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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95화 (95/146)

〈 95화 〉 성국 사크룸.(5)

* * *

“3일 뒤면 강림제라고?”

“네.”

3일 뒤면 강림제라는 페레우스 씨의 말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운명이 장난이라도 친 건지, 타이밍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강림제.

천신 네리아가 지상에 강림했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지는 축제로, 성국 내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게, 어렸을 때부터 항상 신전의 안에서만 지내오던 성녀가 대외 활동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전에 주둔하는 성기사단이나 신전에서 일을 보는 사제, 신관, 수녀들. 그리고 어지간히 높으신 양반들과 몇몇 특이 케이스들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1년에 한 번뿐인 기회이니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성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관광객도 많이 몰리는데, 아마 내일부터는 지금처럼 대화할 시간도 없이 성국의 모든 관문이 관광객을 받느라 꽤 고생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국이 1년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기라는 건데, 하필이면 그런 시기에 성국을 방문했으니 타이밍이 나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물론 눈앞의 페레우스 씨나 다른 팔라딘들, 성녀와 교황과 일면식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일면식이 있는 나로서는 신전에 찾아가면 바로 성녀를 만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성녀나 다른 팔라딘, 혹은 수녀들에게 붙잡혀 강림제까지 시달릴 게 분명했다.

‘결국 강림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나.’

나로서는 최대한 빨리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강림제라는 상황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강림제가 끝날 때까지 성국에 머무르게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국의 숙소들에는 예약제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리 6명이 묵을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몰리는 건 내일이고, 미리 온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앞에 서 있는 성국 3인자의 힘을 빌리면 6명이 묵을 숙소를 잡는 것쯤이야 쉬운 일일 테니까.

“그래서 말이죠, 제가 관문지기를 하는 이유는...”

“인원 부족. 혹은 나이때문이겠지.”

정답이라는 듯 페레우스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물건을 옮긴다던가 장식물을 설치한다던가 하는 등 일손을 돕겠다고는 말했습니다만, 다른 형제님들께서 말리시더군요. 나이를 생각하라며 말이죠.”

배려에는 감사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보호를 받을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라고 말하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정도면 나이 생각해야 할 만하긴 해. 낼 모레 육십이잖아.”

“현성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이 내 뒤에서 어느새 자신들의 입국 절차를 마쳤는지 내 입국 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소녀들에게 향했다.

“그나저나 뒤에 계신 분들은... 왕성 귀족의 영애분들이시군요? 같이 오신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호오... 귀족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시는 현성님께서 웬일이랍니까? 게다가 그냥 귀족도 아닌 왕성 귀족의 영애 분들을... 혹시, 결혼 전 여행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페레우스 씨의 모습에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뭘 봐야 우리 일행이 결혼 전 여행을 온 일행처럼 보이는 건데?”

다른 애들이라면 몰라도, 라네즈와 라헨느 자매를 봤는데도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다.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자, 호탕하게 웃는 페레우스 씨.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저도 들은 게 있다 보니 아벨 왕국의 귀족 영애 분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계시는지 알고 있거든요!”

...알고 있는데도 그런 말했다 이거지? 나보다 연장자라 참는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귀족이나 높은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던 현성님께서 자진해서 귀족 영애 분들을 돌본다는 일을 맡으시다니.”

“자진해서 간 건 아니고, 거래를 좀 했거든.”

“그렇군요.”

거래에 대한 것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더 물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거래하니 갑자기 생각난 건데, 암부 이 녀석들은 어디서 뭐하는 거야?

내가 총괄 선생으로 부임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암부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아니, 모습이야 뒷세계 사람들이니 안 보인다고 쳐도 서신같은걸로 탐색 중간보고를 제출해 줄 수는 없는 거야?

설마 확실하게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건 아니지?

적어도 어디에는 없고 어디에는 비슷한 사람을 목격했고. 하는 등의 자잘한 정보들은 넘길 수 있는 거 아니야?

“선생님? 아직 안 끝나셨어요?”

그런 생각하며 성국의 일이 끝나면 레인 아르테미아한테 한번 말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세레나가 서 있었다.

“라네즈랑 라헨느가 배고프데요!”

세레나의 뒤를 보니 주린 배를 움켜잡은 듯한 모습의 라네즈와 라헨느를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레이와 루아가 달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슬슬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미안. 너무 오래 말했지?”

“하하하. 이거. 제가 현성님을 너무 붙잡고 있었나 보네요. 신분 확인은 마쳤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던 페레우스 씨가 우리의 앞길을 터주었다.

내가 내 뒤에 있는 그녀들에게 끝났다는 신호로 손짓하자, 쏜살같이 내 옆으로 달려온 쌍둥이가 내 손을 하나씩 잡더니 빨리 들어가자는 듯 보채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자, 빨리! 배고파!”

“나도... 배고파...”

“알았어, 알았어. 그 전에.”

보채는 쌍둥이들을 달래며 페레우스 씨에게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해도 될까?”

“제게요? 물론 되고 말고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드릴 테니 말만 하시길.”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에게 맡겨만 달라고 말하는 그에게 우리 6명이 묵을 만한 숙소를 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숙소 말씀이시죠?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갑옷을 철그럭거리며 근처의 나무 오두막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간 페레우스 씨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오더니 내게 종이를 두 장 건네주었다.

“이건?”

“제 딸이 운영하는 숙소의 위치와 제가 보냈다는 것을 증명할 추천서 비슷한 것입니다. 원래는 내일부터 열기로 했습니다만, 이걸 딸아이에게 보여 주시면 오늘부터 묵으실수 있게 해드릴 겁니다.”

“딸이라면, 소피아?”

“네. 현성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아이이긴 합니다만, 4년이나 지났기도 해서 혹시나 못 알아볼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에 그 종이를 드린 겁니다. 자, 그럼.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배고픈 아가씨들에게 혼이 날 수도 있으니 어서 가시길.”

“혹시나 묻는 건데, 공짜는 아니지?”

“저희도 먹고살아야하니까요.”

싱긋. 중년미 넘치는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나 또한 피식.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관문을 통과해 페레우스 씨가 말해 준 숙소로 가려던 찰나.

“저, 저기..!”

“응?”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맨 처음 내 입국 절차를 밟아주던 청백의 기사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나를 향해 내밀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페레우스 씨와 대화를 나눌 때부터 어딘가 사라졌다 했더니만, 사인을 받기 위한 종이와 펜을 가지러 갔던 모양이었다.

“사인이요..?”

“오~ 선생님~! 사인 요청도 들어오시고, 엄청난 인기인이신데요?”

세레나가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팔로 툭툭 쳤다.

“인기인이라면 인기인이겠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세우신 분들 중 한 분이시니까.”

“여, 역시 대단하세요..!”

"..."

레이와 루아가 거들 듯한 한마디를 대충 흘려들으며 레이에게 페레우스 씨가 건네준 종이를 건넸고, 대충 위치는 외워뒀으니 먼저 숙소로 들어가 있으라고 손짓 했다.

그나저나 사인이라니. 계약서 같은걸 작성할 때 빼고는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보다 왜 내 사인을 받으려 하는 거지? 내가 다른 나라에 있다는 유명한 아이돌도 아니고 사인을 받아서 어디다 쓰려고?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실례라고 생각해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페레우스 씨가 내 고민을 지워주었다.

“이 분, 이번에 들어온 신입분인데 말이죠. 백야의 열렬한 팬이거든요. 집에는 백야에 관련된 서적들이 책장을 가득 채운 것도 모자라 백야에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좋다구나 하고 ”

청백의 갑옷의 어깨에 팔을 올린 페레우스 씨가 껄껄 웃으며 청백의 갑옷을 툭툭 쳤다.

그래서 처음에 백강으로 만든 펜던트를 봤을 때 엄청나게 동요했던 거구나. 팬이던 아이돌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느낌이려나?

그 느낌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종이와 펜을 받아들였다.

“당신, 이름은?”

“아, 네! 토마스입니다!”

“토마스에게... 현성이...”

종이에 대충 내 이름 석 자를 휘갈겨 쓰고 그 밑에 토마스에게 현성이라고 쓴 종이를 그에게 건네주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는 청백의 갑옷, 토마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가보는 좀 더 소중한 거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갑옷 밖으로도 느껴질 만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구태여 말하지 않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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