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빛의 신전.(2)
* * *
“하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현성 형제님!”
허리에 손을 올린 체 호탕하게 웃는 근육질의 대머리 남성. 3대 1000은 거뜬히 들 것 같은 새하얀 근육이 태양 빛을 받으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이 판타지 세계관이 아니라 격투만화 세계관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이고 자시고, 옷이나 입으라고!”
문제는 근육을 과시하는 그의 옷차림이었다.
실수인지 근육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일부러 입지 않은 건지 아니면 맞는 옷이 없는 건지, 그는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몸에 착 달라붙는 팬티를!
내 눈! 내 눈이 썩는다!!
헬 창들이라면 오오... 영롱한 근육..! 이라면서 찬양하겠지만 나는 근육 펌핑엔 전혀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다.
내 눈엔 그 근육들이 그저 꿈틀거리는 살덩어리로 보이기에, 레이를 따라 눈을 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천신을 모시는, 신전 중의 신전인 빛의 신전 트리니티에서 저런 모습이라니. 당장에 불경죄로 종교 재판에 회부되도 이상이 없을 것이다.
“하아...”
하지만 신전 안의 사제들이나 수녀들과 성기사들은 무덤덤하게 행동하고 있었고. 팔라딘인 플뢰르는 한숨을 내쉬며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개 중에는 오늘도 엄청난 근육이셔! 라던가 만져 보고 싶다... 라면서 감탄사를 내뱉는 수녀들도 있었다.
다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나올 수 있는 반응이겠지.
그도 그럴게, 지금 내 눈앞의 근육 대머리는 페레우스와 플뢰르처럼 성국 내에서 교황과 성녀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3명의 팔라딘 중 한 명이니까.
알렉세이 블라드노프.
철벽의 페레우스. 섬광의 플뢰르. 무력의 알렉세이.
이렇게 3명의 팔라딘이 각각 신관, 성기사, 사제들의 최고봉을 맡고 있다.
이름하고 생긴 것만 보면 보드카 한 병 정도는 원샷을 때리고 불곰을 집에서 기를 것 같은 느낌이다.
나도 그와 처음 만났을 때 혹시 러시아에서 온 거 아니냐고 물어 봤을 정도였으니까.
“현성님의 말씀대로, 옷부터 입으시죠.”
“음?”
한창 근육을 자랑하는 자세를 취하며 사제들로부터 환호를 받던 그.
시선을 돌려 플뢰르와 나의 그를 보는 시선에 자기 몸을 살펴보더니.
“아, 옷을 깜빡했군요!”
라며 겉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게 실수였음을 표현해주었다.
...실수 맞지?
“선생님? 언제까지 감고 있어야 하나요?”
아까부터 내 말에 따라 눈을 감고 있던 레이가 슬슬 좀이 쑤셨는지 감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미안. 조금만 더 있어 줘.”
지금 눈을 뜨면 필시 그녀의 눈에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녀의 눈, 더 나아가서는 그녀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눈을 감고 있어 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현성님을 뵐 수 있겠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나봅니다! 그럼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다시 한번 호탕하게 웃은 그가 높이 뛰어올라 쿵! 소리를 내며 내 뒤에 착지한 뒤 옷을 가지러 가기 위해 달려갔다.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요란한 퇴장이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알렉세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레이에게 눈을 뜨라고 말해주었다.
레이가 눈을 뜨려는 모습을 보며, 플뢰르를 포함한 성기사들에게 방금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처신 잘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였고, 그들도 내 뜻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는 몇몇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살그머니 눈을 뜬 레이. 좀 오래 감고 있던 탓인지 눈이 부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눈을 감고 있을 때의 상황을 파악해 보려는 듯 레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뜨고 있었을 때와 같은 평온한 신전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눈은 왜 감고 있으라고 하셨던 거예요? 선생님이 감으라고 하셔서 감긴 했는데 감을 필요가 있나 해서요. 그리고 뭔가 큰 소리도 나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그런 게 있어. 알면 다치니까 그냥 넘어가줬으면 좋겠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는 내가 그녀를 해하게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그러시다면 그런 거겠죠.”
“이해해 줘서 고마워.”
계속 물어 봤어도 능청스럽게 넘어갈 거긴 했지만.
쿵! 쿵! 쿵! 쿵! 쿵! 쿵!
그때, 다시 한번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상황 하나가 일단락 됐다는 생각에 그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어느샌가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럼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알렉세이의 말을. 갔다 오겠다는 말은 그 의미로 갔다가 돌아오겠다. 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것을.
“갔다~! 왔습니다~!!”
쿵!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땅에 내리꽂히는 육중한 물체. 땅이 아까보다 깊게 패였다.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전처럼 팬티만 입고 있는 차림이 아니었다.
천신교의 사제들 특유의 하얀색과 검은색이 섞인 사제복이었다.
그의 거대한 몸에 맞춰서 제작된 듯 건장한 성인 남성이 둘에서 셋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그의 근육을 전부 담을 수는 없었다.
한계에 임박했는지 찌직거리며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면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며 그가 무언가 포즈를 취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잠깐. 저 자세는..!
측면에서의 가슴 근육. 이두박근과 종아리 발달 정도를 심사할 때 보여주는 그 포즈.
“잠깐..!”
다급하게 그를 말려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레이의 눈을 미처 가릴 틈도 없었다.
쫘악!
천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천 조각들이 되어 공중으로 흩날렸다.
“오랜만입니다, 형제님!”
밝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새하얀 치아가 눈부시게 빛났다.
* * *
한바탕 일어난 소동이 진정된 뒤에야 나와 알렉세이는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소동은 그로 인해 일어난 거긴 하지만. 등장 좀 평범하게 할 수는 없는 거야? 당신 때문에 레이가 기절해서 플뢰르한테 업혀 있잖아.
저렇게 찢을 거면 옷은 왜 입고 온 거야?
플뢰르의 등에 업혀 있는 레이를 보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도 처음 만났을 때는 차가운 얼음 공주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원.
그나마 다행인 건 반나체의 그를 보지 않았다는 점이려나.
“현성 형제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운동도 쉬지 않고 하셨고요?”
그렇게 말하며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미는 알렉세이.
“아니, 못 지냈어. 학생들을 돌보느라 고생만 하고 있지. 뭐, 바쁜 와중에도 운동은 틈틈이 하고 있지만.”
그런 그의 손을 맞잡으며, 살며시 힘을 주었다.
“호오...”
맞잡은 손을 보며, 알렉세이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남들의 눈에는 악수를 하고 떨어지는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운동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악력 측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맞잡고 있던 알렉세이는 만족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풀어 주었다.
“단련을 잘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당신이야말로. 그때보다 근육이 더 는 거 아니야?”
알렉세이를 최근에 본 게 4년 전이다. 그때도 물론 성인 남성 이상의 근육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1.5배 정도 더 성장한 것 같았다.
비결이 뭔지는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거체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하하! 꾸준한 운동 덕분이지요!”
별거 아니라며 껄껄 웃는 알렉세이. 저게 약을 안 한 사람의 몸이라니. 그의 사진을 찍어서 갤러리에 올린다면 분명 합성이거나 약을 한 게 분명하다고 말들이 나왔을 거다.
“그런데 성국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반지 만들러.”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들어 보이자, 알렉세이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현성 형제님에게서 불쾌한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성녀님의 마력이 담겨 있는 반지가 없어서였군요?”
“불쾌하다는 건 너무하잖아. 그리고 이것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불쾌함의 원천이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력에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적당히 웃어 넘겼다.
“플뢰르 자매님. 성녀님께서는 지금 어디계시죠?”
“신전 내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시고 계실 겁니다. 그다음에는 예배당에서 신전성가대의 성가감상. 그리고...”
그 이후로도 꽤 많은 양의 일정이 플뢰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는데 나를 벌써 데려온 거야? 이쪽은 점심도 안 먹고 왔다고.”
약속 시간에 1시간 정도 일찍 가는 게 매너라고 해도 이건 너무 갔잖아. 1시각은커녕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볼 수 있겠는데?
내 불평에 플뢰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였습니다만, 신전의 안에서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으니 성녀님께서도 곧 현성님이 오셨다는 것을 눈치채시겠죠. 빠르면 성가대가 끝난 뒤려나요. 그렇게 된다면...”
“남아 있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바로 나한테 달려오겠지.”
내 말에 동조하듯 플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날 너무 좋아해서 문제라니까.
...그래. 너무 좋아해서 문제지.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현성 형제님이니까요! 그러면 성녀님도 기다릴 겸, 오랜만에 차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의외네. 오랜만에 근육운동이나 하자고 하는 줄 알았는데.”
“현성 형제님 혼자 오셨다면 분명 권유를 했겠지만, 아쉽게도 일행이 계셔서 홍차로 만족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럼, 가실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를 업고 있는 플뢰르에게 기사들을 해산시켜달라고 부탁한 뒤에 알렉세이를 따라가려던 찰나.
펄럭.
공중에서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하얀 깃털들이 흩날리는 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3명의 여인과 3명의 소녀가 날개를 펄럭이며 땅으로 내려앉았다.
포니테일에 거유, 양갈래 머리에 빈유 등 헤어스타일과 몸매는 각양각색이었지만 머리카락 색은 금발로 통일이었다.
그녀들의 모습을 본 기사들 사이에서는 아까보다 더한 술렁임이 일어났다.
땅에 내려앉은 그녀들은 이내 양옆으로 늘어섰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들의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는 듯이.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키리들의 사이로 향했고, 발키리들이 늘어선 길의 끝에 있는 것은.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와봤더니, 자네였군.”
뒷짐을 진 채 이쪽을 보고있는, 한 명의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