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놔두자.
* * *
“와~!”
땋은 금발 머리의 소녀, 라네즈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듯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켰고, 10살짜리 아이임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마구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한 곳에 멈춰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더니, 눈을 감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궁금함에 계속 쳐다 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뜬 라네즈. 두 팔을 내리더니 재미없다는 듯한 얼굴로 터덜터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축 처진 어깨는 덤이었다.
“바람이 안 느껴져.”
아무래도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역시 애는 애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게 되도록 결계가 쳐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녀의 기대를 충족해 줄 수가 없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면 결계를 해제해 줘!”
어떻게 해서든 바람을 맞아보고 싶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는 라네즈.
지금, 이 결계를 해제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눈에 훤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결계 해제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려던 찰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 한 번 체험시켜 주기로 했다.
“정말? 정말결계를 해제해 줬으면 좋겠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얼굴에 가득 담은 채로 라네즈에게 물었다.
끄덕끄덕. 기대가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진짜지? 후회 안 하지?”
분명 몇 분. 아니, 몇 분까지도 필요 없다. 몇 초만 지나도 질질짜며 결계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비명을 지를 테니까.
“응! 후회 안 해!”
“그래. 알았다.”
난 분명 두 번이나 그녀의 의사를 물었고, 그녀는 두 번 다 긍정의 표시를 했다. 그러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내 책임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큰일이 나지 않게 하겠지만.
그도 그럴게, 나는 선생의 역할로 이곳에 온 거잖아? 아무리 장난이라도 학생의 목숨이 위험할 짓은 안 한다고.
아마도.
내가 결계를 해제할 준비하는 것을 본 라네즈가 아까처럼 두 팔을 벌렸다.
아무래도 머리가 휘날릴 정도의 선선한 바람을 기대하는 모양인데, 그러니 제대로 알려 줘야겠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결계 해제.”
라네즈의 오른발목을 잡으며, 결계 해제의 마법을 영창했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라네즈에게 쳐져 있던 얇은 검은 막이 벗겨져갔다.
그에 따라 라네즈의 얼굴도 기대감으로 채워져 갔으며, 입에는 함박 미소가 걸려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개였으면 필시 꼬리가 프로펠러마냥 회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있을 라네즈의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이 경악으로 바뀌는 것을 기대하면서, 마음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셋.’
“꺄아아아아아!!”
정확히 셋의 카운트가 끝난 뒤에 라네즈의 비명이 내 귀를 꿰뚫었다.
태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작고 앙증맞은 10살짜리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내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필시 저 멀리 날아가 버렸겠지.
강풍에 방향을 잃고 위태롭게 휘날리는 연처럼 그녀의 몸이 공중에서 이리저리 휘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파닥대는 물고기 같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라네즈가 느끼고 있을 바람의 세기에 효과음을 넣어보자면 콰아아아아! 정도려나.
라네즈의 비명 소리에 라헨느를 제외한 다른 애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 라네즈?!”
“괘, 괜찮은 거예요?!”
내 손에 발목을 잡힌 체 공중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라네즈를 본 세레나와 루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잡고 계시니 괜찮은 거겠지.”
레이 혼자만이 평온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우리가 위험할 만한 일을 벌이시겠어?”
“그건 그치만...”
레이의 말에도 세레나와 루아는 불안한 듯 공중에서 파닥이는 라네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빠, 빨리 내려 줘..!!”
강풍에 더는 버티지 못하겠는지 라네즈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 치마의 안을 보이는 건 싫었는지 치마를 꽉 눌러 잡은 상태였다.
“응~? 뭐라고?? 바람 소리 때문에 잘 안 들리는데??”
당연히 바람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고 라네즈의 비명은 너무나도 잘 들렸다. 강풍에 휘날리고 있는 그녀의 몸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다른 애들의 몸은 안전한결계의 안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경고를 무시하고 고생길을 선택했으면 고생길에서 돌아오기 위한 사죄의 말이 있어야 하는 법.
“들리는 거 아니까 빨리이이!!”
“~~♬”
내가 그녀의 말이 안 들리는 척 시간을 끌자 처음에는 꺅꺅대며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라네즈도.
“죄송해요..!! 라네즈가 잘못 했어요..!! 결계 풀어달라는 말 안 할 테니까 살려주세요..!! 더 이상 바람 맞기 싫단 말이야아아아..!!”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사죄의 말을 토해냈다. 마지막에는 거의 울부짖는 듯한 말투였지만 사죄에서 진심이 보이니 정상참작 해주기로 했다.
“흑... 흐윽...”
그렇게 땅으로 내려온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는 아침에 막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채로 강풍에 휘날리다 보니 눈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뺨은 강풍이 담고 있던 차가움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옷이야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었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어왔다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여기서 제대로 터졌다가는 라네즈가 삐져서 토라질 게 분명했기에, 겨우겨우 참아내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때. 한 번 더 체험해볼래?”
도리도리도리. 라네즈가 머리를 빠르게 저으며 강한 부정의 뜻을 표현했다.
“왜? 바람 맞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도리! 도리! 도리! 도리!
땋은 머리가 채찍이 될 정도의 속도로 머리를 젓는 라네즈를 보며 나는 더 이상 놀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이제 말 잘 들을 거지?”
라네즈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흑... 라네즈... 선생님 말 잘 들을 거야...”
“그래. 착하다. 자, 흥.”
“흥..!”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라네즈의 얼굴을 닦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만 빗을 가져오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는 어쩔 수 없었기에,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꽤 과격한 경험이었는지 라네즈는 그 이후에 계속 내 팔을 껴안은 채였다. 떨림이 내 몸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 몰래 웃음을 훔쳤다.
“저... 선생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에 다시 각자의 방식대로 여행을 즐기던 중, 연보라색 머리의 소녀, 세레나가 나를 불렀다.
안절부절하는 듯한 얼굴로 어딘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 자리가 불편해?”
“안 불편한 게 이상한 거 아니예요..?”
“다른 애들은 안 불편한 거 같은데?”
나는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돗자리가 깔려져 있었고, 그 위에 분홍 머리에 가슴이 큰 소녀, 루아와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흑발의 소녀, 레이가 앉아 있었다.
“어, 언니..! 이게 제 가문에서 보낸 잎으로 우려 낸 녹차인데... 릴렉스 효과가 좋다고 했어요..!”
“고마워. 잘 마실게.”
언제 가져온 건지 보온병에서 차까지 꺼내서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데서 준비성이 철저한 녀석이다.
“저 둘은 규격 외예요.”
“그러면 얘들은?”
나는 처음부터 내 무릎을 베개 삼아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뱉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 라헨느와 어느새 라헨느처럼 내 무릎을 차지하고 머리를 뉘어둔 라네즈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긴장이 풀려 잠이 들었는지 라네즈에게서도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나는 이 자세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만, 말랑말랑한 라헨느의 볼의 감촉을 마음껏 즐기게 해줬고 라네즈를 제물 삼아 장난을 치기도 했으니 몇 시간 정도 움직이지 못하는 거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다리에 쥐가 나는 건 미래의 나일 테니까.
그나저나 아까 그 소동에도 한 번을 안 깨네? 그만큼 피곤했던 건가?
아이는 잠이 많다고 하지만 언니가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조차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다니.
어찌 보면 제일 대단한 건 라헨느가 아닐까 싶다.
굳이 깨울 필요는 없으니 그대로 놔두도록 하자.
“...”
그녀들 중 제일 어린 라헨느가 자신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낮잠을 자는 모습을 보자 더는 투정 부릴 수단이 없었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물론 입을 닫았다고 불편함이 느껴지는 얼굴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지만.
세레나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녀석들이 비정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가 평범한 사람은 고사하고 귀족인 그녀로서도 쉽게 있을 수가 없는 장소인, 고대룡의 등 위였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