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성국 사크룸.(3)
* * *
“성국에 온 김에 선물을 사고 싶은데, 좋아하는 거 있어?”
“좋아하는 거요..?”
“응.”
갑작스럽게 맡은 총괄 대리로 고생하고 있을 아스모 씨를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레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현성.
서큐버스인 아스모 씨가 좋아할 만한 게 뭔지 잘 몰랐기에, 반은 서큐버스인 레이에게 묻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던 레이는 현성의 ‘선물을 사고 싶으니 좋아하는 게 있냐.’는 질문이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싶으니 말해 달라. 라는 의미로 들린 것이다.
현성에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던 그녀였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보통 선물을 고르라고 할 때는 몇 가지 후보를 들고 오지 않나? 그런 거 없이 좋아하는 것만을 묻는 거라면 선물을 받는 당사자가 내가 아닐 수도...’
양녀이긴 하지만 그녀 또한 왕성 귀족의 일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물 비슷한 것들을 많이 받아왔기에, 상대방에게 선물을 할 때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은 빙빙 돌려 말씀하실 분이 아니야. 선물을 보내고 싶은 대상이 있으시다면 누구인지 말씀하셨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고 내게 물어보신 이유는 괜히 고민해서 선물의 목록을 골랐는데 내가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면 선생님도 나도 불편해질 게 분명하니 처음부터 내가 고르게 시키시는 거겠지.’
“레이?”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레이의 모습을 본 현성이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불렀다.
“아, 네, 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 말씀이시죠?”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레이는 흠흠. 헛기침하며 뇌를 빠르게 굴려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을 탐색했다.
‘성국에서 뭐가 유명한지는 몰라 좋아한다고 말할 만한 게 없지만 모처럼 권유해 주신 거니까 잘 생각해봐야 해.’
그녀가 성국을 방문한 적은 10년 전에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를 받기 위해 그녀의 양아버지, 아이테르를 따라 방문했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성국에 대한 지식은 천신 네리아를 모시는 신전이 있다는 것과 성녀가 엄청나게 아름답다는 것뿐, 관광지로서의 성국은 잘 몰랐다.
‘먼저, 선생님의 금전 사정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까 너무 비싼 건 안 돼. 그렇다고 너무 싼 걸 고르면 눈치가 빠른 선생님은 분명 자신을 배려한다고 생각하시겠지. 그렇다면 적당한 걸 찾아야 되는데...’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린 채 고민에 빠진 얼굴로 쉬우면서도 어렵다고 말할 수 있는 적당한 것을 생각해내기 위해 중얼거리고 있는 레이를 보며, 현성은 생각했다.
‘너무 이른 시간에 물어본 건가?’
현성은 그들이 타고 온 고대룡의 등 위에서 레이와 루아가 나누던 성국에는 10년 만에 방문하는 거라는 대화를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니 당연히 성국에서 유명한 거라든가 성국에 왔을 때 눈에 봐뒀던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아직 성국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돌아가기 전에 사두는 선물을 골라보라고 했으니 나라도 저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겠다.’
현성이 만나려는 상대가 성국의 2인자인 성녀였기에, 그는 그녀를 만나려는 절차를 거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그동안 천천히 성국을 둘러보면서 고민하자고 생각했다.
“당장 생각이 안 나면 굳이 지금 말 안 해 줘도 돼.”
“네?”
현성의 말에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레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성국을 돌아보면서 정하자는 말이야. 당일치기로 온 것도 아니고, 급할 건 없잖아?”
“아...”
‘성국에 대해 잘 모르는 나를 배려해주시는 거구나.’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하자는 말이었지만, 레이에게는 성국에 대해 잘 몰라 선물을 고민하는데 오래 걸리는 그녀를 배려해 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네요. 천천히 둘러보다가 결정하면 되겠죠. 감사합니다, 선생님.”
갑작스럽게 나온 감사 인사에 현성은 고개를 기울였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게 뭐가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기에, 현성은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이내 별거 아니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데 저와 선생님, 이렇게 둘 만 돌아다니는 건가요?”
둘이서 하자는 얘기가 선물을 고르자는 얘기였기에, 단둘이서 성국을 돌아다니는, 한마디로 데이트하는 건가 싶어서 반쯤 기대에 찬 얼굴로 현성에게 묻는 레이.
“응? 아, 응. 왜인지 다 같이 가게 되면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제대로 고르지 못할 것 같거든. 그리고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것보다 두 명이서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네요... 확실히 다섯보다는 둘이 낫죠. 그렇고말고요...”
둘만의 데이트라는 생각에 현성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는 레이.
‘그리고 둘이서만 갈 곳이 있기도하고.’
그런 레이를 가만히 응시하며, 현성은 한창 고대룡을 타고 날고 있을 때 봐두었던 조금 특별한 장소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여왕의 요람...’
* * *
성국으로 향하는 실례스틴의 등 위에서 성국의 지도로 발키리들의 요양을 위한 성역을 탐색하기 위해 지도를 펼친 현성은 지도를 잡자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챌 수 있었는데, 바로 성녀의 신성력이 아주 조금이나마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성역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찍을 때마다 찌릿거리는 느낌이 몸을 타고 흘렀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거, 성녀가 직접 전해준 지도였지.’
4년 전, 그가 성국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성녀가 나중에 필요할 거라며 준 성국의 지도.
그때 당시에는 나중에 또 놀러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아공간에 넣어놓고 펼칠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지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자기 신성력을 아무 이유 없이 지도 안에 넣어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 현성은 이내 지도 속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게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지도에 조금씩 마력을 흘려보냈다.
‘..!’
그러자 성국의 북동쪽에 뻗어 있는 울창한 숲을 표시하는 나무들의 그림이 마치 살아 있는 나무들처럼 꿈틀대더니 이내 한 개의 단어가 나무들 사이에 생겨났다.
‘13번째 성역, 여왕의 요람?’
처음 보는 장소였다. 세상에 알려진 성역은 12개뿐이고, 성국에 있는 성역은 단 3개뿐이었으니까.
도대체 이 장소가 뭐길래 성녀의 신성력으로 숨겨놨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 그의 기억 속에서 성역에 관련된 기억을 찾던 중, 레이가 한창 아플 때 아이테르와 강낭콩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테르의 친구와 그의 아내인 서큐버스 퀸이 퀸을 노리는 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성역에 몸을 담았다고 들었던 기억.
어찌 보면 숨기는 게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장소.
‘설마 이곳은...’
아무래도 그가 지도에서 발견한 곳은 레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가정이 외부에 의해 무너지기 전까지 있었던 사랑의 보금자리인 모양이었다.
* * *
‘하지만 두 번째로 미뤄도 되는 걸까?’
레이를 가만히 응시하며, 현성은 생각했다.
지금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일 다 젖혀두고 그곳으로 향하자고 할 것이 뻔했고, 거절하더라도 그곳에 정신이 팔려 선물을 고르는데 소홀해 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현성은 선물의 일부터 처리하자고 생각해 그녀에게 여왕의 요람에 대해 말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찝찝함이 남기는 했다.
현성 자신에게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곳이지만 레이에게는 어렸을 적의 보금자리이자 부모님의 사랑이 담겼던 장소였다.
지금의 레이에게는 세상 어디보다 가보고 싶은 장소일 것이 분명했다.
그럴 텐데, 돌아가기 전 잠깐 시간을 내도 충분히 고를 수 있을 관광 선물 때문에 그 장소가 레이에게 어떤 의미일지 알면서도 나중 순위로 미룬다?
계속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먼저 들려야겠네.’
“선생님?”
가늘게, 반쯤 뜬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현성의 시선에 레이가 무슨 일이냐는 듯 물어왔다.
“응? 아, 미안. 너무 오래 보고 있었지? 네가 너무 예뻐서 그만.”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넘어가려는 현성의 술수에 빠져 버린 레이는 얼굴이 빨개진 체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선생님~!”
레이와의 대화가 끝을 맺음과 동시에 어느샌가 세레나 일행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올 거리까지 왔다. 그중 라네즈가 그들을 발견했는지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일단은 입국과 숙소가 먼저야. 그다음에 레이와 얘기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라고 생각한 현성은 그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고, 레이 또한 앞으로 있을 데이트의 기대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