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성국 사크룸.(8)
* * *
“선생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나요.”
레이를 업고 성국으로 돌아가던 중, 레이가 내게 물었다.
“왜 이곳에 올 때는 평범하게 왔으면서 돌아갈 때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가는 거냐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지금 나한테 궁금할 만한 게 얼마나 있겠니. 여하튼, 우리가 굳이 로브까지 빌려 가며 가는 이유는...”
“이유는..?”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면 알게 될 거야.”
“뭐예요, 그게!”
60초 뒤에 공개합니다!를 봤을 때의 나처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는 레이.
“하하하하.”
나는 그저 웃지요를 시전하며 적당히 넘겼다.
그렇게 대화가 끝난 뒤에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아침에 우리가 지나왔던 성국의 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슬슬 관문인가. 이 로브가 통해야 할 텐데.’
관문을 통과하려면 얼굴의 확인은 필수였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알고 있는 플뢰르에 의해 성국의 모든 기사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고, 그런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데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건 ‘나 여기 있으니 잡아가세요~’ 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는다.
나와 레이가 뒤집어쓰고 있는 이 로브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빌려온 로브로, 성국의 2인자인 성녀의 친위대의 일원임을 뜻하는 로브였다.
팔라딘 급의 권력은 없지만 관문지기나 나를 찾고 있는 성국의 기사들의 눈을 속이기에는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처럼 레이를 업고 가기에는 조금 수상한 점이 많으니 슬슬 다리에 힘이 돌아왔기를 빌며 레이를 불렀다.
“레이.”
“왜 부르세요?”
레이가 뾰로통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도 아까 전에 놀린 걸로 삐져 있는 것 같았다. 혈액형 검사하면 분명 A형이 나올 것 같다.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성국의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될 거라고 아까 말하긴 했지만, 그냥 지금 말해 줄게.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가고 있는지.”
움찔. 레이의 몸이 떨리는 것이 내게 느껴졌다.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지금, 성국의 안은 나를 찾는 성기사들로 널려 있을 거야. 아니, 널려 있어.
“선생님을 성기사들이 찾는다고요? 왜요?”
“나를 신전에 데려가기 위해서지.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게.”
“잘못한 게 있으신 건 아니죠? 성국에 수배를 당했다던가...”
“수배를 당했으면 내가 여기 왔겠니?”
그건 그러네요. 라며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레이. 다리에 힘 돌아왔지?”
움찔. 레이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게 내 몸을 타고 느껴졌다.
“아, 아뇨? 아직도 힘이 안 들어가는데요..?”
이제는 목소리까지 떨린다. 거짓말을 참 못 하는 녀석이다. 이럴 땐 좋은 방법이 있지.
“여기서 여관까지도 못 걷겠어? 치유 마법이라도 써봐야 되나... 아니면 정신 계열 마법..?”
그녀의 거짓말을 못 알아차린 척 그녀를 걱정한다는 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며 힐끗, 그녀를 바라보자 내게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에 양심이 찔리는 듯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업혀 있고 싶은데... 하지만 선생님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고... 으으... 어떡하지..?”
다 들린다 이것아. 자기 딴에는 분명 중얼거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여기서는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예의였기에 ‘상처를 입은 학생을 걱정하는 선생님’의 연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뭐, 아직도 아프면 어쩔 수 없지. 관문지기나 성국 안의 기사들에게 의심을 받아도 내가 잘해결할 테니까, 계속 업혀 있어. 괜히 무리했다가 더 다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평소보다 느리게.
“으... 으으...”
레이의 내면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속인 체 내 등을 계속 차지할 것인지, 아니면 양심있게 다 나았음을 밝히고 내려올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면의 싸움이 끝났는지 레이가 입을 열었다.“
“내려주세요...”
아무래도 이긴 건 양심 쪽인 것 같았다.
“진짜? 진짜로 걸을 수 있어? 괜히 나 배려해준다고 오기부리다가 아까처럼 허수아비 마냥 쓰러지지 말고.”
충분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 몰래 다리를 주물거림으로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괜찮아요! 진짜로 걸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레이를 업을 때처럼 쭈그려 앉으며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녀는 한동안 균형을 잡는 듯 비틀거리더니, 이내 똑바로 서는데 성공했다.
“돼, 됐어요!”
“되긴 뭐가 돼. 걸어봐.”
아까처럼 넘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녀를 지켜봤지만 다행이 내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잘 걸어 다녔다.
뭔가 걸음마를 막 떼려는 아기를 보는 부모님이 된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됐어. 가자.”
“네!”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내 옆으로 다가오는 레이. 그런 그녀의 모습이 퍽 귀여워 나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웃었다.
* * *
“그럼 수고하십시오!”
기사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관문을 지나 성국의 안으로 진입했다.
‘이 로브, 짱 좋은데?’
후드를 벗어 얼굴을 보이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관문의 기사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수, 수호자님!’ 하면서 경악한 얼굴을 보여주더니 아무 제재 없이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권력 만세다.
성국의 안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시끌시끌했다. 강림제가 내일모레였기에, 그로 인해 온 관광객들로 인해 거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성국의 안에 넘치는 건 활기뿐만이 아니었다. 여기도, 저기도, 어딜 둘러봐도 청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2명씩 짝을 이루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고, 무언가를 찾는 듯 근처의 사람들에게 가더니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머리를 가리키며 ‘검은 머리의 남성’이라던가, 키를 가늠하는 듯 ‘이 정도 크기의...’ 라며 팔을 뻗는 모습을 보아하니 로브의 남성의 말대로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로브를 빌려오길 잘했어.’
강림제가 끝나면 반드시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빌려온 로브. 이 로브가 아니었다면 필시 저 기사들 중 한 명에게 정체를 들켜 지금 당장 신전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제발 같이 가달라는 둥, 내가 안 따라가면 자신들이 혼난다는 둥 해서 말이다.
그들이 혼나든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였지만, 붙들리는 귀찮음을 감당하긴 싫었기에 그들을 피해 안전하게 여관으로 대피하고자서 로브를 빌려온 것이었다.
‘좋아. 조금만 더 가면 여관이다.’
조금 전 천신 네리아의 동상을 지났으니 여관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저기, 혹시 수호자님이십니까?”
왜 항상 위기는 끝에 찾아오는 걸까. 철벽의 요새라고 써진 간판이 보일 정도였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가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선생님... 어쩌죠..?”
레이가 들킨 거 아니냐는 듯 내게 속삭였다.
“걱정 하지마. 수호자라고 부르는 걸 보면 들킨 건 아닐 테니까. 유도리 있게 잘 넘어가면 돼. 그러니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 테니까.”
나 또한 그녀에게 속삭인 다음에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자, 청백의 갑옷 2개가 우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혹여나 내 목소리를 아는 사람일 경우를 대비했다.
“일이 있으실 텐데 불러 세워서 죄송합니다. 팔라딘께서 내리신 명령이라 부득이하게 실례를 범할 수밖에 없는 점, 양해해주시길.”
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혹시, 흑발에 수호자님 정도 되는 키에, 귀족 소녀들하고 같이 다니는 남성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누가 봐도 나를 지칭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동요했다가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기에, 나는 잠시 생각한다는 의미로 턱을 문지르며 흐음... 하는 소리를 흘렸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 아까 동쪽 관문 근처에서 본 것 같습니다. 귀족 영애 두 분하고 같이 걸어가더군요. 귀족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 기억에 남았죠.”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가, 감사합니다! 충성! 가자!”
경례를 빠르게 마친 기사들이 경례를 할 때처럼 빠르게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잘 속여 넘긴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짓말, 잘하시네요?”
레이가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이것도 다 로브의 힘 덕분이니까.
* * *
딸랑. 기사들을 속여 넘기고 돌아온 우리를 여관의 종소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카운터에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하고 있던 소피아가 로브를 뒤집어쓴 우리를 보더니 영업 시작 전에 온 손님이라고 착각했는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라? 수호자분들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손님이 아니라 수호자라고 착각한 거였구나.
“아, 우리야, 우리.”
후드를 넘겨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로브의 남성이 나임을 확인한 소피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성님? 현성님이 왜 수호자분들만 입을 수 있는 로브를 입고 계세요?”
“사정이 있었어.”
“훔치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보다, 다른 애들은?”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성국 관광을 여지없이 즐기는 중인 것 같았다. 아마 돌아왔을 때 양손에 기념품을 한가득 안아 들고 오지 않을까.
“그렇구나. 고마워.”
소피아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 참, 현성님!”
소피아가 말을 하는 걸 잊은 거라도 있는지 나를 불렀다.
“왜?”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요... 저기...”
소피아가 평민의 집에 국왕이나 높은 사람이 방문했을 때 같은 불편했지만 불편함을 내비칠 수 없는 얼굴로 한 곳을 흘낏거렸다.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언제쯤 눈치채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주인 아가씨가 눈치를 줘야 알아채다니 자네도 많이 죽었구먼?”
“제대로 된 싸움이 4년 전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않겠나.”
“최근 들어서 몇 번 더 싸우신 것 같은데요?”
“그래 봤자 마왕만 하겠나.”
“그건 그러네요.”
테이블의 구석진 자리에서, 우리를 보며 떠들고 있는 4명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본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들이 왜 여기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