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모두의 밤의 끝.
* * *
“그렇게 말하곤 나를 치료하러 온 성녀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대로 소환수를 타고 날아갔네. 그리고 그 다음은 자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일세.”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교황이 얘기를 끝마쳤다.
발키리, 브륀힐데 또한 그 다음의 이야기를 알고 있기에 얘기가 끝난 것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큰 부상을 입은 교황이 오랜 시간동안 치료를 위한 요양에 들어갔다. 라는, 성국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얘기였으니까.
아련한 얼굴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낸 교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패였지. 나와 팔라딘들이 모든 힘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의 뺨에 작은 상처를 낸 것에 불과했으니 말일세.”
“...죄송합니다. 그의 편에 선 자매들이 저희를 막지만 않았어도...”
교황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 말이네만, 자네들이 합세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네.”
“그건...”
단호한 교황의 말에, 브륀힐데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 했다.
속으로는 그녀 또한 교황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으니까.
교황과 팔라딘이라는 성국 최고 전력을 상대하면서 한 명도 죽이지 않고 전투 불능으로만 만든 사람이다.
그냥 죽이는 것 보다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살리는 것이 몇 배는 어려운 일임을 브륀힐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 발키리 자매 6명이 합세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이 나왔는지... 그의 스승이라는 자를 만나보고 싶을 정도였네. 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데, 질문 있는가? 내가 아는 범위 안이라면, 얼마든지 답해주겠네.”
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할아버지가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해보라는 듯 말하는 것에, 브륀힐데는 잠시 생각했다.
질문이 없어서 하는 고민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았기에 문제였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교황의 이야기로 체감상의 시간은 꽤 지나있었고, 자칫하다간 밤을 새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호위와 순찰만 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교황에게는 하루의 일정이 있다. 아무리 신성력으로 몸을 강화시키면 얼마간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다곤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기에 정신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틀 뒤면 강림제라는 큰 행사가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 교황의 컨디션을 최고조로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몇 개나 하면 좋을지.
한참 고민하던 브륀힐데는 결국 제일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그 남자는 어째서 마왕을 소환수로 삼은 건가요?”
“역시 그걸 묻는 겐가.”
성국 반파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현성의 마왕 예속화.
그를 본 건 몇 번 되지 않지만 권력에 욕심이 많은 남자는 아니라고, 브륀힐데는 생각했다. 그가 진심으로 움직인다면 성 몇 개 쯤은 우습게 차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교황은 예상했다는 듯 끌끌대며 웃었다.
“들으면 분명 자신의 귀를 의심할 텐데, 들어볼 텐가?”
얼마나 대단한 이유이기에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까지 가는 건가. 오히려 궁금증이 더 커져버린 브륀힐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씨익. 앞으로 볼 그녀의 당황한 표정이 기대된다는 듯 미소를 지은 교황이 입을 열어 진실을 알려주었고.
“...예?”
교황의 말대로, 브륀힐데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 * *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누가 내 뒷담이라도 하는지, 귀가 간질거리는 느낌에 잠이 떠나가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손으로 귀를 긁거나해서 간지럼을 없앴겠지만.
“...”
내 몸은, 귀를 긁어야할 내 팔은 현재 레이와 성녀가 하나씩 나눠가지고 있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레이는 내 팔을 껴안은 채로 새근거리며 잘 자고 있었다. 덕분에 가슴 사이에 팔이 끼어 부드러운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성녀는 깨어있기는 했지만 행복한 얼굴로 내 팔을 껴안고 있기에 차마 팔을 놓아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작게 내쉰 한숨소리가 들렸는지 성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누가 내 뒷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귀를 움찔거려 보았다.
귀가 간지럽다는 신호를 눈치 챈 성녀가 팔짱을 풀어 손을 뻗어 귀를 긁어 주었고, 시원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음같아서는 성녀의 무릎에 누워 귀청소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옆에서 레이가 자고 있었으므로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마 교황이 내 뒷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영감이면 뒤에서 내 욕을 하고 있어도 인정해 줘야하긴 한다. 나 때문에 몸이 반으로 나뉘는 진귀한 경험을 했으니까.
“어쩌면 누군가에게 현성님의 얘기를 하고 계시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잠시만요.”
그렇게 말한 성녀가 눈을 감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다. 몸에서 옅게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신성 주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뒤, 성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하얀 빛이 성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며 사라졌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네요.”
“뭐가?”
“교황 성하께서, 브륀힐데 님께 성국 반파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계셨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아?”
“듣고 있었으니까요. 정확히는 현성님에 대해 묻는 브륀힐데님의 목소리가 들린 거지만요.”
“그게 들려?”
우리가 있는 여관에서 신전까지는 아무리 감각이 좋다고 하더라도 신전 안에서 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아니었다.
나도 혹시나 들리나 해서 감각을 집중시켜봤지만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 다른 소리가 들리긴 했다. 축제를 맞이했다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열심히 즐기시길.
“대단하네.”
“결계 덕분인 것 같아요.”
“결계 덕분이라니?”
“성국의 결계가 제 신성력으로 펼쳐져 있는 건 아시죠?”
“응.”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장소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그 장소에서 실시간으로 소리가 들려오거든요. 그래서”
결계에 그런 장치도 있나. 처음듣는 효과다. 나도 가능한 지 나중에 결계 펼쳐서 해봐야겠다.
“그래서, 브륀힐데가 뭐라고 하는데?”
나와 관련된 이야기니 내가 듣는 건 당연지사.
들어놨다가 나중에 만나면 밤에 이런 저런 질문을 하던데, 그렇게 나에 대해 궁금했던 거냐고 놀려줘야지.
물론 그녀가 궁금할 만한 게 대충 예상이 가긴 했다. 성국 반파 사건에 대해 궁금할 만한 건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으니까.
“왜 앨리아를 소환수로 들인 건지에 대해 묻고 있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성녀가 정답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별로 생각해내기 어렵진 않았다.
“그 영감도 똑같은 질문을 했으니까. 비슷한 질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때는 영감이 질문에 질문을 하는 바람에 대답을 하지 못 하고 그대로 싸움이 시작됐지.
물론 물어봤어도 제대로 된 대답은 해주지 않았을 테지만.
“확실히, 저도 궁금하긴 하네요. 그땐 반지만 받고 바로 떠나 버리신 바람에 듣지 못 해서 마음 속 깊은 곳에 질문을 묻어뒀거든요.”
“편지로 물어보지 그랬어.”
1년에 한 번은 꼭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근황을 확인한다. 그러니 성녀 또한 편지를 통해 내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가 내게 보낸 답장들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을 알리는 것들뿐이었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가 항상 첫 말에 붙었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말들뿐이었으니까.
마지막에는 언제 한 번 뵀으면 좋겠네요. 에델린이. 라며 끝을 맺었지.
가끔가다 ‘혹시, 여성분들을 더 늘리신 건 아니죠?’ 라며 견제구를 던지는 말이 포함되어있긴 했지만, 내게 진지하게 무언가를 묻는 건 보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아.”
라며 몰랐다는 듯 말을 흘리는 성녀.
“...생각을 안 해봤구나?”
“아하하... 1년에 한 번 밖에 현성님의 근황을 듣는 게 너무 감질나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쓰느라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성녀가 멋쩍은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보였기에, 나는 피식. 작게 웃었다.
“그래서, 어째서 앨리아를, 마왕을 소환수로 들이신 거예요?”
호기심이 가득 찬 눈동자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는 성녀.
뭔가 큰 것이 온다는 듯 기대감에 가득 찬 그녀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커다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냥... 미인이라서.”
그래. 말 그대로 마왕이 엄청난 미인이라서 승패가 결정된 순간에 그녀에게 물어본 것이다.
내 것이 되지 않겠냐고.
나한테 온 뒤로는 메이드복이니 코스프레 의상이니 이상한 것들만 입어서 그렇지, 처음에 봤을 땐 굴곡진 몸매가 그대로 들어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잡고 하기에 딱 좋은 뿔까지.
죽이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자중하고 있지만, 그녀를 데리고 온 뒤에 몇 날 며칠을 침대방에서만 보냈으니까.
진짜 좋았지. 솔직하게 스승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안았던 어떤 여자보다 좋았다.
그때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헤벌레해졌나보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하아... 현성님답네요...”
여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성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으로 이어진 얘기는 여왕의 요람에 관한 것이었다.
“여왕의 요람을 가셨다고요?”
“어. 성국에 오기 전에 지도를 살피다가 네 신성력이 느껴져서 마력을 흘려넣어보니 나오던데? 그래서 이게 뭔가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너와 레이가 관련된 얘기를 아이테르한테서 들었던 기억이 났지.”
‘강낭콩’ 이라는 통신 장비로 들었던 레이의 친부모가 인큐버스, 아스모를 피해 살던 장소.
레이의 어린 시절 추억과 고통이 함께 담긴 장소에 그녀를 데려갔다는 말에, 성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찮았어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듯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그 질문 속에 담겨진 가장 큰 질문을 알고 있었다.
레이가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어찌저찌 잘 해결했어.”
잘 못하다간 일대를 날려버릴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의 아픔도 딛고 일어났고, 주변도 멀쩡했으니 잘 된 거다.
“현성님의 말씀대로, 레이님의 마력을 집어넣어야 지도에 떠오르게 해뒀어요. 하지만...”
“내 마력이 비슷한 부류라 내 마력으로도 나왔던 거구나.”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죠. 원래대로라면 레이님께서 진정으로 어른이 됐을 때 말씀드리려 했던 건데...”
나 때문에 엄청나게 앞당겨졌다는 얘기군.
“그나저나, 그대로 하신 건 아니죠?”
“뭘?”
“섹스요.”
“...성녀가 그런 말을 막해도 괜찮은 거야?”
“듣는 사람이 현성님밖에 없는데 뭐 어때요? 그리고, 제게 어른의 밤일을 가르치신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
듣고보니 맞는 말이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셨어요? 현성님께서 주고가신 책에서 본 건데, 구원... 이라고 해야 되나요? 여자가 마음이 약해져있을 때 남성이 대쉬를 하면 반해가지고 그대로 침대로 가던데요.”
꼭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성녀가 몸을 더 밀착시켰다. 가슴의 압박이 내 팔을 누르며 대답을 강요한다.
“안 했어. 했다면 너랑 할 때 레이한테도 물어봤겠지. 옆에서 할 건데 같이 할 거냐고.”
피자가 있으면 2개를 겹쳐서 먹는 게 국룰아닌가. 게다가 레이는 서큐버스의 혼혈. 아무리 처음이라도 본능적인 테크닉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인큐버스 때 안지 못 했던 게 조금 후회되긴 했지만 그때 안았다면 필시 나중에 더 후회를 했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레이가 다시 그때처럼 자신을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 거지.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나저나 과거의 난 도대체 성녀에게 뭔 책을 준거야? 구원 서사 후에 바로 침대로 가는 책을 줬다고? 책이 아니라 동인지 아니야?
수녀장이나 리사가 알았다가는 나를 죽이려 들었겠네.
그 이후로도 우리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편지로만 주고받던 4년이란 시간이 몇 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하암...”
얼마나 지났을까, 성녀가 하품을 하기에 슬슬 자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성녀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림제가 끝나도 하루는 더 같이 있어주겠다는 내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꼭 껴안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슬슬 자볼까.
어차피 반지를 받아가려면 강림제가 끝나야한다. 그리고 강림제는 앞으로 2일 뒤.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1일 뒤이다.
그러니 오늘은 열심히 놀자는 계획을 세우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침에 있을, 나를 찾아 온 소녀의 방문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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