 진짜 나중에 실수하는 거 생기기만 해 봐. 내가 그냥...”
“우는 소리 그만하고, 준비하자.”
구시렁대는 프리무스의 말을 끊으며 루이네가 검을 다시 쥐었다.
우우웅.
그녀의 검이 하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소드 익스퍼트 등급부터만 발휘할 수 있다는, 마력을 검에 담는 기술인 ‘오러 블레이드’였다.
“그래. 이 싸움이 끝나면 하이네 녀석한테 꿀밤이라도 먹여 주자고!”
창끝을 현성에게 향하며 리안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하아...”
어쩔 수 없다는 듯 프리무스가 울상을 지으며 자기 마력으로 만들어 황금빛을 내뿜고 있는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며 방어 마법을 영창했다.
“나는 모든 것을 지키는 방패. 그 무엇도 나를 뚫지 못할지니. 막아라. 적의 공격을. 지켜라. 소중한 동료를. 보내지 마라. 적을 내 뒤에!”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방패에서 방어 마법이 전개되며 황금빛의 결계가 그들을 감쌌다.
그런 그들을 보며, 현성 또한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몸도 다 풀린 것 같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모양이니 나도 슬슬 끝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현성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등 뒤에 펼쳐져 있던 무수히 많은 마법진들이 가운데에 있던 하나의 마법진을 향해 모이며 합쳐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성의 등 뒤에는 거대한 하나의 마법진만이 남게 되었다.
파직! 파지직!
파직거리며 검은빛의 전하를 내뿜는 마법진을 본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땅을 박찼다.
저 마법진에서 나오는 게 무엇이든 그들의 머릿속에는 패배라는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안의 창과 루이네의 검이 현성에게 닿기 직전에 검은빛이 번쩍이며 투기장 내의 불빛을 전부 삼켰고.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투기장이 크게 떨렸다.
* * *
“아무리 그래도 브레스는 반칙 아닙니까?”
다시 한번 신세를 지게 된 회복실의 침대 위에서 프리무스가 현성을 보며 볼멘소리를 냈다.
“진짜 브레스도 아닌데 뭘.”
“진짜 브레스도 아닌데 진짜 브레스의 위력을 내니 문제인 거잖아요... 도대체 뭡니까? 그 마법은.”
“비밀.”
알려 줘 봤자 자신만이 쓸 수 있다는 듯 의기양양한 현성의 표정에 프리무스는 한 대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성이 마지막에 선택한 마법은 드래곤이 입에서 내뿜는 브레스를 마력으로 재현한 마법이었다.
마을 하나 정도는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었기에, 아무리 최고의 방패를 가진 프리무스라도 전부 막아 내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프리무스 일행의 패배로 대련이 끝나게 되었고, 대련 전에 투기장에 쳐둔 결계에 의해 회복실로 자동 이동이 되어 현재의 상태가 된 것이었다.
“루이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반대편 침대에 누워 있는 루이네의 동조를 얻어 보려는 프리무스. 하지만 왜인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루이네는 프리무스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
눈만 살짝 내민 채로 되묻는 루이네.
“아니야. 그냥 계속 이불 뒤집어쓰고 있어.”
그녀를 보며 프리무스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응.”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는 루이네. 어쩔 수 없다는 듯 프리무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
“아무튼. 승 패 상관없이 며칠 더 여기 있겠다는 말은 잊지 않았지?”
“압니다, 알아요. 아버지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이...”
“그래. 그러면 잘 부탁할게.”
“지이이...”
“하아...”
자신을 향한 시선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현성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그를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한 무리의 소녀들이 있었다.
“또 뭘 말할 게 있어서 여기까지 따라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건데?”
“후후. 다 알고 왔다구요?”
음흉한 미소를 짓는 세레나를 보며, 현성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뭘?”
“선생님이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는 말을요!”
꽁꽁 숨겨 왔던 비밀이라도 찾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는 세레나. 현성은 아무 말없이 프리무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 제가 안 말했어요!”
정말로 억울한 표정을 짓는 프리무스를 보며, 현성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서. 어디 가시는데요?”
잠시 말을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말을 안 했다가는 귀족이라는 힘을 이용해 몰래 그를 따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성국(?國)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