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빛의 신전.(3)
* * *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와봤더니, 자네였군.”
그렇게 말하며 오와 열을 맞춰 양옆으로 늘어선 발키리들과 성기사들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한 명의 노인이었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의 그는 흰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는 은색의, 일명 가슴 십자가라고 불리는 펙토랄레를 걸고 있었다.
허리를 반쯤 굽힌 채 뒷짐을 지며 천천히 현성을 향해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현성은 눈썹이 살짝 움찔하는 정도의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자기 지근거리에 도착해 그를 올려다보는 노인을 보며, 현성이 말했다.
“불쾌하다니, 너무하네.”
“빛으로 가득해야 할 신전에서 어둠을 가득 담은 자가 그 기운을 내뿜고 있으니 불쾌하다고 말하지, 달리 할 말이 있는가?”
“여기서 당신 말고 아무도 그 어둠의 기운인지 뭔지를 느껴서 나한테 뭐라고 말하지는 않고 있거든? 나이 들은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뭐 이렇게 예민한 척을 해?”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며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현성. 방금 알렉세이에게 들었던 ‘불쾌한 기운이 느껴져서.’ 라는 말은 잊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거야 자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쾌하지만 강대한 마력에 억눌러져 입을 열 생각하지 못 하는 거 아닌가.”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그렇게 이후로도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 대한 악담 아닌 악담을 하는 그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성기사들 사이에서 작게 술렁임이 일어났다.
현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성기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노인은 모든 성기사들이. 아니, 모든 성국의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성국의 1인자로서 성녀와 팔라딘들 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자 천신교의 수장으로서 천신 네리아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성국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인 ‘교황’이 바로 그의 정체였다.
왕족이나 황족도 쉽사리 건들지 못 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개인의 무력마저 대륙 내에서 열손가락에 들어갈 정도의 인물이었다.
“여전히 정정하네.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슬슬 교황에서 은퇴하는 게 어때?”
“이제부터 늙어갈 젊은 놈 상대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런 교황과 농담 같은 말들을, 그것도 반말로 주고받는 현성을 보고 있으니 현성에 대해 잘 모르는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넘겨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현성의 옆에 서 있는 팔라딘들을 흘낏거렸지만, 정작 그들의 눈이 닿는 곳에 있는 알렉세이는 껄껄대며 웃고 있었고, 플뢰르는 레이를 업고 있는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들이 만날 때마다 있는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 광경이 성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어, 진현성이라는 남자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그가 마왕을 토벌한 40명의 마왕 토벌단, ‘백야’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토마스의 얘기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마왕 토벌단이라도 결국 개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상대는 한 나라, 그것도 다섯 개의 강대국 중 하나인 성국 사크룸의 교황이었다.
그런 교황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듯 대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이 질문의 형태로 밖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현성을 모르는 성기사들은 대부분 신참들로서 성기사단에 들어온 지 1년이 채 안 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최고 권력자인 팔라딘들과 교황의 앞에서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거나 그를 확실히 알고 있는 성기사들은 구태여 교황과 현성의 대화에 낄 필요가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중에라도 물어보면 되니까. 물론 그가 친절하게 대답해 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렇게 얼마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던 그들.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발키리들을 향해 있었다.
“자네가 데려간 발키리들은 잘 지내는가?”
“당연히 잘 지내지. 누가 주인인데.”
“그렇다면 이제 그만 돌려주지 않겠나.”
“뭐?”
발키리들을 ‘돌려달라’는 얘기가 교황의 입에서 나오자 현성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7년 동안 수족으로 부렸으면 만족했을 거 아닌가. 그녀들도 7년 동안 자네를 따라 여러 곳을 다녀봤을 테니 만족했겠지. 그러니 이제 그만 그녀들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돌려놓는 게 맞지 않겠나?”
“돌려놓는다니. 마치 발키리가 도구인 것처럼 말하네.”
자기 소중한 그녀들을 도구로 취급하는 교황의 발언에 현성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니 그 헛소리는 정중하게 거절하지. 난 내 소중한 얘들을 도구 취급하는 영감한테 기쁨조로 보내긴 싫거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7년 전과 4년 전에 하던 방식대로 하는 수밖에.”
“진심?”
눈을 가늘게 뜨며 교황을 노려보는 현성. 그 눈빛을 그대로 받으며 교황이 손가락으로 숫자 3을 표시했다.
“자네가 나와 체스를 할 때 말하지 않았던가.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다고. 자네와 나의 전적은 자네가 1승 1무. 그러니 아직 마지막 판이 남은 걸로 아네만?”
“하아...”
한숨을 내쉰 현성이 눈을 감았다 뜨자, 검은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어 마력이 투기로 형상화가 되며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에 지지 않고 교황의 몸에서도 황금빛의 투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투기의 맞부딪침음으로 인해 현성과 교황 사이의 공간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일그러졌고,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은땀을 흘리게 했다.
개 중에는 그들이 내뿜는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헉헉대는 성기사들도 있었다.
“아무리 성녀의 신성력으로 웬만한 부상은 회복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몸의 절반이 날아가는 고통을 또 겪고 싶지는 않을 텐데?”
“4년 전과 지금이 같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일세. 여신께 받은 신성력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단련에 따라 강해지니까.”
“늙은이가 단련해봤자 얼마나 늘어난다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흉흉한 기색을 눈치챈 발키리들은 각자의 무장을 꺼내 드는 등 싸움준비 자세를 취했고 플뢰르는 레이가 휘말리지 않게 이미 멀리 가 있는 상태였다.
알렉세이는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키며 혹시라도 있을 그들의 격돌을 막을 준비했다.
그들이 제대로 격돌한다면 신전은 고사하고 성국이 위험할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4년 전 모종의 이유로 격돌했던 현성과 교황의 싸움은 성국 반파라는 희대의 사건을 일으켰다.
성녀의 보호 마법 덕분에 인명 피해가 나지는 않았지만 현성은 성녀에게 8시간의 설교를 들었으며 교황은 그 싸움으로 몸의 반이 날아가 한동안 신전의 집중치료실에서 성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관들이 온종일 치료마법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의 치료를 받았다.
그 싸움을 직관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알렉세이였기에, 또다시 그런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차하면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 각오로 근육을 팽창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한 방 정도는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버틴다면 발언권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이용해 그들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성기사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다.
그때의 사건의 범인이 현성이라는 것을 몰라 발키리들이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를 취하자 그녀들을 따라 현성에게 적의를 표하며 무장을 꺼내 드는 성기사들과, 그런 성기사들한테 자신들이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며 그들을 말리는 성기사들로.
하지만 말리는 쪽의 성기사들이 조금 더 고참들이었기에, 이내 나머지 성기사들이 최소한의 방어 태세만 취하는 걸로 바꿔 싸움의 구도는 교황과 발키리 대 현성으로 굳혀졌다.
마스터. 가세할까요?
일촉즉발의 상황에 현성의 머릿속에서 발키리 자매 중 첫째. 아니, 일곱째인 엘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자신들을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됐어. 저 영감도 진심으로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보이니까. 그리고 진심이어도 내가 질 일은 없고.’
나머지 발키리들을 포함한 성국의 전부가 덤빈다고 해도 말이지. 라고 그가 마지막에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렌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의 현 주인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들의 기 싸움에 휘말린 모든 사람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이후에 있을 싸움을 대비했다.
하지만 다행이 그들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하도록 하지.”
교황이 먼저 오른손을 들며 중지의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현성과의 기 싸움에 밀린 건 아니었다.
어느새 교황의 눈은 자기로브 끝자락을 잡은 작디작은 손에 머물러 있었다.
그 손을 따라 가 보니, 작은 손이 증명하듯 앙증맞은 느낌의 금발 소녀가 있었다.
이제 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불안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교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슈우우우.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출되고 있던 투기가 다시 교황의 몸 안으로 되돌아갔다.
교황이 투기를 거둠에 따라 발키리들도 자세를 거뒀다.
“하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현성은 한숨을 내쉬며 투기를 거두었고, 그제야 플뢰르와 성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알렉세이 또한 팽창시키던 근육을 다시 수축시키며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교황 성하..!”
그녀의 보호자로 보이는 수녀가 황급히 그녀를 안아 올리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 애가 성녀님의 성가를 가까이서 듣고 싶다며 예배당으로 가겠다고 멋대로 나간 터라..!”
교황은 괜찮다며 그녀를 제지했다.
“성녀님의 성가라고요? 성녀님께서 성가를 부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알렉세이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성기사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알고 있었냐고 물어 봤고, 대부분의 성기사들이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네. 못 들으셨어요? 성가대의 일원 중 한 분이 감기로 목이 나가 오늘만 성녀님이 대신해주시기로 하셨어요.”
그들이 못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성가를 부르기로 한 건 십 분 전의 얘기였고, 그들은 현성을 찾으러 온 성국을 뒤지고 다닌데다가 신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중앙 정원에서 떠난 적이 없으므로 그것에 관해 들었을 리가 전무했다.
알렉세이 또한 한창 근육운동에 전념하고 있을 때라 듣지 못 했다.
아이를 안아 든 수녀가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물러 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현성이 교황을 불렀다.
“영감.”
“왜 부르는 게냐.”
“방금 수녀가 말한 거,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나도 들었네.”
“그녀가 방금 뭐라고 했지?”
“성가대의 일원 중 한 명이 감기로 결석하게 되어서 성녀가 그 자리를 맡는다고 했네.”
“분명 성가대의 노래는 마도구를 통해 성국 전역에서 들을 수 있게 한다고 했지?”
“신성한 신의 목소리를 노래로 들려주는 거니까. 매일 9시와 15시에 한 번씩 총 2번 들려 준다네.”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는 위치는?”
“예배당일세.”
“그 예배당의 위치는?”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네. 긴급한 상황이니 문 한 두 개 부수는 것 정도는 용서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언제든지 발키리들을 노릴 테니 조심해라? 하, 미안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건 존재하지 않아. 성녀의 잔소리나 나를 노리는 조금 위험한 여자들을 제외하고 말이야 그러니 싸움을 걸고 싶으면 얼마든지 걸어.”
교황의 말에 콧웃음을 친 현성이 땅을 박찼고, 이내 바람을 동반한 자색의 총탄이 되어 공기를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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