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성녀와 가벼운 한판.
* * *
“정말 그걸 소원으로 빌 거야?”
오래 앉아 있던 나머지 조금 구겨진 수녀복의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있는 눈앞의 성녀를 보며, 나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요? 뭐든지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미소를 띄우는 성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기는 한데, 설마 그런 소원을 빌 줄은 몰랐지.”
“그러면 무슨 소원을 빌 줄 알았는데요?”
“하룻밤 같이 보내달라는 거?”
“그럼 그건 두 번째 소원으로 해야겠네요.”
“...농담이었는데?”
“저도 농담이에요.”
그렇게 말한 성녀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저런 모습만 보면 성녀가 아니라 소악마라니까. 저러다 레이처럼 뒤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게 아닌가 몰라.
그나저나 두 번째? 도대체 난 얘한테 소원권을 몇 개나 준거야?
“그리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묻는건데, 내가 너한테 소원권을 몇 개나 줬어?”
내 물음에 성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살짝 들더니 손을 펼쳤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제발 주먹은 쥐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지만 내 기도는 가볍게 묵살되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주먹을 쥐었다 피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멈춘 것은 중지손가락을 폈을 때였다. 도합 8개라는 뜻이었다.
...많이도 뿌렸다 미친 새끼. 뭐, 2배 이벤트라도 한 거야?
줏대없이 한 명에게 소원권을 8개나 뿌려버린 과거의 나 자신을 욕했다.
이제 2번째라고 했으니 앞으로 6개나 더 들어줘야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성녀가 폈던 손가락을 다시 접기 시작했다.
설마, 나도 기억하지 못 하는 과거에서 소원을 들어준 것들을 빼고 있는 건가?
희망의 빛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되감기를 하듯 손가락은 계속 접었다 펴졌고, 최후에는 2개의 손가락만이 접혀있었다.
“8개 주셨는데 그 중 오늘을 포함해서 6개를 사용했고, 남은 건 2개네요!”
계산을 마친 그녀가 ‘아직도 2개나 남았네요!’ 라며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어?”
“뭐가요?”
“네가 다칠까봐.”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상냥하셔라.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신성력만으로만 성녀의 자리에 오른 건 아니니까요.
라며 걱정 말라는 듯 말하는 성녀.
“그리고 현성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6년 전에 현성님을 멈추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저라는 걸요.”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물러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한 것이 나였으니, 이것도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간 걸은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기사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서로가 대련을 하는, 소위 말하는 대련장이란 녀석이었다.
그녀가 참회실을 나가기 전에 내게 말했던 첫 번째 소원.
그것은 자신과 대련을 해달라는 대련 신청이었으니까.
* * *
네모난 상자 같은 형태의 대련장의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대련 중인 2명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한 명은 소녀라고 해야 되나?
따악! 따악! 하는 목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한쪽은 백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은발의 여인이었다. 성국의 사람들이면 모를 수가 없는 여인, 팔라딘 플뢰르였다.
다른 쪽은 플뢰르를 목검을 든 채로 마주보고 있는 흑발의 소녀였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그들의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익숙한 검을 휘두르는 방식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레이?”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찰랑이는 흑발이 빙글, 돌아갔다.
“선생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목검을 내려놓은 그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꽤나 격렬하게 했는지 조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고,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성녀님과 얘기는 다 끝나신 건가요?”
“응. 얘기는 다 끝났어.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선생님과 성녀님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팔라딘께 가르침을 받고 있었어요.”
“언제 끝날 줄 알고?”
성녀가 내 진실된 참회를 듣고 좋은 분위기로 바뀌어서 망정이지, 내가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다면 필시 아직까지도 참회실의 안에서 그녀가 나를 걱정해주는 잔소리, 아니 좋은 소리를 듣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 늦어진다 싶으면 팔라딘께 먼저 돌아갈 테니 말 좀 전해달라고 하려고 했죠. 그래서,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할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땅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금부터 여기를 좀 사용할 거거든.”
“대련하시게요? 어떤 분이랑요?”
“누구겠어?”
내 옆에 답이 떡하니 있기에, 나는 성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설마... 성녀님이 상대이신 거예요?”
상대가 성녀임을 알아챈 레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저, 구경해도 되나요?”
하지만 이내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뭘 그런 걸 허락을 맡아? 보고 싶으면 보면 되지.”
돈 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최대한 오래 싸워주셨으면 좋겠네요.”
“네 경험치가 되라고? 미안하지만. 저녁 식사 전에 끝낼 거야.”
내 반대편으로 향하는 성녀를 보며 나는 팔을 붕붕 휘두르거나 목을 좌우로 꺾는 등, 대련 전에 몸을 풀며 말했다.
“마리아가 해주는 밥은 맛있으니까.”
* *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상대는 그 현성님이라고요? 아무리 대련이라도...”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플뢰르에 성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상대가 그 현성님이기에 일부러 소원권까지 써가면서 대련을 요청드린 거니까요.”
“...다 생각이 있으셔서 하신 행동이었겠지만, 모쪼록 조심해주세요.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성녀님이나 현성님이나 조금만 신나게 하셔도 대련장은 날아가 버릴 테니까요.”
“걱정하는 게 제가 아니라 대련장이었어요?”
당연하다는 듯 플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이야 죽지만 않으면 그 강인한 신성력으로 금방 회복하실 테고, 현성님이야 워낙 괴물이시니 다치지도 않으실 테니까요.”
“플뢰르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충격이라는 듯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는 성녀.
“농담이에요 농담. 어차피 시작하기 전에 파괴 불가의 결계를 펼치실 거잖아요?”
“파괴 불가의 결계요?”
결계라는 말에 성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결계를 안 치시고 싸우실 계획이셨던 거예요?”
“하지만 성기사 분들이 대련을 하실 땐 결계를 치는 게 안 보였는데요?”
“그거야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고 대련을 하기 때문이죠! 아까 전에 뭘 들으신 거예요? 두 분께서 조금만 힘을 이끌어내도 이 대련장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게 분명하다고 했잖아요!”
“아깐 조금만 신나게 해도 날아가 버릴 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고는... 아야야야야!! 아파요! 아프다구요!!”
되도 안 되는 소리 했다가 볼을 실컷 잡아당겨진 성녀.
잠시 후, 눈에 눈물이 조금 맺힌 성녀가 신성력으로 파괴 불가의 결계를 펼쳤다.
이어, 기도하듯 손을 맞잡으며 현성을 상대하기 위한 신성 마법을 영창했다.
“거룩하신 천신이시여, 악을 물리칠 무구를 이 손에 내려주시옵소서.”
성녀의 영창이 끝나자 하얗게 빛나는 무수히 많은 마법진들이 그녀의 뒤를 수놓았다.
눈앞을 가득 메운 하얀빛을 내뿜는 갖가지 무장들을 보며, 현성은 혀를 내둘렀다.
“...성물들을 신성마법으로 구현하는 건 반칙 아니야?”
“이게 제가 싸우는 방식인 걸요? 말씀드렸잖아요. 진심으로 한다고. 그러니 현성님도 진심으로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성녀는 그녀의 오른쪽의 마법진에서 나온 무구들 중 하나인 ‘성검’을 잡았다.
“...마력개방.”
상대가 진심이라는 것을 안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마력개방. 이라고 말하자 팡! 하는 소리와 함께 평상복이었던 그의 옷차림이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제복으로 바뀌었다.
“그럼, 플뢰르?”
현성이 전투태세로 들어가자, 시작 신호를 내려달라는 듯 플뢰르를 바라보는 성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플뢰르가 대련장의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양측 준비!”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시작!!”
힘차게 내리며 시작의 신호탄을 외쳤다.
* * *
대련장의 안에서 펼쳐진 그들의 대련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그들의 대련을 자신의 눈으로 전부 봤던 레이는 수준이 현저히 다른 그들의 싸움에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놀랐던 것은 성녀의 강함이었다.
현성과의 대련과 그의 싸움을 옆에서 지켜봐온지라 그의 강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녀의 강함은 말로만 들어봤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전설로만 내려져오는 무구들을 신성력으로 재현해서 싸우실 줄이야...’
그녀가 현성과의 대련에서 사용한 것들은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신화속의 무기, 성물들이었다.
당연히 진짜 성물은 아니었다. 책에서 본 것들을 그녀의 신성력으로 모습만 재현해 냈을 뿐이니까.
하지만 본디 신화 속의 무구들이란 신이 직접 만든, 신의 힘이 담긴 무구들이었다.
그 말인즉슨, 천신의 환생이라고 불릴 만큼 강대한 신성력을 가진 성녀는 그것들의 힘을 일부분이나마 재현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용사가 가지고 있는 성검이 얼마나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레이였기에, 무구들의 힘을 ‘일부’만 재현해 내도 그것들이 어떠한 강함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성녀가 재현해 낸 무구들은 하나가 아닌 전설 속에 나오는 것 전부였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만큼, 현성도 조금은 고전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무구들을 사용한 성녀도 현성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단 6합. 현성이 성녀를 제압하는데 들인 횟수였다.
땅에 꽂히거나 벽에 박히는 등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던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성물들이 파캉! 하고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빛의 조각들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상대한 현성은 현재, 상처 하나 없이 대련장에 서 있었다.
그의 팔이 백발의 여인, 성녀를 받치고 있는 상태였기에, 승부의 신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줬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뺨에 난 작은 상처를 제외하면 전설 속의 무구들을 상대했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아직은 괜찮지?”
이 정도면 만족하냐는 듯 공주님 안기 자세로 팔에 들려있는 백발의 소녀, 성녀에게 묻는 현성.
성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대련을 신청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계셨어요?”
“갑자기 대련을 신청하면 당연히 내 몸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지.”
현성의 말대로, 성녀가 그에게 대련을 신청한 이유는 인간의 몸에 맞지 않는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 그의 몸이 망가질까 걱정되서 그와 직접 맞부딪침으로서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아직은 괜찮은 듯 보이네요. 그래도 너무 많이 사용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성님을 위해. 그리고 현성님을 걱정하는 저희들을 위해.”
“노력해볼게.”
그렇게 말하며 씨익. 미소를 짓는 현성에, 성녀는 못 당해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몸이 조금 회복되어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성녀가 현성의 팔에서 내리더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현성님. 아까 말씀드렸던 두 번째 소원은 잊지 않으셨죠?”
“...아까 전엔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가 말했던, 아니. 그가 농담 삼아 던진 소원을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는 소원을 말이다.
“리사에게는 말해놓으라고 플뢰르에게 부탁해둘 테니, 오늘 밤,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성녀의 미소에서 왜인지 먹이를 노리는 여우의 모습이 보여서,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서 자기만 할 거지?”
그렇게 묻는 현성의 질문에, 성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