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뜻밖의 손님.
* * *
“당신들이 왜 여기 있어..?”
철벽의 요새라는 이름의, 여관의 이름이라기에는 조금 그런 면이 있는 여관의 안에서,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테이블을 차지하는 4명의 남성을 본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안 올라오세요?”
먼저 방으로 올려 보냈던 레이가 내가 그녀를 따라 올라오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생각한 듯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익숙한 얼굴의 남성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의 손님들하고 눈이 마주쳐 버려서 말이야.”
물론 마주치고 싶어서 마주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피아 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손님이요?”
내 손가락을 따라 레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데요?”
하지만 어두운 구석에 있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 했는지 고개를 기울이다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레이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구석진 자리에 있었나 보군.”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아서 여관의 빛이 닿지 않으니 그렇죠. 그러니 조금 더 앞으로 가시죠.”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4인의 실루엣이 일어서더니 전등의 범위 안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게 처음부터 밝은 곳에 있자고 하지 않았나.”
“하하하! 그래도 왠지 악당 같아서 좋지 않습니까!”
“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자 레이의 동공이 확장되더니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당황한 소리를 흘렸다.
“어... 어..?”
무어라 할 말을 잃은 체 어... 만 반복하는 레이. 그녀의 확장된 동공은 쉽게 축소될 생각을 하지 않아 보였다.
‘어지간히 놀랐나보네.’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레이를 포함해 같이 성국에 온 그녀들의 아버지들이자, 공작 이상 국왕 미만의 권력을 가진 왕성 귀족 4가문의 가주들이었으니까.
나조차도 그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오죽할까.
“음.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저렇게 놀랄 일인 건가?”
금발의 중년남성이 갈색 머리의 청년에게 물었다.
“충분히 놀랄 만 하죠. 한창 각자의 저택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어야 하는 우리 가주들이 성국에 와 있는 걸 봤으니까요. 페레우스 씨가 유도리 있게 처리해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관문에 있었을 걸요?”
“따라오고 싶다며 따라온 건 자네들이 아닌가. 나 혼자 왔다면 검문을 할 필요 없이 바로 통과시켜줬을 걸세.”
금발 중년의 말에 자색 머리의 중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그저 하이네로부터 세레나가 그를 따라 성국에 왔다는 말을 듣고 온 것뿐일세. 그저 자네가 간다기에 마차를 같이 탔을 뿐, 딱히 자네를 따라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 정정해줬으면 좋겠군.”
딸 바보 납셨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현성님!”
내 귀를 아프게 할 정도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반갑다는 듯 인사하는 백발의 남성.
“오랜만.”
대충 맞춰서 인사를 해주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를 하던가 하지 그래?”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저들의 대화가 만들어 내는 혼돈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등장은 멋있게 해 놓고 우리들끼리만 너무 떠들었나보군. 일단 앉지.”
전혀 멋있지 않았는데. 로켓단도 당신들보단 멋있게 등장하겠다.
근처의 테이블에 앉는 그들을 보며, 레이에게 로브를 벗고 오자고 말하려 고개를 돌렸다.
“어...”
이미 혼돈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버렸군.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의 눈앞에 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짝!!
“꺄악!?”
레이의 몸이 크게 떨렸다. 꽤 큰 소리를 낸 나머지 나를 포함해 여관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로 부들거리는 레이의 모습을 보는 가주들의 얼굴에서 나는 그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레이가 저렇게 소녀다운 교성을 지를 수 있다고?
인큐버스인 아스모에게 부모를 잃고 10년 동안 마음의 문을 닫은 채로 복수만을 보고 달려온 레이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런 시선을 계속 받고 있다간 레이의 머리에서 김이 날 것 같았기에, 이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을 벗어나기로 했다.
“정신 차렸으면 올라가자. 언제까지 로브를 입은 채 여기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네? 아. 네..!”
누가 볼 새라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사라지는 레이. 그녀의 얼굴이 어떤 상태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 * *
로브를 벗어두고 레이에게 같이 내려갈 거냐고 물었다.
“전... 조금 있다가 내려갈게요.”
아무래도 조금 전 비명으로 인해 받게 되었던 시선들이 신경 쓰였던 것 같다.
알았다고 대답한 뒤,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4명의 가주들은 근처의 테이블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앉아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굳이 합석을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쓸데없는 얘기만 할 것 같은데.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무시하고 소피아한테 말해 주방이나 빌려서 밥이나 해먹을까 생각해봤지만 생각을 돌려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합석하기로 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에는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내 자리라는 듯 홍차가 담긴 찻잔이 비어 있는 자리에 놓여져 있었으니까.
“오, 어서 오게 현성. 무시하고 나갈 줄 알았는데 자리에 합석하더니, 뜻밖에군.”
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아이테르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차까지 준비해 놓고는 뭘. 그래서, 댁들이 여기에 온 이유가 뭔데?”
대충 대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그들이 성국에 온 이유를 묻기로 했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아이테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음? 아까 말하지 않았나. 볼일이 있어 왔다고.”
“그러니까 그 볼일에 대해 묻는 거잖아.”
말의 진의를 다 파악했으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네.
살짝 짜증이 섞인 얼굴로 말하자, 아이테르가 자기 오른쪽 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때 강낭콩으로 나눴던 얘기, 벌써 까먹은 겐가?”
“강낭콩으로 나눴던 얘기?”
아이테르의 말에 잠시 기억을 뒤져 봤다. 관련 키워드는 당연히 ‘성국’이었다. 그러자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
학생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중에 내 실수로 깨져 버린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를 받아가기 위해 성국에 왔다는 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릇을 재구축한 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
반지가 없어져 악몽을 꾸게 된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레이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전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의 상태에 대해 묻는 아이테르의 서신이 오면 모를까, 내 쪽에서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귀찮잖아.
“바로 그걸세. 하지만 방금 레이의 상태를 보니 굳이 성국까지 올 필요는 없던 것 같더군.”
레이가 올라간 계단을 잠시 지켜보다가 홍차로 시선을 옮기는 아이테르.
그녀의 모습을 보기만 했는데도 레이의 상태가 완치됐다는 것을 알아챈 건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한 건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궁금하다는 듯 묻는 아이테르.
“뭘 해?”
“성교.”
“안 했어.”
하기 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안 한 건가... 아쉽군.”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아이테르.
뭐가 그렇게 아쉬운 건데..?
“성교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레이의 체질을 고친 건가요?”
궁금하다는 듯 이번엔 갈색 머리의 남성, 레인 아르테미아가 물어왔다.
“내 하루치 마력을 전부 소모해서 그릇을 재구축 시켰어.”
덕분에 난 반지가 없는 상태로 오랜만에 마력을 많이 사용한 나머지 악몽을 꿨고 말이지.
아스모 씨의 도움을 받은 건 구태여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나둘 말하다 보면 분명 만월제의 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게 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릇의 재구축에 성공했다고?”
“호오...”
자색 머리의 남성, 오스틴 크리샤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레인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하!! 역시 현성님이십니다!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말하는 그릇의 재구축을 그렇게 간단하다는 듯 치부해 버리실 줄이야!”
백발의 남성, 로이드 아리아가 여전한 호탕한 웃음을 자랑하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성국에 온 건가? 그것도 딸아이들을 데리고.”
홍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아이테르가 물었다.
이번엔 내 차롄가.
“댁들 딸내미들을 지키느라 반지를 깨뜨렸거든. 그러다 보니 내 마력에 영향을 받아 악몽을 꾸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반지를 고치려고 온 거야. 그리고 댁들 딸은 관광시켜달라고 동행한 거고.”
소원권까지 써가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 평소에 성녀의 마력이 담긴 반지로 마력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이었다. 그러니 반지가 없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을 터.
“왜인지 몸이 찌릿찌릿하더라니, 마력을 억제해주는 반지가 없어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어서였군요.”
레인이 추위를 달래는 사람처럼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데 왜 바로 신전으로 가지 않은 건가? 자네 성격대로라면 지금쯤 여관이 아니라 신전에서 성녀님을 만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건 말이지...”
“여왕의 요람에 갔다 온 거군? 그러느라 시간을 보냈고, 방금 돌아왔다?”
“어떻게 알았어..?”
지금까지 그와 한 대화에서 여왕의 요람을 특정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붙여 나와 레이를 감시하지 않은 이상, 절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아이테르가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그 정도야 알기 쉽다는 듯 말했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봤던 레이의 얼굴. 눈이 부어 있더군. 꽤 울었나보지? 그리고 자네와 레이가 입고 있던 로브는 성녀님의 친위대인 수호자들이 입는 로브고. 그리고 수호자들은 여왕의 요람이라는 이름의 성역을 지키고 있지. 그것들로 조합해 자네가 레이를 데리고 여왕의 요람에 갔다 왔다고 생각했던 설세.”
귀족이 아니라 탐정이었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에서 마취총은 안 나오는 건가?
“그런데 당신이 수호자들이 성역을 지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건데? 아니, 더 가서. 여왕의 요람이라는 성역이 있는 건 어떻게 안 건데?”
나조차도 간신히 느낄 정도의 신성력이 담겨 있어 마력을 흘려보내라는 힌트를 줘 힌트에 따라 마력을 흘려보내면 숨겨진 곳, 여왕의 요람이 나오는지도였다.
누가 봐도 고의로 숨겨 놓은 장소. 그런 장소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수호자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였다.
“설마, 당신이 성녀에게 의뢰한 건가? 그곳을 성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지.”
“그럼..!”
쾅!!
어째서 레이에게 여왕의 요람에 대해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여관의 문이 강하게 열렸다.
딸랑! 딸랑!
그에 맞춰 종소리도 강하게 울렸다.
저 문, 박살 난 거 아니지?
조금 과격한 등장에 누구인가 싶어 나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헉..!”
그곳에는 문틀에 손을 대며 크게 들썩이고 있는 청백의 갑옷이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뛰어온 모양이었다.
가슴에 하얀 장미가 그려진 청백의 갑옷은 성국 기사들의 상징이었다.
“아. 이런.”
숨을 고르고 들려진 갑옷의 투구와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탄식음이 나와 버렸다.
들켜 버렸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