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저를 납치해 주세요! (2)
* * *
“그래서, 성국의 결계를 부순 건 고의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렇다니까?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설마 쨍그랑! 하고 깨져버릴 줄은 정말 몰랐어!”
자신을 천신교의 수장인 교황이라고 밝힌 율리시스라는 노인과 대화를 한 지 30분 정도가 지났다.
처음 봤을 때의 분위기는 어디 갔냐는 듯 스카지나는 율리시스와 몇 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듯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말하고 있었다.
가끔가다 과자까지 입으로 던져 넣는 모습이 영락없는 오랜 친구의 집에 놀러온 사람의 그것으로 보였다.
중간까지 스카지나에게 무어라 부모님처럼 잔소리를 하던 현성도 어느 샌가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그것도 다리를 꼰 자세로 말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스카지나와 대화하던 율리시스의 눈이 간혹가다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계를 너무 약하게 해놓은 거 아니야? 다른 고대룡이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깨져버리면 복구하기도 힘들 것 같은데?”
언제그랬냐는 듯 바로 스카지나에게로 향하는 율리시스의 시선.
“허허, 너무 걱정 마시지요. 다른 고대룡들께서는 그분들의 구역에서 나가시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스카지나의 말에 대답한다.
“그건 그렇지. 나도 저 녀석이 아니었으면 설산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살았을 테니까. 굳이 나와봤자 지금처럼 득보다는 실을 더 많이 주니까.”
“아닙니다. 지고의 존재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길에 눈을 뜨는 자들이 있을 정도 아닙니까. 세상에 단 여섯 명만 존재한다는 초월자들 중 한 사람도 고대룡의 마법을 익혔다고 들었으니, 오히려 그 옥체를 드러내시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대룡의 마법?”
고대룡의 마법이라는 말에 자신이 마법을 가르쳐준 상대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스카지나.
“아, 그래! 기억났다! 이야~ 그 꼬맹이가 벌써 초월자의 반열까지 올라갔어?”
“예. 5위라고 하시더군요. 이명은 ‘대마녀’고요.”
“거기다가 5위까지!? 와... 20년 전에 마법 배우게 해달라고 낑낑대며 설산까지 찾아오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허허허, 딸 같으시겠군요.”
“딸은 무슨! 그런 성격 더러운 딸은 줘도 안 갖는다!”
끌끌거리며 웃으며 스카지나의 말에 적당히 대꾸하던 율리시스.
‘그나저나...’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그의 왼쪽 시선에 위치한 남자, 진현성에게 향하는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고대빙룡인 스카지나 님은 격이 높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 남자는 뭐지?’
자신을 고대빙룡 스카지나의 친구이자 보호자라고 밝힌 흑발의 남성. 중간에 그가 질문의 화살을 율리시스에게 돌려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범상치 못한 인물임은 확실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율리시스가 내뿜고 있는 기백에 눌려 저렇게 편안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눈앞의 그는 마치 자신의 안방에 있는 것 마냥 편안한 자세로 가끔가다 코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고 있는 마력은 스카지나와 비견해도 무방할 정도의. 아니, 오히려 그를 능가할 정도의 마력이었다.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그의 감각들이 경종을 울릴 정도로 찌릿거리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의 마력이라면 필시 초월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였다. 하지만 초월자의 명단을 알고 있는 그의 기억에 현성과 같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외견상으로는 팔라딘과 다를 바 없는 나이대의 젊은이인데.’
윤기 있는 흑발. 늘씬한 키에 적당히 붙은 근육들. 어째서 수녀들이 꺄아꺄아거리며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외모.
많이 쳐줘봐야 20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그 나이대의, 그것도 ‘인간’이 가지고 있을 만한 마력이 아니었다.
인간이라고 소개한 그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율리시스의 왼쪽 눈이 하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하얀 마법진이 생성되어 있었다.
신성력을 각성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본질을 꿰뚫어 볼 때 사용한다는 ‘천신의 눈.’
그것을 이용해 현성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본질을 볼 생각이었다.
“천신의 눈을 사용하려는 거야?”
현성을 가늠하려 하고 있는 율리시스의 시선을 눈치 챈 듯, 과자를 와삭거리던 스카지나가 불현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아. 최악의 경우에 네 왼쪽 눈, 그대로 터질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율리시스의 빛나고 있는 눈을 가리키는 스카지나.
“예?”
갑작스런 그의 말에 팟. 하고 눈에서 불이 꺼졌으며, 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마법진이 사라져 있었다.
그 광경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카지나가 말을 이어갔다.
“저 녀석의 마력의 본질은 나조차도 잠길 만큼 깊은 어둠의 수렁이라, 아무리 천신의 대리인라 칭할 수 있는 신성력을 지닌 너라도 위험할걸?”
“그런...”
“천신의 눈까지 쓰려고 하는 걸 보니 저 녀석에 대해 많이 궁금한가보네?”
“그게...”
“음? 어째서 인간이 나 같은 고대룡과 비슷한 수준의, 아니. 오히려 더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하던 거 아니었어?”
“...”
아니라는 부정은 율리시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율리시스를 이해한다는 듯 스카지나가 낄낄대며 웃었다.
“궁금할만하지. 나조차도 저 녀석에 대해 궁금한 게 산더미인데.”
“스카지나 님도 제대로 모르신다고요?”
“응. 그나마 아는 거라고는 저 녀석의 마력은 원래 저 녀석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주 대단한 존재로부터 받았다는 것? 이 이상은... 미안하지만 말했다가는 저 녀석이 화낼 게 분명해서.”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스카지나.
하지만 율리시스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서 떠나있었다.
‘대단한 존재로부터 받았다? 고대룡인 그가 대단하다고 할 정도면...’
“설마...”
신들의 시대부터 존재해온 스카지나가 대단하다고 할 정도의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율리시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했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종족도 아니고 인간이, 인간의 몸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충격에 휩싸인 듯한 율리시스의 얼굴을 보며 스카지나가 미소를 지었다.
“대충 눈치 챈 것 같네. 아참. 내가 얘기했다는 건 비밀이다? 저 녀석, 저렇게 보여도 뒤끝이 심한 놈이라서 말이야. 1년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복수할 정도니...”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으면서 성격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라고 말을 마친 스카지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그나저나 저 녀석은 언제까지 잘 생각인지.’
아무리 소파가 눕는 것만으로도 잠이 올 만큼 푹신함을 자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뭐라뭐라 혼자서 중얼거리던 교황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성기사를 따라 나간 뒤에도 장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는 현성을 보며 스카지나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몇 천년을 살아온 고대룡인 그에게 몇 시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산에 있는 그의 레어에서 잠깐 눈 좀 붙였다고 생각하면 인간 세상은 몇 년이 지나있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곳을 향해 모험을 떠나고 싶던 그였기에, 현성을 흔들어 깨우려 소파에서 일어나던 찰나.
쾅!!
응접실의 문이 강하게 열렸다.
“뭐, 뭐야?!”
얼마나 강하게 열었는지 폭발이라도 난 듯한 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현성은 벌떡 일어나며 비몽사몽한 눈으로 고개를 휙휙 돌려가며 주변을 훑었고.
“어, 어어?! 으아악!!”
천둥같은 소리에 깜짝 놀란 스카지나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소파의 뒤로 넘어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뒤구르기를 하다 실패한 사람처럼 허리가 반쯤 꺾인 채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어... 어라...?”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범인으로 보이는 듯한 흑발의 소녀는 혼란에 빠진 응접실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응접실의 혼란이 조금이나마 잠재워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을 그렇게 쾅쾅거리며 열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죄, 죄송해요오!”
호위기사로 보이는 듯한 여자에게 혼나고 있는 소녀를 보며, 현성은 여전히 허리가 굽은 채로 버둥거리고 있는 스카지나에게 향했다.
“...안 일어나고 뭐하냐.”
“모, 못 일어나겠어...”
“...너, 고대룡 맞냐?”
“최, 최근에 폴리모프를 한 건 백 년 전이었단 말이야..!”
“하아...”
한숨을 쉬면서 스카지나를 뒤집는 현성. 그의 도움 덕분에 겨우 몸을 일으킨 스카지나는 입고 있던 푸른색의 정장을 탈탈 털었다.
잠시 후, 혼란을 잠재운 그들은 율리시스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방금 전 사태로 인해 서로 무어라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못해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저, 저기..!”
정적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흑발의 소녀였다.
“저 좀 납치해 주세요!”
갑작스런 급발진에, 응접실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순간에 멎었다.
"...제가 뭐 잘 못 말했나요?"
급발진을 한 흑발의 소녀만 제외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