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성국 사크룸.(4)
* * *
그런데 저와 선생님, 이렇게 둘만 돌아다니는 건가요?
응? 아, 응. 왜인지 다 같이 가게 되면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제대로 고르지 못할 것 같거든. 그리고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것보다 두 명이서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러네요... 확실히 다섯보다는 둘이 낫죠. 그렇고말고요...
“호오. 호오.”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생생하게 들려오는 현성과 레이의 대화에 세레나는 흥미로운 비밀 얘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성이 레이와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다며 그녀들의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그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듣고자 레이에게 설치해 둔 도청 마법 덕분이었다.
그녀와 현성 일행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똑똑히 들려오는 둘이서만 돌아다니자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세레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께 데이트를 신청하라고 조언을 드리긴 했지만 설마 선생님 쪽에서 먼저 권유를 하실 줄이야. 이거,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는데? 하지만 두 분이서만 돌아다니시겠다니, 어림도 없지.’
쿠흐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세레나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마냥 웃었다.
“세레나 언니. 얼굴이 이상해.”
그런 그녀를 보며 라네즈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쳐다볼 때의 얼굴로 올려다 봤다.
“어디 아파?”
“흠흠! 아무것도 아니야.”
헛기침하며 얼굴을 원상태로 되돌린 그녀는 현성과 레이의 데이트를 미행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미행하지? 두 분 다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라 평범하게 미행했다가는 바로 들킬 게 분명해. 기척을 지우는 마도구가 있다면 몰라도 방에 두고 와 버렸고, 변장하면 오히려 수상해 보일 것 같은데...’
감각이 좋은 그들을 상대로 어떻게 미행을 해야 할까, 계획을 짜던 중, 문득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굳이 미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10년 동안 복수만 보고 살아온 언니였다. 그랬던 언니가 이제야 조금 소녀다운 일들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자신은 응원해주질 못 할망정 미행이나 계획해서 재밌는 장면을 보려고 하다니, 동생으로서 실격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데이트하는 걸 지켜보다 보면 분명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언니의 소녀다운 모습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세레나의 안쪽에서 처음 보는 레이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과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언니의 첫 데이트인데 방해하면 되겠냐는 마음이 싸우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녀의 안에서 일어난 싸움은 현성과 레이의 모습이 보이는 위치에 다다를 때까지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은 이내 급격하게 한 곳으로 기울기 시작했는데, 손을 흔들고 있는 라네즈에 맞춰 레이 또한 그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본 직후였다.
“...”
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입에 그려져 있는 호선을. 앞으로 있을 둘만의 성국 관광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에 나 있는 미소를.
그 미소를 보자 지금까지 내면에서 싸웠던 것이 전부 다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조금 전까지 자기 욕망을 채우자고 사랑하는 언니의 즐거움을 망치려고 생각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세레나 언니?”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춘 그녀 때문에 잘 가던 걸음을 억지로 멈추게 된 라네즈가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이상해. 진짜 아픈 거 아니지?”
라네즈의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은 세레나는 이내 쓴웃음을 미소로 바꾸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가자.”
“아프면 바로 말해야 해?”
“그래, 그래.”
그렇게 라네즈와 함께 길을 걸으며, 앞으로 장난이나 그런 것들은 현성에게만 쳐야겠다고 다짐하는 세레나였다.
* * *
도착한 세레나 일행과 함께 성국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에게 향했다.
관문이 닫히기까지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덕에 기다리는 일없이 바로 입국 절차를 진행할 수 있었다.
성국의 입국 절차는 워프 게이트나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기사에게 보여주고 기사가 그것을 확인한 후에 통과시키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워프 게이트와 다를 게 없는데 어째서 빠른 워프 게이트 놔두고 고대룡을 타고 온 거냐.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성국의 관문이 워프 게이트와 다르게 보는 눈이 적어 소문이 퍼질 염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워프 게이트를 타기 전에 내 모험가 카드나 백야 출신임을 증명하는 펜던트를 들이밀었다가는 삽시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관심을 다 받을게 분명했기에, 보는 눈이 관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 둘밖에 없는 성국의 관문을 선택한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아까 말했듯이 신분을 증명할 게 필요하니까 미리 손에 들고 있어.”
“네~”
내 말에 각자의 가문의 증표를 꺼내 드는 소녀들. 그녀들을 따라 나도 세레나에게 되돌려 받았던 백야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펜던트를 손에 들었다.
그녀들의 인솔자 역할이니 그녀들의 앞에 서서 기사에게 향하자, 갑옷이 내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성국에 들어가길 원하는 분들이십니까?”
“네.”
“그렇다면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세상에 단 20명만 가지고 있는 ‘백강’으로 만들어진 펜던트를 보여 주었다.
“이, 이건?!”
그 펜던트를 보자 화들짝 놀라는 청백의 갑옷. 분명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 진짭니까..?”
“그럼 가짜로 보이세요?”
“시, 실례가 안 된다면 가까이에서 좀 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세요.”
그에게 펜던트를 건네주자 이리저리 돌려가며 펜던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 진짜다...”
아이돌의 사인이 담긴 한정판 시디를 손에 넣은 팬 마냥 후욱 거리며 펜던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하는 청백의 갑옷.
“무슨 일입니까?”
그런 그를 보고 관문의 왼편에 서 있던 기사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우리들 쪽으로 걸어왔다.
갑옷의 색이 우리의 입국 심사를 보고 있는 기사와 달리 전신이 파란색인 것으로 보아 그보다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보는 건 처음이라 당황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처음 보는 거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청백의 갑옷이 순청(?)의 갑옷에게 펜던트를 건넸다.
“이건...”
펜던트를 받아 든 순청의 갑옷 또한 백청의 갑옷처럼 이리저리 펜던트를 살펴보더니 이내 펜던트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모험가 카드를 줄 걸 그랬나.’
모험가 카드도 별 반 다른 반응을 보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렇게 시간을 끄는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한동안 펜던트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순청의 갑옷이 이내 그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이번엔 내 얼굴만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 갑옷의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금발 미녀 기사라면 몰라도 목소리부터 걸걸한 남성이었기에,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
“혹시 진현성님 아니십니까?”
갑옷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응?”
여기서 내 이름이 왜 나와?
기사에게 보여 준 건 백야임을 상징하는 펜던트뿐이었고, 펜던트의 어디에도 내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특정할 수 있는 건 20명 중 한 명일 터.
하지만 그는 펜던트의 주인이 나라는 걸 안다는 듯 바로 내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
물론 성국에 아는 얼굴이 여럿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신전이나 그 근처에서 일하는 성국의 주요 인물들뿐이었기에, 관문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저 아세요?”
“허허. 이거, 오랜만이라고 목소리마저 까먹으신 겁니까?”
나를 아는 듯 말을 하는 그에게 되묻자, 갑옷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갑옷의 투구를 벗었다.
“접니다, 저.”
투구가 사라지자 중년으로 보이는 백발의 남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이곳에서 관문이나 지키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분이세요?”
“아시는 분입니까?”
일면식이 있는 듯한 대화에 세레나는 내게, 청백의 기사는 그에게 물었다.
“당연히 알지.”
몰랐다면 방금같은 당황한 말을 흘리지 않았을 테니까.
“알다마다요.”
내 눈앞에 있는 중년의 아저씨는 1인자인 교황과 2인자인 성녀 다음으로 성국 내에서 입지가 높은 3명의 팔라딘 중 한 명인 페레우스 무러스였다.
이명은 ‘철벽의 페레우스’로 방어에 관해서는 그 아이테르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자랑하는 데다가 자상함까지 겸비해 성국의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다.
물론 다른 두 명의 팔라딘들이 인기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이 좀 특이한 사람들이라 특히 그에게 인기가 더 쏠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성국의 관문지기나 하는 모습을 봤으니 내가 당혹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신이나 되는 사람이 왜 관문지기나 하는 거야? 그리고 저 안의 사람들은 뭐 때문에 저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거고?”
한창 펜던트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슬쩍 고개를 돌려 관문을 넘어 성국의 안을 살펴보자,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갑옷들과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뭔 축제라도 하는 건가?”
“음? 혹시 모르고 오신 건가요?”
“뭘?”
내가 성국에 온 이유는 반지에 성녀의 마력을 담아 내가 무의식중에 내뿜는 마력으로 학생들이 악몽을 꾸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급히 온 여행이니만큼 당연히 성국의 사정에 대해 사전 조사를 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3일 뒤면 강림제이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