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납치 작전 성공!
* * *
둥근 달이 밤하늘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깊은 밤.
“아니, 지 마력이 더 좋으면서 왜 굳이 내 힘을 쓰겠다는 건데?”
“네 힘만 쓰는 게 아니라 네 힘을 섞어 쓰는 거야.”
“그게 그거지!”
한창 성녀 납치 사건 예고로 인해 떠들썩한 빛의 신전 트리니티의 상공에서, 용의 형상으로 날개를 펄럭거리며 체공하고 있는 스카지나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성녀 납치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둘이서 나눴던 대화에서 현성이 그의 본래 힘 대신 스카지나의 힘을 빌릴 거라고 말한 탓이었다.
“네가 합일인지 뭔지 그거 사용할 때 드는 느낌이 이상해서 별로 내키지 않는단 말이야!”
현성과 그의 스승이 개발해냈다고 하는, 소환사가 소환수의 마력을 빌려 소환수가 사용하는 마법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인 합일.
현성이 그 마법을 쓸 때 소환수에게 오는 반동 때문에 그가 합일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는 스카지나였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혼자서는 긁을 수 없는 날개의 뒷부분이 간지럽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손으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부위이기에, 그 고통을 여지없이 겪어본 그로서는 합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고대룡이 엄살은. 반동이라고 해봤자 1, 2분이면 끝나잖아. 그러니 좀만 참아.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뭐? 엄살? 어~엄~사~알?? 야! 네가 절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부위에서 오는 간지러움을 견디는 고통을 알아?! 고작해야 1, 2분이겠지만, 나한테 느껴지는 체감으로는 1시간에서 2시간이라고! 그리고, 필요해서 하는 거라니?”
“아, 시간 됐네. 그럼 갔다 온다. 대기하다가 신호에 맞춰서 성녀 방 창문으로 날아와.”
스카지나의 투정과 질문을 가볍게 씹은 현성이 탓. 하는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스카지나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아니..! 뭐가 필요해서 내 힘을 쓰는 설명해주고 가야..!”
“합일. 고대빙룡 스카지나!”
마치 스카이다이빙이라도 하듯 공기의 저항을 느끼면서, 합일의 주문을 왼다.
“야이 개..! 아악!!”
뒤, 아니. 위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스카지나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쾅!!
땅울림을 동반한 굉음과 함께 요란하게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 * *
쾅!
쾅!
쿵!
숙소의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성녀.
창문을 통해 싸움의 과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와...”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현성이 주먹과 발을 휘두를 때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하늘로 날려져 쿵 소리와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조금 큰 소리를 동반한 하얀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성녀는 생각했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얼음기둥들이었다.
‘설마... 사람을 얼려버린 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초점을 얼음 기둥을 향해 집중시키자, 그녀의 생각대로 검을 빼어들고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얼음 속에 갇힌 성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얼음 속에 갇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며 시선을 다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곳으로 옮겼다.
“빛의 사슬..!”
사제복을 입은 사람의 손에서 나온 하얀 빛의 사슬이 현성의 오른팔을 속박했다.
“자, 잡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빨리 속박 주문을... 어?!”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속박의 신성주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어, 어어어어어!?”
하지만 그 전에 현성이 오른팔에 힘을 줘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고,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사제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하늘을 날았다.
그대로 사슬질의 향연이 이어졌다.
부웅! 쾅!
공기를 찢으며 현성의 손에 의해 사슬이 휘둘러질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사들과 사제들의 비명이 하늘을 수놓았다.
대부분이 사슬에 맞은 게 아닌 현성에 의해 강제로 사슬의 끝에 매달리게 된 비운의 사제에게 맞은 거였지만.
사슬의 반경이 워낙 넓었던 탓에 기사들이 쉽사리 덤벼들지 못 했다.
아무 생각없이 돌진하다가 운동에너지를 가득 머금은 비운의 사제에 의해 날아갔으니까.
얼굴이 못 알아볼 정도로 뭉개진 그가 사슬의 끝에 매달린 신세에서 벗어난 것은 챙! 하며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난 직후였다.
빛의 사슬이 파캉!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의 입자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고, 힘껏 사슬을 휘두르던 현성은 헛손질을 크게 해 잠시 휘적거렸다.
겨우 균형을 잡은 현성은 사슬을 벤 범인을 찾기 위해 금속음이 들려왔던 공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빛의 고리로 보일 정도의 속도로 휘둘러지던 사슬을 정확하게 끊어낸 솜씨.
평범한 사람의 솜씨로 보이지 않는 장면에 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슬을 벤 건 1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은발의 소녀였다. 공중에서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빛의 사슬을 끊어낸 그녀가 한 바퀴 돌았고, 나비처럼 부드럽게 땅에 착지했다.
사슬이 끊겨 그대로 하늘을 날던 비운의 사제를 적발의 수도복을 입은 사내가 잡아 이미 기절한 그를 땅에 살포시 눕혀주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로, 청색의, 가운데에는 하얀 장미가 그려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자가 걸어나왔다.
오른손에는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는 방패를, 왼손에는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거기까지일세.”
중후한 목소리가 투구의 사이로 흘러나왔다.
“저분들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성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팔라딘..!”
성국의 최강 병력 중 하나이자, 각각 신관, 사제, 성기사들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들로, 성국 내에서는 팔라딘이라 불리며 경외를 받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아마 다른 곳에서 순찰을 돌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것 같았다.
방금까지 거의 노는 식으로 상대하고 있던 현성의 눈에 조금의 기대감이 깃들었다.
‘이제야 좀 쓸 만한 녀석들이 나왔군!’
* * *
성녀의 방으로 향하는 최후의 길을 지키고 있던 리사.
“...오셨군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자,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명의 남성을 볼 수 있었다.
“설마 팔라딘들까지 쓰러뜨리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곳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을 들으며, 흑발의 남성, 진현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의 최강 병력 중 하나라고 하던데, 솔직히 실망스러웠어. 철벽이라고 불리는 방패는 주먹 몇 방에 깨지질 않나, 섬광이라고 불리는 미소녀는 속도만 빠르고 실속이 없었고, 무력이라고 불린 사내는 나한테 힘으로 졌지. 그래서 근육 좀 키우라고 말해주고 올라오는 길이야.”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현성.
다시 자세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시작할까?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침대의 푹신함에 못이긴 어린아이가 잠들 것 같거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현성이 성녀의 방을 향해 턱짓을 했다.
새벽 늦은 시간이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리사도 생각했다.
쾅!
그것을 또 들었는지. 방문이 강하게 열렸다.
“아직 쌩쌩하거든요!!”
쾅!!
가 바로 강하게 닫혔다.
그것을 보며, 리사와 현성은 역시 아직 어린애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피식. 웃으며 현성은 리사를 바라봤고, 리사도 현성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갑니다.”
그 말을 신호로, 리사가 검을 빼들며 땅을 박찼다.
슈아악!
한줄기 은빛이 번쩍이는 것으로 보일 만큼 빠른 속도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 검이 향하는 곳을 베이고도 자신이 베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가볍게 몸을 틀며 그녀의 검을 피한 현성이 마법을 영창하려 했지만, 그녀가 자세를 다잡고 검을 내지르는 순간이 더 빨랐다.
노리는 것은 그의 심장. 찔린다면 즉사하겠지만 눈앞의 남자는 심장을 찔린다고 해서 즉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를 마주한 그녀의 감각들이 알려주고 있었기에 망설임없이 내지를 수 있었다.
즉사만 아니라면 신관, 혹은 성녀가 회복시킬 수 있었으니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마법을 영창하려고 자세를 잡고 있던 현성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단 두 수만에 들어온 외통수의 공격이었다.
“어..?”
하지만 그녀가 내지른 검이 현성이 입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를 붉게 물들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틱. 하고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검의 끝이 그의 가슴팍에 닿은 채로 부들거리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을 입은 건 아니었다.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었다면 캉! 하고 금속음이 났어야 했으니까.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 그녀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고, 이내 현성의 상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냉기를 볼 수 있었다.
‘설마..? 얼음으로 단시간에 갑옷을..?’
상대가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막았는지는 알아챘지만, 그녀에게 다음은 없었다.
“잡았다.”
턱. 하고 현성의 오른손이 그녀의 오른팔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빠져나가려 재빨리 몸을 빼봤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잠시 후, 그녀는 얼굴과 가슴 부근만 제외한 채 검을 내지르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게 되었다.
‘꼼짝도 못 하겠어...’
아무리 힘을 줘봐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패배입니다. 지나가시죠. 그런데, 이거. 녹기는 하는 거죠?”
자신을 얼린 마법이 고대룡의 마력으로 이뤄진 것임을 알고 있는 리사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지 현성에게 물었다.
“아, 걱정 마. 그냥 더 귀찮게 하지 못하게 움직임을 멈춘 것뿐이니까. 아마 조만간 천천히 녹아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하지만,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우리를 첫 번째로 귀찮게 한 벌은 받아야겠지?”
“벌..?”
그렇게 말하며 갑옷의 가슴 부분만 열려 깨뜨리는 현성. 갑옷 밑에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아밍 더블렛이 드러났고, 그것이 받치고 있던 그녀의 탐스러운 과실이 출렁거렸다.
현성은 그것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기 시작했다.
“자, 잠깐... 설마..?”
그것이 어떤 행위를 위한 것인지 알아챈 리사가 공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고
“히야아아아앙!!”
이어서 숙소의 전역에 교성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밖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리사의 비명소리가 꽤 크게 들리던데, 혹시 크게 다친 건 아니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옷을 툭툭 터는 현성을 보며, 성녀가 그의 뒤, 열려있는 방문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방문을 통해 보이는 단편적인 것들로 대충 밖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유추해보기 위함이었다.
“다친 건 순결 된 마음뿐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 슬슬 해 뜰 것 같으니까 가자.”
그렇게 말한 현성이 성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그녀의 잘록한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그대로 들어올렸다.
“자, 잠깐..! 뭐하시는 거예요!”
“작전대로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가만히 있어.”
‘이왕 납치를 할 거면 공주님 안기로 해주지..!’
납치의 로망인 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짐짝처럼 취급하는 납치 방식에, 볼을 부풀린 성녀였지만,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만 삐죽 내민 채로 가만히 있게 되었다.
보릿자루마냥 어깨에 성녀를 매단 현성이 창문틀에 발을 올린 채로 뛰어내리려다가, 까먹은 게 있다는 듯 아차. 소리를 내더니, 스으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성녀는 내가 데려간다!! 하하하하하하!!!”
가 신전 전역에 퍼질 만큼 크게 외쳤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현성의 신호에 대기하고 있던 스카지나가 빠르게 날아와 그들을 등에 안착시키고는 하강할 때처럼 빠르게 비상하며 이내 성국의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장면을 신전 내의 사람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멀뚱멀뚱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성녀를 납치해서 온 곳은 ‘태양이 뜨는 절벽’이었다.
태양이 뜨는 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높은 절벽으로, 성국 전역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올 만한 높은 위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폴리모프를 한 스카지나와 처음으로 성국 밖으로 나와 모든 걸 처음보는 탓에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성녀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이제 막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이른 아침의 성국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11년 만에 맛보는 자유의 맛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의상 존댓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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