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여왕의 요람.(2)
* * *
* * *
“응?”
통나무집의 안으로 들어간 레이는 현성이 자신을 따라 들어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현성이었기에, 필시 이곳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성에게 묻기 위해 다시 통나무집의 밖으로 나가려 발걸음을 돌리려던 레이였지만, 조금 전 있었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라 발걸음을 멈췄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하얀 로브의 사람들.
이곳에 온 게 현성 자신의 일 때문이 아닌 그녀를 위해 온 거라고 말하는 듯한 현성의 태도.
분명 처음 왔을 통나무집 근처의 풍경에서 느껴지던 익숙한 느낌.
‘일단둘러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현성이니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왜인지 집 안을 둘러보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무로 만든 식탁이었다.
식탁의 위에는 그릇이 3개가 놓여 있었으며 그릇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 포크와 나이프가 놓여져 있었다.
‘3명분의 식기가 놓여져 있는 거로 봐서 3인 가구인가?’
오늘 저녁은 스튜야!
“윽?!”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와 느껴지는 두통에 레이의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테이블을 잡아 몸을 지탱하는데 성공했지만, 두통은 여전했다.
이어, 기억에 없는 장면이 마치 영화가 재생되듯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3명의 사람들. 그중 가운데에 앉아 있던 흑발의 소녀가 음식 투정을 하며 입을 내밀고 있었다.
또 스튜야? 고기 먹고 싶어 고기!
그래? 그러면 내일은 고기 먹을까? 우리 딸이 먹고 싶다는데 먹어야지!
와아! 아빠 최고!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짓는 흑발의 소녀의 모습을 끝으로 화기애애하던 그들의 모습은 증발하듯 사라졌고,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차가운 식탁만이 남아 있었다.
‘방금 뭐였지?’
어느새 두통은 멎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왜인지 집안을 더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침실이었다. 침대가 하나만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 전부가 한 침대에서 자는 것 같았다.
꺄악! 번개!! 번개 싫어!! 무서워!!
다시 한번 들려오는 목소리. 이번에도 소녀의 엣 된 목소리였다.
또다시 두통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가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금발의 남성이 오른쪽에는 흑발의 여성이. 그리고 가운데에는 흑발의 소녀가.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천둥을 동반한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번개가 싫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소녀를 남성과 여성이 귀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아빠와 엄마가 있는 이상 번개는 우리 딸을 해치지 못 해요~!
삐져나와 있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금발의 남성이 소녀를 달랬다.
정말..?
눈만 살짝 이불 밖으로 내민 흑발의 소녀가 진짜냐는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아빠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니?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숨바꼭질 할 때 장롱에 숨었다 해 놓고 다른 데 숨었잖아!
윽.
아하하! 그건 당신이 잘못했네!
깔깔대며 웃는 흑발의 여성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촛불에 바람을 분 듯 방금까지 보였던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딱딱한 침대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두통도 사라졌다.
‘도대체 뭐지? 아까부터 이상해...’
통나무집의 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겪는 이상한 일들에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녀의 발걸음은 집 안을 더 둘러보라는 듯 움직일 생각하지 않았다.
‘장롱...’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던 장롱이라는 키워드에 레이의 눈이 근처에 있던 장롱으로 향했다.
분명 방금까지 장롱의 문이 닫혀 있는 걸 확인했는데, 어느샌가 장롱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엄마?
흑발의 소녀가 자신을 장롱 속에 내려놓는 흑발의 여인을 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윽..!”
이번엔 두통이 아니었다. 가슴을 옥죄는 듯한 통증에 그녀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여기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숨바꼭질이야?
재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 소녀를 보며 여인 또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응, 숨바꼭질이야. 그러니 못 찾겠다고 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한다?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린 소녀로서는 알 리가 없었던 슬픔이 가득 담긴 울적한 미소였다.
금방이라도 울 듯 그녀의 미소가 흔들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들키기 싫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아아...”
가슴이 미어지며 고통이 계속해서 레이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흑발의 여인이 장롱 문을 닫았다. 하얀빛과 함께 장롱이 완전히 봉쇄됐다는 뜻으로 빛의 사슬이 장롱을 휘감았다.
미안 해, 레이. 엄마랑 아빠가 더 이상 놀아주지 못 해서. 그리고...
사랑해.
성냥불로 만들어진 환상이 꺼지듯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윽... 흐으윽...”
하지만 가슴의 미어짐은 그대로였다.
그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이곳이 현실 속 악몽의 세계라는 것을.
* * *
레이를 통나무집의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근처의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왜인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 한 번도 담배에는 손을 대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같이 들어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책임자로 보이는 하얀 로브의 남성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딱히 저 집에 볼일이 없어서.”
저 통나무집에 볼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레이다. 그것도 보통 볼일이 아닌 과거의 아픔을 꺼내는 정도의 일이었다.
“꽤 매정하시군요. 보아하니 저 집이 레이님께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서 전부 들었으니까. 그리고 레이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았을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그러니까 안 들어가는 거다.”
지금은.
“성녀님께 듣기로는 손해 보는 역할을 맡지 않으신다고 하시던데, 그것도 아닌 것 같군요.”
“나를 알고 있어?”
로브의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한 날 사진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으니까요. 이때는 얼마나 멋있었고, 저때는 얼마나 훌륭했는지 등등...”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면 그냥 들여보내줄 것이지.”
귀찮게 지도나 꺼내게 하고 말이야. 가뜩이나 여기 주변에서 느껴지는 신성력 때문에 따끔거릴 지경인데.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레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큭큭. 후드의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 대해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되는 건 확인해야 한다는 건가.
“훌륭한 성기사시구만.”
“칭찬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로브의 남성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성국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이곳을 찾아오는 게 원래의 목적이 아니신 것 같은데. 마력을 억누르고 계신 것과 관계가 있으신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위화감을 못 느낄 정도로 마력을 잘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들킨 건가.
“성녀의 마력을 담은 반지를 만들려고. 당신의 말대로 내 자신이 억누르는 거에는 한계가 있어서 말이지.”
다만 강림제가 끝난 뒤에. 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강림제가 끝난 뒤인가요? 지금 당장 신전으로 찾아가도 성녀님께서 맨발로 맞이하러 나오실 텐데요.”
“그래서 안 가는 거다.”
강림제는 1년에 한 번 있는 성국의 가장 큰 축제다. 성국의 사람들이 축제의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소리였다.
하물며 강림제의 주축이라고 할 수도 있는 성녀는 어떻겠는가. 분명 그녀가 처음으로 성녀가 돼서 맡았던 강림제 때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어떻게 되겠어? 분명 나한테만 신경 쓰느라 강림제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할 거고 1년에 한 번뿐인 대축제를 망치게 되겠지.
게다가 이번에 내가 깨뜨린 반지는 성녀가 장차 8시간이나 신성력을 쏟아 부어서 만들어 준 반지다.
강림제가 코앞에 다가온 만큼 고작 반지 하나에 시간을 쏟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강림제가 끝난 뒤에 그녀를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절대 지금 성녀에게 갔다가 성녀에게 반지를 깨부쉈다는 일을 추궁당해 그녀에게 휘말려 강림제의 준비를 돕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다.
겸사겸사 나도 강림제라는 걸 즐겨보기도하고. 7년 전이고 4년 전이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제대로 즐기지 못 했단 말이지.
“그렇군요.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은데요.”
“응? 왜?”
성국의 결계라는 특수한 것이 있는 이상 성녀가 마력을 탐지해서 내가 성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 할 것이다.
알아차렸다면 어젯밤에 몰래 신전을 빠져나와서 내가 머무는 여관으로 왔을 테니까.
“저희는 성녀님의 친위대이지만 친위대 일하지 않을 때는 성기사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죠.”
“고생하네. 그런데 그게 왜?”
“오늘 이곳을 지키는 일하기 위해 교대하기 전, 기사단 훈련소가 시끌시끌하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봤습니다.”
“응.”
뭘까. 이 불안한 기분은.
들으면 들을수록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 근처의 기사에게 물어보니, 토마스라는 신입 성기사가 백야의 일원 중 한 명한테 사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짜 백야의 일원이 맞는지 얘기하고 있었답니다.”
“...”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그렇군요. 라며 간단히 대꾸하고 교대를 위해 이곳으로 향하던 중, 플뢰르님을 마주쳤습니다.”
“플뢰르? 그 세 명의 팔라딘 중 한 명인 섬광의 플뢰르 말하는 거야?”
“네. 아무래도 기사단원들의 훈련을 위해 훈련장으로 향하던 도중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녀라면 기억에 있다. 은색의 말총머리를 휘날리며 나를 볼 때마다 맨손대련 한 번만 해 달라며 졸라댔었으니까.
9번 덤벼서 9번 다 졌었지. 물론 그녀가.
그리고 다른 여타 팔라딘 들처럼 성녀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아마 여기서의 일이 끝나고 성국으로 돌아가시면 거리를 휘젓고 있는 기사단원들을 만나실수 있으시겠죠.”
“하아...”
고작 사인 한 장에 그렇게 스노우볼이 굴러간다고?
운명의 신이라는 놈이 눈앞에 있다면 한 대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명을 관장하는 신은 성국의 신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악!!!”
그때, 집 안에서 레이의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그때와 똑같은, 악몽을 꿨을 때의 소리였다.
“아무래도, 기억이 돌아오셨나보네요.”
“그러게.”
짧게 대꾸하고, 그루터기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악몽에 빠진 소녀를 구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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