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122화 (122/146)

〈 122화 〉 소녀들의 비밀 대화.

* * *

‘철벽의 요새’ 여관 2층의 현성과 레이가 사용하고 있던 방에서, 두 명의 소녀가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됐으니 이젠 약도 필요가 없어지셨겠네요?”

그렇게 묻는 소녀는 새하얀 백발과 푸른 벽안의 소유자로, 세상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성국의 2인자, 성녀였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건너편 의자에 앉아있던 흑발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선생님과 함께 신전에 갔던 거니까요.”

아벨 왕국에서 귀족 중의 귀족인, 국왕 다음 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4개의 가문 중 르니아 가문의 영애, 레이 데 르니아였다.

그녀들은 방금 전 성녀가 현성을 데리고 참회실에 가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됐네요.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네. 어제 아침에 10년 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을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군요. 그러니 선생님껜 평생 감사해도 모자라죠.”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자신이 맡고 있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부모의 복수와 그릇의 재구축이라는 큰 선물을 해준 현성.

그에 대한 은혜는 그녀가 평생을 걸쳐도 못 갚을 정도의 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 그래서 말인데요.”

“현성님께 은혜를 갚을 방법이라도 물어보시려 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자신이 물으려던 것을 아무런 힌트도 없이 눈치 챈 성녀에 레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물어보시려고 현성님을 내보내달라고 제게 부탁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많이 봤거든요. 지금의 레이님 같은 눈을 하고 제게 비슷한 것을 물어보는 사람들을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그런 걸 물어보실 생각을 하신 거죠?”

“그게... 팔라딘께 여쭤보니 두 분께서 꽤 오래 알고 지냈다고 들어서요.”

레이는 현성과 성녀가 참회실에서 오붓한 밀회를 가지고 있을 때 플뢰르에게 들었던 것을 말해주었다.

7년 전 성녀를 납치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4년 전 성국 반파사건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들었다는 것을.

“꽤 오래 알고 지내긴 했죠. 그분과 처음 만났을 때가 7년 전이었으니까요. 아마 제가 아이리스 왕녀님 보다 더 많이 알고 지냈을 걸요?”

아이리스 왕녀보다 더 많이 알고 지냈다는 말을 강조하며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는 성녀.

레이가 갑자기 아이리스 왕녀의 얘기는 왜 꺼내는 거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옮겼다.

“흠흠! 여하튼, 현성님께 은혜를 갚을 방법은 많아요. 하지만 그 방법을 말하기 전에, 한 가지는 여쭤봐야겠네요.”

“뭔데요?”

“레이님은, 현성님을 좋아하시나요?”

* * *

“아니, 그러니까 너희들이 듣기를 원할 만한 일은 안 했다니까 그러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는 눈앞의 소녀들을 보며 몇 번째인지도 모를 대답을 했다.

학교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도 다과회니 뭐니 불려다니느라 하루에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성녀가 레이와 할 말이 있다고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방의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뒹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 방을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뭘 할까 생각하던 중 타이밍 맞게 여관으로 돌아온 세레나 일행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밤의 거리를 유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그녀들에게 걸려버린 나는 라네즈와 라헨느의 반칙적인 귀여움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버렸고, 그 때문에 이번엔 과거 얘기를 들려달라며 잡혀 있는 상태였다.

물론 세레나의 주도에 의해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 아닌지에 대한 걸로 주제가 넘어갔지만.

“저희가 듣기를 원하는 말이 뭔데요?”

그렇게 말하며 연보라색 머리의 소녀, 세레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성녀랑 섹스 안 했다고. 앞으로도, 뒤로도.”

누가 봐도 놀리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했기에, 직설적으로 말해주자.

“히익..!!”

그녀의 침대에서 이쪽을 보며 관심있다는 듯 흘끔거리던 루아가 펄쩍 뛰어올랐고.

“섹스가 뭐야?”

“몰라...”

아직 때가 타지 않은 라네즈, 라헨느 자매는 내가 말한 말이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실 줄은 몰랐네요.”

세레나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알 거 다 아는 놈이 뭘. 왜, 이런 말이 듣고 싶은 거 아니었어?”

능청스럽게 말하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긴 한데,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실 줄은 몰랐죠. 보세요. 우리 착한 루아의 충격에 빠져있는 얼굴을요.”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길래 나를 내보낸 걸까.

성녀가 나에 대한 것들을 어디가서 떠들고 다니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왜인지 드는 불안감은 지울 수 없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해야 하나?

사람이 3명 있는데 나머지 2명이 1명만 모르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면 그 1명에 대해 듣기 거북한 얘기를 하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나를 내보내기까지 하면서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너무나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끔가다 들려오는 레이의 왜인지 모를 경악에 찬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내 궁금증을 증폭시키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물론 마력을 사용해 신체 능력을 조금 끌어올려서 감각을 집중시키면 옆방에서 들려오는 대화정도는 문제없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내가 듣지 않으리라는 성녀의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만두기로 했다.

‘여자들끼리 비밀얘기라도 하나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성녀가 얘기를 끝내러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입으로는 하신 건가요?”

생각해보니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손으로?”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세레나.”

“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간식용 롤케이크를 가리켰다.

“드시고 싶으시다고요?”

“아니. 저 롤케이크를 네 입에 쑤셔넣기 전에 조용히 해달라고.”

그렇게 첫 귀찮꾼을 처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산이 아니라 봉우리였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그래서 섹스가 뭐야?”

“궁금해.”

더 높은 산이 내 등반을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 * *

“조, 좋아하냐고요?! 선생님을요?!”

성녀의 현성을 좋아하냐는 폭탄 질문에, 레이는 전에 없는 당황한 얼굴을 한껏 드러냈다.

“아닌가요?”

“아, 아니진 않는데 그렇다고 맞는다고도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왜냐면 제가 물려받은 마력이...”

눈이 빙글빙글 돌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레이를 보며 성녀는 다시 한 번 현성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 영애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레이님을 한창 때의 사랑에 빠진 소녀로 만드실 줄이야...’

물론 대단하다는 마음만 든 것은 아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원망스럽다는 마음도 섞여있었다.

‘연적을 더 늘리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발키리 자매라든가 강대국의 왕녀라든가. 등 현성을 사모하는 여인은 많다. 성녀 자신도 그런 그녀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성녀는 이 이상 그가 여자를 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 또 한 명의 여자를 늘려버렸으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만도 했다.

하지만 아직 현성은 레이가 그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현성은 자신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었고, 그것을 들었다면 지금처럼 마냥 사랑에 빠진 것 같은 표정만을 짓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터. 분명 근 시일 내에 레이가 그에게 품은 감정을 눈치챌 것이라고, 성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안 좋아하세요?”

횡설수설하는 레이의 말의 요점을 딱 집어 묻자, 우물쭈물하던 레이가 빨개진 얼굴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하지만...”

“현성님을 이성으로서 보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어머니께 물려받은 서큐버스 의 마력 때문에 그저 강한 마력을 지닌 분께 끌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신다는 거죠?”

“...네.”

레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을 보면 두근거리는 가슴이, 선생님의 향기를 맡을 때마다 흥분하는 몸이, 전부 선생님을 향한 순수한 감정이 아닌 물려받은 서큐버스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 일단 선생님께 은혜를 갚아가면서...”

“천천히 알아가려고 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두근거리는 가슴은 몰라도 흥분하는 몸은 확실히 서큐버스의 특성 때문인 것 같네.’

어찌보면 가장 위협적인 연적이 될 수도 있다고, 성녀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레이님. 알고 계신가요?”

“어떤 거를요?”

“현성님을 사모하는 여성분들이 많다는 것을요. 물론 저도 그들 중 한 명이고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무스 오라버님께 들었어요. 애인이 두 자릿수라고...”

“네, 맞아요. 게다가 한 분 한 분이 이름값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 현성님이 모르는 곳에서는 치열한 물밑 싸움이 일어나고 있죠. 만약 레이님께서 이 싸움에 끼어든다고 하신다면, 견제를 많이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째서인가요?”

“현성님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치타가 달리기 시작했다. 려나요?“

“그게 무슨..."

“지금, 현성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분이 레이님이니까요. 그리고 현성님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여성분들 중에.”

성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견제해야 할 만한 강적을 만났다는 듯이.

“‘서큐버스’는 없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이 싸움에 발을 들이시겠나요? 라고 묻는 성녀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레이는.

"네..!"

라고 말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 대화를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슬슬 잠에 들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도 은혜를 갚는 방법이라든가 꽤 많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창문 밖에서는 달빛만이 그녀들이 있는 방을 비춰주고 있었으니까.

“전 현성님을 모시러 갔다 올 테니, 레이님께선 먼저 주무실 준비를 하고 계셔주세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레이님.”

현성에게 얘기가 끝났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려던 성녀가 잊은 말이라도 있다는 듯 문을 열기 직전에 멈추며 말했다.

“네?”

“레이님께서 이 싸움에 끼어들겠다고 하셨으니 말씀드리는 건데요. 각오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각오..?”

“저희들, 아니.”

성녀가 고개를 반쯤 돌리며 레이를 곁눈질 했다.

“‘우리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성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백은 그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을 만큼 거대하고 강렬했기에.

“...”

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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