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여왕의 요람.(1)
* * *
“선생님. 어디부터 들릴 건가요?”
왜인지 들뜬 표정의 레이를 보며, 나는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정말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도 되는 걸까?
지금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갈 곳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픔 그 자체인 장소라고 봐도 무관한 곳이었다.
과연 내가 그녀의 아픔을 꺼낼 자격이 되는 걸까?
내가 레이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행복하다는 것을.
부모의 복수도 했고, 억제제에 의존하던 아픈 몸도 고쳤다. 마음이 얼어 버린 사람처럼 차갑던 얼굴도 지금처럼 부드럽게 변했다. 감정의 풍부함이 더 늘어나 보였다.
그러니 굳이 마음속에 깊이 묻어둔 과거의 아픔을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
왜 가만히 있냐는 듯 레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멍하니 서서. 뭐 놓고 온 거라도 있으신 거예요?”
하지만 봐버린 이상,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내가 안 데리고 간다고 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행할 일일 것이다.
앞으로의 일은 앞으로의 내게 맡기면 되겠지. 지금의 내 역할은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뿐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목표로 한 장소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가자.”
“네!”
여왕의 요람을 향해.
* * *
지도에 숨겨져 있던 곳이자 13번째 성역인 여왕의 요람.
성녀가 신성력을 사용하면서까지 숨기고 싶었던 장소.
아니. 어쩌면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숨기고 싶었다면 성역으로 지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지도에 표시하지도 않았을 거고.
지도에 따라 북동쪽 관문을 넘어 관문지기의 인사를 받은 뒤에 목표로 잡은 곳, 여왕의 요람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선생님?”
“왜?”
“선물을 사러 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사러 갈 거야. 다만, 먼저 들렀다 갈 곳이 있어.”
“이런 숲예요?”
주변을 둘러봐도 높이 자란 나무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햇볕이 간간이 들어오고 있어 춥지는 않았다.
가끔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들어댔다. 싸아아.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선물을 사거나 관광하러 가는 길은 아니었기에, 레이의 의문도 이해가 갔다.
“있어 그런 게.”
차마 너와 관련된 곳이니까.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레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흐음.”
지도를 펼쳐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했다. 앞으로 조금이었다.
“다리 아프지는 않지?”
숲에 들어온 지 대략 30분 정도 흐른 느낌이었다. 가녀린 다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이곳에 오기 전에 아침 운동하고 온 그녀로서는 다리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 걸음은 일상이니까요. 오늘은 선생님하고 데, 데이...”
“데이?”
“아, 아뇨! 빨리 돌아다니고 싶어서 평소보다 적게 운동했다는 말이었어요!”
빨개진 얼굴로 손을 파닥거리는 레이의 모습이 퍽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저 멀리 통나무집이 보였다.
‘저긴가.’
지도를 펼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통나무집과 우리의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신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구십니까?”
통나무집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그때,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하얀 로브를 입은 몇몇 사람들이 땅으로 착지했다. 나무의 위에서 우리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충 봐도 10명은 넘을 것 같았다. 게다가 느껴지는 마력은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실력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소 A랭크 모험가 급은 되어 보였다.
“당신들은?”
내가 묻자, 로브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가 이곳의 책임자인 것 같았다.
“저희는 성녀님의 직속 친위대, 하얀 장미입니다. 성녀님의 말씀에 따라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성녀와의 첫 만남 때 신전을 가출한 성녀를 찾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로브를 입고 있지 않았는데, 왜 이번에는 입고 있는 거지?
“이곳은 아무나 출입시키지 말라고 성녀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길을 잃으신 거라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만, 성역을 침범하고자 하는 자라면...”
물어볼 새도 없이 갑자기 살기를 내뿜기 시작한 그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메이스. 철퇴. 신성력이 발라진 은빛의 검. 등등 성국의 기사단이 사용하는 무기들이었다.
“선생님, 어쩌죠?”
우리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하얀 로브들을 보면서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성녀의 친위대라고 밝힌 이상 그들과 무력적인 마찰을 빚었다가는 성국과도 안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괜찮아. 그냥 내 뒤에 있어.”
그런 레이를 괜찮다는 말로 달래며 들고 있던 지도를 로브의 남성에게 건넸다.
“이건?”
“성국을 기준으로 북동쪽 숲. 지금 우리가 있는 곳.”
지도를 받아 든 남성이 내가 말한 곳을 살피려는 듯 고개가 움직였다.
“이건...”
잠깐이었지만 그가 동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고개가 잠깐 한곳에 머물러있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확실히 어디로 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도는 당신이 발현시킨 겁니까?”
“응. 성녀의 마력을 느끼고 마력을 넣었더니 지도에 나타나던데?”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하나 더.”
“서, 선생님?!”
내 뒤에 있던 레이의 손을 잡아끌며 나와 로브의 남성 사이로 이끌자, 레이가 놀란 듯 당황한 소리를 흘렸다.
“얘라면 지도 없이도 충분한 출입증이 되지 않겠어?”
내 말에 남성이 레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 레이님이십니까?”
로브의 남성에게서 자기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듯 나를 돌아보는 레이. 나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도 된다는 얘기였다.
“네. 제가 레이. 레이 데 르니아인데... 왜 그러세요?”
레이가 자기 본명을 밝히자 로브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저분이 레이님이라고?
진짜야? 얼굴을 바꾼 거 아니야?
하지만 진짜면 우리가 이렇게 막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들의 동요에 레이는 더욱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용.”
남성의 말에 일순간 동요가 멎으며 고요해졌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소리만이 들려왔다.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저희도 확실히 해야 하므로 실례가 안 된다면 가문의 인장을 보여주실수 있으시겠습니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레이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안심하라는 얼굴로 보여주라는 말과 함께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여기요.”
품속에서 르니아 가문의 일원임을 뜻하는 황금색의 호랑이가 그려진 인장을 꺼내 로브의 남성에게 건네는 레이.
인장을 손에 쥐고 유심히 살피던 그는 이내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는지 다시 레이에게 돌려주었다.
“이 정도면 자격을 갖춘 거라고 봐도 되지?”
“모두 무기를 거두세요.”
남성의 말에 다들 방금까지 내뿜던 살기와 꺼내고 있던 무기를 집어넣었다. 이제 좀 분위기가 편해졌다.
“그러면, 가도 되지?”
“너무 어지럽히지는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남성이 고개를 숙이는 것을 신호로 로브의 대형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갈라섰다.
“글쎄. 약속은 못 하겠는데.”
지금 우리가 향하려는 장소가 어떤 장소인지 알게 되었을 때의 레이의 모습은 나도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만약 너무 많이 어지르게 되면 복구마법을 써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렇게 말한 뒤에 아직도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는 얼굴을 하는 레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 * *
통나무집을 향해 걸어가던 중, 레이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 방금 있었던 일은 도대체 뭐예요? 저분들은 누구고, 또 왜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으며 저를 알고 있는 거죠?”
궁금한 게 많을 만 했다.
나라도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살기를 내뿜으며 무기를 꺼내 들고 자기 이름을 물으며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을 보면 지금의 그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얼굴로 답을 알 만한 사람에게 물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대답의 시기가 아니다.
“이따가 다 설명해 줄게.”
어느샌가 통나무집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여긴?”
이런 숲속에, 그것도 사람이 지키고 있는 곳에 통나무집이 있는 게 신기했는지 레이의 고개가 여기저기로 돌아갔다.
“이 안에 계신 분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누군가가 지킬 만한 사람이 사는 곳이라 생각했는지 레이가 물었다.
빨랫줄에는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으며, 그루터기에는 장작패기용 도끼가 꽂혀 있었다.
근처의 나무에는 그네가 걸려 있었고, 통나무집의 근처에는 장작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확실히 사람이 산다고 믿을 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집 안에서 인기척이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언젠가 이곳을 찾아올 이가 기억하기 쉽게 평소의 생활대로 꾸며놓은 것이겠지.
하지만 레이는 그것을 모르는 듯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집의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집 밖의 구현도가 꽤 높았으니 분명 집 안은 집 밖보다 더 하겠지.
통나무집의 문을 열려고 하자.
“노크는 안 해도 되는 건가요?”
“괜찮아.”
어차피 주인은 너니까. 아니. 너희였으니까.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 레이를 먼저 들여보냈다.
아무도 없는 게 신기하다는 듯 천천히 집의 안으로 들어가는 레이를 보며.
부디 그녀가 많이 아파하지 않기를.
조용히. 마음속으로 빌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