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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104화 (104/146)

〈 104화 〉 손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 * *

잠시 숨을 고른 청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오더니, 경례를 올렸다.

“추, 충성! 성기사 필립! 파, 팔라딘의 명에 따라 진현성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하아...”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 작전으로 강림제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내가 보통의 여관이 아닌 팔라딘의 딸인 소피아가 운영하는 여관에 구태여 온 이유는, 지금처럼 기사들이 나를 찾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신전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관인데다가 팔라딘의 딸인 소피아가 운영하는 여관이니, 절대 이곳으로 오지 않았겠지. 생각하는 그들의 생각을 역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인을 해주지 말 걸 그랬나.’

원인은 어제 성국의 관문을 통과할 때 백야의 팬이라고 말하던 토마스라는 기사에게 해주었던 한 장의 사인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 달래서 해준 것뿐인데, 그것 때문에 거처를 들킬 줄이야.

내가 여기 있는 거 말하지 말아 달라거나 누가 오면 외출했다고 정식 오픈 전에 소피아에게 말해 두려고 했는데 그새 들키냐.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목소리에 떨림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도 아닌 ‘팔라딘’이 모든 기사들을 풀어 찾을 정도의 인물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를 데려가지 못 했을 경우도 포함해서 말이야.

투구로 얼굴을 가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투구 안의 얼굴이 어떨지 예상이 갔다.

“하아...”

두 번째 한숨이 나왔다.

“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팔라딘의 명이라 저도 어쩔 수가...”

이제는 거의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덜덜 떨기 시작하는 필립. 내가 한숨을 쉰 게 편안하게 여관에서 쉬고 있던 나를 그가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말단이 무슨 죄냐.’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오히려 이런 사태를 만든 내 쪽이 미안한 기분이었다. 신전에 도착하게 되면 플뢰르한테 단단히 한마디 해야겠다.

“...따라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얘기가 아직 안 끝나서요.”

“네, 네! 얼마든지요..! 다만, 성녀님께서 소란을 눈치채시기 전에 가야 되니...”

“최대한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아이테르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아까 하려던 질문을 하려던 찰나,

“레이에게 그녀가 살던 집이 성역으로 지정됐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 건가, 아니면 레이를 좀 더 일찍 그곳으로 데려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한 건가?”

그가 내가 할 질문을 대신 말해주었다.

눈치 더럽게 빠르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레이에게 미리 말을 해줬거나 정신적으로 조금이나마 성장한 이후에 1년에 한 번씩이라도 데려갔다면 적어도...”

“적어도 방금 자네와 같이 갔을 때처럼 한 번에 되돌아오는 기억에 울며 아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아파하더라도 그 수치가 미미했을 거다? 그래.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네. 하지만 자네가 생각했던 걸 내가 실행을 해 보지 않았을 것 같나?”

목을 축이려는 듯 아이테르가 홍차를 홀짝였다. 이내 딸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아이테르가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 한 가지 물어보겠네. 자네는 어째서 레이가 그렇게 아파했을 것 같나?”

그 정도 대답이야 쉬웠다. 내가 그녀에게 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만 하지 않고 그녀와 같이 간 이유였으니까.

“그거야 당연히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오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과 부모를 잃은 슬픔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잖아?”

내가 같이 가지 않고 그녀만 보냈으면 그녀의 방에서 가족을 잃는 장면을 악몽으로 꾼 그날과 같이 괴로움에 몸을 떨며 정신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녀를 달래러 들어갔을 때 그녀의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고, 허리 부근에는 박쥐 모양의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으니까.

부모님을 잃은 날을 악몽으로 꾼 날이야 발키리들의 마력이 담긴 반지가 있었고 그릇도 재구축하기 전이었으니까 살짝 흔들린 정도에 그친 거였다.

만약 지금처럼 본래의 마력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폭주를 했다면 그 일대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성역이 안이었음에도 말이다.

아이테르가 다시 한번 찻잔을 들며 홍차를 홀짝였다.

“좋은 추리였지만, 반만 정답일세.”

“반만 정답이라고?

그러고는 그대로 찻잔에 담겨 있는 홍차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복수를 위해서 10년을 넘게 달려온 레이일세. 그런 그녀가 복수의 이유인 부모에 대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으로 자네가 봤던 것만큼 아파할 거라고 생각하나?”

“...”

아이테르의 말대로,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복수는, 복수를 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에게 복수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만 성립된다.

레이에게 있어서 그 대상은 인큐버스인 아스모였고, 복수의 이유는 부모님의 살해였다.

그렇다면 분명 친부모와의 추억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것이 복수의 원동력이 되어 그녀의 힘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이끌어냈을 테니까.

그렇다면 생각할 만한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기억을 지워 버린 거야?”

아이테르는 대답하지 않고, 손목을 돌리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러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택에 그녀가 왔을 때, 일주일 내내 그녀의 방에서 울음소리가 끊겼다 들렸다하며 들려왔네. 방음마법을 걸어야 될 정도로 말이야. 그나마 밥을 먹고 빈 그릇을 내놓는 게 다행일 정도였지.”

아이테르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일주일 뒤, 왜인지 식사가 그대로 있기에 그녀의 방을 확인해 보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네. 엄청난 고열이더군.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 죽었을걸라고 신전의 신관인 지인이 말했다네.”

“...”

“그러고선 말을 하더군. 이대로 두면 계속 이럴 거라고. 그러니 기억을 지우던가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정론이었다. 계속 그대로 뒀다가는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별수 있나. 친구가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레이를 잘 돌봐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따라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승낙했네. 하지만...”

­까드득.

그가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들고 있던 찻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처음 봤기에, 의외라고 생각하며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후우...”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힌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억을 지우는 건 도저히 못 하겠더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의 기억을, 추억을 지우겠는가. 그래서 봉인하기로 결정했다네. 언젠가 그녀가 성인이 되고, 정신적으로 성숙했을 때에 이르면 해제하기로 생각하면서.”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기에 기사를 흘낏 쳐다보자 아직은 안정권인 듯 가만히 있는 기사를 볼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은 더 들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의 기억을 봉인하고 어렸을 때의 기억을 봉인 당한 그녀에게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르니아 가문에 양녀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설정을 붙여주었지.”

“부득이한 사정?”

“부모가 그녀를 팔았다. 라는 사정이었지.”

“정말 뻔한 설정이네.”

그런 뻔한 게 제일 잘 통하긴 했지만.

“그렇게 그녀는 귀족의 예법을 배우거나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갔네. 하지만 9살의 생일을 맞이하던 날, 생일 파티에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방으로 갔는데, 그녀가 쓰러져 있더군. 머리에는 뿔이 돋아나 있었고, 등 쪽에는 박쥐 모양의 날개가 크기를 더해 가고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로 말이야.”

“그릇의 붕괴로 인한 마력의 폭주.”

아이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침 레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저택에 와 있던 신관인 친구에게 조치를 부탁했지. 그가 임시방편으로 마련해준 방안이 자네처럼 자기 신성력을 담아 반은 마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력을 억제하는 반지를 끼워두는 것이었다네.”

아이테르의 지인이라면 성녀만큼은 아니겠지만 꽤 실력 있는 신관일 것이다. 그러니 나와 발키리처럼 임시방편으로 마력을 억제하는 게 가능했던 거겠지.

“하지만 말했듯이 임시방편인 방책. 제대로 그녀의 마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녀의 신성력정도는 필요하다더군.”

다음이야기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듣기도 했고, 앞의 문장으로 뒤의 내용을 유추하는 게 특기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성녀의 마력이 담긴 억제제를 복용하며 살아왔다 이거잖아. 그리고 기억의 봉인은 그릇의 붕괴로 인해 마력이 폭주할 뻔해서 몇 개 정도가 풀리게 되었고, 당신은 그것들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거잖아? 그리고 레이는 그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최소한의 감정만 드러내던 거고.”

“그 내용만 듣고 뒤를 정확하게 맞추시다니, 역시라면 역시군요.”

“흥. 그 정도야 몇 년 만 수행하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경지지 않나.”

지방 방송은 좀 꺼줬으면 좋겠는데. 쓸데없는걸로 대항의식 불태우지도 말고.

아아테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남은 홍차를 전부 마셨다.

“그렇지. 그러니 그 상황에서 요람에 데려갔다면 어떻게 됐겠나?”

“정신이 망가져 폐인이 됐거나 진정으로 복수에 눈이 먼 복수귀가 되어 수라의 길을 걸었겠지.”

아이테르도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 쓰게 미소를 지었다.

­끼익. 끼익.

그때, 계단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의 추스린 레이가 내려오는 소리 같았다.

"저기..."

“어이쿠,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가세나 자네들. 예약해 둔 시간일세.”

“벌써 그렇게 됐나?”

“가시죠.”

“그럽시다!”

얘기의 당사자인 레이가 내려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주들. 그런 그들을 보며 레이가 의문이 쌓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뭐 잘못했나요?”

“아냐. 넌 잘못한 거 없어.”

어리둥절해 있는 레이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톡톡 두드려주었다.

여전히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레이였지만 싫지는 않았는지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다른 가주들이 나가고, 아이테르도 그들을 따라 나가려던 찰나.

“아 참, 레이.”

까먹은 거라도 있는지 그가 몸을 돌려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할 말이 레이에게 있어 보였기에,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나주었다.

“네?”

“현성을 따라 신전으로 가서 성녀님을 만나 뵙고 오렴.”

그러면서 레이에게 무언가 종이로 보이는 것을 건네는 아이테르.

“성녀님을요? 그리고 이건..?”

“억제제에 관한 얘기란다.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만 받아도 된다고 얘기해야지? 네 몸이 정말 나은 것도 확인시켜드릴 겸 직접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아...”

납득이 간다는 듯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그가 등을 돌렸다.

나를 지나쳐 가기 전,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자네한텐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네. 게다가 그녀를 고쳐준 것에 대해서는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군.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를 잘 부탁한다네.”

감사를 표하면서 은근슬쩍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끼워 넣네? 이런 능구렁이를 봤나.

“알아서 잘할 테니까 걱정 하지마. 그리고 그렇게 고마우면 암부한테 얘기나 잘하라고.”

“하하하. 그러지.”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 또한 문을 지나 사라졌다.

“우리도 갈까?”

“네..!”

“이제 가셔도 되는 겁니까?”

얘기가 끝난 분위기를 풍기자, 아까부터 옆에 서있던 기사가 투구의 방향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아, 맞다. 이 사람도 있었지.’

기사에게 얘기가 다 끝났다고 말하기 위해 그가 있는 쪽으로 돌아설 때, 그도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사람에 따라 예민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기에.

“가기 전에, 여기서 들은 얘기를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시면...”

살짝 마력을 내뿜으며 반협박식으로 말했다.

“마, 말 안 하겠습니다! 무덤까지 간직하고 가겠습니다!”

그러자 차렷 자세를 취하며 다급하게 말하는 기사. 그런 그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가시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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