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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115화 (115/146)

〈 115화 〉 저를 납치해 주세요! (3)

* * *

하얀 수녀복을 입은 흑발의 소녀의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폭탄 발언에 응접실의 안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라도 멈춘 듯이 흑발의 소녀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춰있었다.

스카지나는 과자를 입에 집어넣고 있는 자세로 굳어버렸고, 현성은 찻잔을 입술에 닿은 상태로 소녀에게 시선을 향하며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푸른 머리칼의 여기사는 충격에 빠진 듯 어버버 거리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제가 뭐 잘 못 말했나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충격에서 가까스로 헤어 나온 여기사가 소리를 지르며 소녀의 뺨을 길게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야야! 아하요! 아흐다구요!!”

“일부러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휴식시간까지 사용해가며 모셔왔더니만! 하는 얘기가! 자신을 납치해달라는 거라뇨!! 교황께서 아시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울분을 토할 때마다 주물러지는 반죽마냥 이리저리 늘렸다가 줄어드는 소녀의 얼굴.

“그, 그래서 일부러 나가신 다음에 온 거 아니에요!”

“나가신 다음이라도! 문제 아닙니까!”

“시, 신성력으로 주변에 사람 없는 거 확인했으니까 괜찮... 아야야야야!!”

그렇게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는 그녀들.

“자자, 진정하고. 왜 자신을 납치해 달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자기소개가 먼저 아닐까?”

결국 보다 못한 스카지나가 나서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현성 또한 헛웃음을 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며 인자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국의 성녀, 에델린이라고해요. 이쪽은 제 전담 호위기사, 리사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델린의 말에 맞춰 여기사 또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보는 스카지나와 현성은 현재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얔... 어떡햌..! 나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앜..!]

[나도 터질 것 같으니까 최대한 참아..!]

본인은 최대한 성녀라는 직책에 맞게 행동하려 하고 있었지만, 여기사에게 하도 잡아당겨져 퉁퉁 부어 벌게진 볼과 눈물이 맺혀있는 눈으로 이따금씩 코를 훌쩍이고 있어서 고귀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영락없는 혼나고 난 직후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나오려는 웃음을 과자를 삼키거나 홍차를 마시면서 겨우겨우 참아낸 현성과 스카지나.

그렇구나. 라고 적당이 대답하며 그들도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하려던 찰나,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간 기억에 현성이 스카지나에게 물었다.

“야. 그런데 네가 전에 분명 성녀는 보는 것만으로 후광이 비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어지며, 신성과 죄성을 모두 갖춘 육체를 지닌 여인이라고 하지 않았냐?”

저게 어딜 봐서 죄성을 갖춘 육체냐? 라고 말하는 듯한 현성의 눈짓. 그곳에는 빈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녀의 몸이, 정확히는 가슴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카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예전에 봤을 때는 컸었는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가장 최근에 봤던 게 정확히 몇 년 전이었어?”

“오십년?”

“...물어본 내가 바보지.”

한숨을 내쉬는 현성. 시간 개념을 탑재하고 있지 않은 그를 상대로 이런 질문을 했다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저기요. 죄송한데 다 들리거든요? 죄성을 갖춘 육체니 뭐니, 그거 성희롱이라고요! 그, 그리고 아직 열 한 살이거든요? 지금이야 이렇게 빈약한 몸이지만! 몇 년 만 지나면 전대 성녀님 정도는 압살할 정도로 커질 거라고요!”

듣다듣다 못 듣겠던 성녀가 몇 마디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린애 투정이나 다를 게 없었다.

“성깔은 그때 걔보다 더 괴팍한 거 같은데? 인성도 가슴에 비례하는 건가?”

“전대 성녀보다?”

“응. 걔는 성희롱을 해도 저렇게 나 화났어요! 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거든.”

“네가 고대룡이라 말 못 한 건 아니고? 잘 못 말했다가는 평생을 얼음 속에 갇혀 지낼 수도 있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때의 성녀같이 참한 처자를 얼음 속에 가둬놓을 리가 없잖아.”

전대 성녀니 고대룡이니. 성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낄낄대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마리의 용을 보면서 성녀는.

‘과연 이 사람들이 정말 내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서로만 아는 얘기를 하며 낄낄대던 그들.

“자, 그럼 농담은 이쯤할까? 우리의 성녀님께서 볼일이 급하신 것 같으니.”

“그러는 게 좋겠다. 자기소개 빠르게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언제까지나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남아있던 과자를 몽땅 입으로 털어 넣은 스카지나가 먼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내 이름은 스카지나고...”

“너무 기니까 이름하고 특징만 말해.”

“아니, 이제 이름 막 말하고 있는데..?”

뭐 한 것도 없는데 말이 끊겨 억울하다는 듯 한 표정의 스카지나를 보며, 현성이 말했다.

“가만 두면 또 지고의 존재부터 시작해서 역사 얘기 줄줄이 늘어놓으며 네가 얼마나 대단하니 어쩌니 할 거 아니야.”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싫다니까.”

칫. 하며 혀를 찬 스카지나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스카지나. 고대빙룡을 맡고 있음. 끝!”

“아니. 간단하게 하랬지, 누가 성의 없이 하래?”

“왜 또! 핵심적인 것만 콕콕 집어서 말했으니 됐잖아!”

현성의 태클에 빼액! 하고 소리를 지르는 스카지나.

‘삐졌네, 삐졌어.’

그가 얼마나 수다스러운지는 지금까지 동행하면서 여지없이 느꼈던 현성이었기에, 말을 못하게 막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삐...”

“고, 고대빙룡이라고요?!”

현성이 삐졌다고 놀리려는 찰나, 탕! 하고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성녀의 상체가 강하게 튀어올랐다.

“신들의 시대 때부터 존재해온 지고의 존재이자 세상에 몇 없는 고대룡 중 얼음을 맡고 계신 분이라고요?!”

“그래, 그래. 내가 바로 그 스카지나야. 그러니 더 찬양해도 좋아.”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나오자 기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스카지나.

그런 그를 보며, 성녀의 머릿속에서는 방금까지 그들을 의심하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래서, 성녀님께서는 어째서 자신을 납치해달라고 하신 걸까?”

소파에 한 팔을 올린 채로 스카지나가 물었다.

“그, 그게 말이죠...”

다시 의자에 앉아 자세를 다듬은 뒤에 듣고 놀라지 말아달라고 말하며, 성녀가 얘기를 시작했다.

“제가 여러분들께 제 납치를 의뢰한 이유는 이 새장 속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서예요.”

“..!”

성녀의 말에 여기사, 리사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성녀와 나누었던 ‘새장 속의 새’와 관련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새장 속이라는 건, 신전을 말하는 거야? 아니면, 성국 전체?”

“성국 전체를 뜻하는 말이에요.”

작게 한숨을 내쉰 성녀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태어나자마자 신전의 고아원에 맡겨졌어요. 그때 당시 저를 받았던 수녀님께 여쭤봤는데, 저를 데려온 사람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신성력을 각성할 때까지 8년 동안 신전의 고아원에서 지냈죠.”

“답답했겠네.”

성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딱히 답답하던가 하는 건 없었어요. 한참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신성력을 각성하고 나서, 성녀의 자리에 오를 만큼의 강력한 신성력을 각성하고 나서 세상에 대해 알아갈수록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 또한 커져가지 뭐에요. 그래서 하루는 눈 딱 감고 저기 보이는 절벽까지만 나갔다 오면 안 되냐고 물었는데...”

“거절당했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에 성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죠. 이유라도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유도 안 말해주지 뭐에요? 호위를 동원해서 가도 안 되냐고 여쭤봤는데도 거절당했구요. 그래서 몰래 나가보려고 했는데, 설마 발키리까지 동원해서 저를 막을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포기해야 되나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우리가 찾아왔다는 거네.”

“그렇죠. 그러니 부탁드려요! 하루라도 좋으니까..! 저 절벽까지만이라도 좋으니까..! 저 좀 데리고 나가주세요..!”

간절한 성녀의 눈빛에 스카지나는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으음... 이거 어쩌지? 도와주고는 싶지만...”

그러면서 흘끔. 현성을 곁눈질했다.

“왜 날 봐?”

“내가 지금은 저 녀석의 소환수로 있어서 말이야. 내가 움직이려면 저 녀석의 허락이 있어야 하거든.”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어가는 스카지나. 현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아까 그랬잖아? 나는 이제 고대빙룡 스카지나가 아니라 네 소환수인 스카지나로 지내야 된다고. 그러면 내가 움직이는 거나 힘을 사용할 때면 네 허락을 받아야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스카지나의 말에 성녀의 시선이 현성에게로 옮겨졌다.

“저 남자, 아니. 저 분이 고대빙룡이신 스카지나님을 소환수로 부리시는 분이라고요?”

“5대5의 친구 계약이지만.”

“그, 그래도! 고대룡의 마법을 익힌 분에 대해서는 들어봤어도 고대룡을 소환수로 삼은 소환사가 있다니..!”

성녀가 충격에 빠진 듯한 얼굴을 했다. 만화적으로는 쿠궁! 하는 표현이 잘 어울릴 듯 했다.

“그래서? 우리 소환사님의 생각은?”

충격에 빠진 성녀를 뒤로하고, 스카지나가 현성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 손을 따라 충격에 빠져있는 성녀의 얼굴이 현성을 향했다.

“그래. 하지 뭐.”

“지, 진짜요..?!”

성녀가 희망의 끈을 잡았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서 충격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환희가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성은 그녀의 머리 뒤로 태양이 떠오르고 꽃밭이 펼쳐지는 것 같은 환상이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현성의 말에 태양이 저물고 꽃이 시들었다.

“다만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당연하지. 우리는 영웅이나 용사가 아니니까. 그러니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영웅이라기보단 악당에 가깝지만~”

쓸데없이 덧붙인 스카지나의 농담에 현성이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성녀는 현성이 말한 ‘조건’을 생각하느라 듣지 못했다.

“돈은 없고... 권력도 아직인데... 서, 설마..!”

양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듯 안는 성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한 행동인지는 현성도 잘 알고 있었기에, 피식. 코웃음을 치며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몇 년이 지나면 모를까, 지금의 빈약한 몸으로는 흥분이 하나도 안 되니까 걱정 마.”

“빈약하다고 벌써 두 번이나 말했어요..!”

성녀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반박을 해봤지만, 현성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조건이 뭔데요? 일단 들어나 보죠.”

결국 이에 관해서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성녀가 한숨을 내쉬며 현성에게 묻자.

“오? 조건을 걸지 않아줬으면 하는 말은 안 하는 거야?”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성녀로 지내오면서 3년 동안 세상이 얼마나 깨끗하면서도 더러운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쭤보지만 조건이 뭔데요?”

“그건 비밀.”

“네..?”

“비밀이라고. 네 납치에 성공하면 그때 말해줄게.”

“하지만 그러면...”

터무니 없는 조건이었다. 여기서 조건에 대해 확실하게 하고 가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것이 조건으로 나올 지 몰랐으니까.

막말로, 자신을 납치한 뒤에 평생을 노예로 부리는 게 조건으로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성녀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현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나 주변사람들한테 피해주는 건 아니니까 걱정말고. 그래도 싫어? 싫으면 말고. 나야 새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새 한 마리 정도는 무시해도 상관없으니까.”

“...”

”어쩔래?”

씨익. 미소를 지으며 현성이 성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그의 조건에 성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와 거래하는 거 같네요.”

“원숭이의 손이 아닌 걸 감사히 여겨.”

원숭이의 손이 무엇을 뜻하는 지 그녀가 알 리가 없었지만 쓸데없는 얘기겠거니, 생각하며 현성의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로 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좋아. 그러면 오늘 밤 바로 실행하자.”

“왜 밤이야? 그냥 여기서 들쳐 업고 도망가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많은 사람들한테 얼굴 팔리잖아. 이미 얼굴이 팔린 신전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성국 전역의 사람들에게 고대룡을 타고 온 남자라고 알려지긴 싫어.”

“남에게 얼굴 알려지기 싫다는 놈이 하렘을 퍽이나 만들겠다.”

“그건 알아서 할 테니 걱정마시고...”

그렇게 말하던 현성이 문득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은 성녀의 옆에 서있는 리사에게 향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리에 가담해서 성녀를 납치하는데 도움을 줄 건가? 아니면, 교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우리를 막을 건가?”

“...”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 들은 리사는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쪽에서 부탁한다고 머리라도 조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유를 통제당한 삶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성녀의 ‘친구’이자 호위기사이기 이전에 성국의 성기사다.

성녀를 성국의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몰랐지만, 성녀를 납치하려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게 성국을 배신하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리사가 결국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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