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딸. 아빠. 그리고, 엄마?
* * *
오늘 하루를 자신과 같이 보내달라는 레이의 부탁.
어차피 오늘은 성국을 돌아다니면서 관광객의 기분이나 느껴볼까.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 말 없이 승낙할까 생각했지만 큰 결심을 한 듯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왜인지 놀리고 싶은 마음이 또 들었다.
“데이트 신청이야?”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어보였다. 그러면 분명 네, 네?! 라며 당황함이 가득담긴 얼굴을 보여주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네.”
“어?”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내가 되었다.
그녀가 데이트라고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한 탓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 했는데.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맞다고요. 전 지금 선생님께 데이트를 신청하고 있는 거예요.”
이어서 추가타까지.
성격이 바뀌어도 너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반은 서큐버스인 그녀의 특성이 이제야 발현하는 건가?
당황함을 포장하기 위해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렇구나. 조, 좋아, 가자.”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만 리리에와 같이 간다는 조건을 붙였다.
괜히 놓고 갔다가 울면서 나를 찾기라도 하면 성국에 때아닌 눈이 내릴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빠 보겠다고 성국까지 온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놓고 가면 되겠어?
레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식사를 마저 할테니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먹고도 더 들어가는 거구나...
지금까지 저 식성을 어떻게 숨겼을까,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리리에가 식사를 마치고 배가 부르다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입에 음식의 잔해들이 묻어있길래 내가 닦아주고, 식곤증이 왔는지 내 품에서 잠들 때가 돼서야 레이의 식사가 끝이 났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한 레이가 자신은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먼저 가서 기다려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카운터로 걸어가 마리아에게 고생했다며 말을 해주었다.
마치 하얗게 불태운 것 같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있었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리리에가 먹은 밥값에 웃돈을 조금 더 얹어주었다.
이 세계에서는 팁이라는 개념이 없긴 했지만, 레이가 먹은 양으로 인해 그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 지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으며 얼마나 왔다갔다했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힘든 얼굴로, 마리아가 돈 자루를 받아들었다. 아마 조금 쉬었다가 정리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자루를 손에 든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안을 확인했고.
그렇게 1분 정도 받을 수 없네, 뭐 하네. 하면서 나와 실랑이를 벌였다.
하지만 오래 알고 지냈는데 이 정도도 못 해주냐는 내 말과 더 거절하면 강제로 3배로 받게 할 테니 순순히 받는 게 좋을 거라는 협박을 하고 나서야 알겠다며 받아들였다.
아, 그녀의 아버지인 페레우스한테 일러버리겠다고도 했다.
별로 많이 주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강한 부정을 표할 줄은 몰랐으니까.
끽해야 대충 레이가 먹은 밥값만큼 더 얹어줬을 텐데 말이다.
* * *
새근거리며 내 품안에서 자고 있는, 마치 천사처럼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
“어? 선생님!”
익숙한 목소리가 저 편에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아침부터 관광을 즐기고 있었는지 양 손에 쇼핑백을 가득 든 세레나와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를 보자 반가운 듯한 얼굴로 총총거리며 달려오는 그녀들. 왜인지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들 또한 마찬가지라 느꼈는지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무어라 무어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쉿.”
나는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대며 조용히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반가움에 회포를 푸는 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지만 리리에의 식후 낮잠은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였지만, 이내 내 품 안에서 잠들어있는 리리에를 보더니 ‘아~’ 하며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네즈와 라헨느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합. 소리를 냈고, 루아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으응...”
방금 전의 작은 소란도 잠을 자고 있던 그녀에게는 큰 소란으로 들렸는지, 리리에의 얼굴이 찡그려지며 일어나려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재빨리 리리에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새근거리기 시작했다.
레이가 내려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아 보였기에, 우리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처음에는 그녀들의 얘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별 거 없었다. 관광을 어디서 어떻게 즐겼다가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덕에 리리에와 레이를 데리고 즐길만한 장소를 고르는데는 큰 도움이 됐다.
다음에는 내 얘기였다.
교황과 한 판 붙을 뻔했던 일. 알렉세이의 근육을 보고 레이가 기절한 일. 성녀를 납치하는 큰 일을 벌였던 일.
성녀와 하룻밤...은 말 안 했다. 성녀와 나의 관계는 높으신 분들만 아는 기밀 같은 거니까.
“역시나라고 할까, 대단하시네요... 하루 만에 그 정도 일을 벌이시다니... 그나저나,성가가 정시에 안 나온다 했더니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내 얘기를 다 듣자,대단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던 세레나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네즈와 라헨느는 대단하다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루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했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게 큰 일을 벌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내 과거 얘기를 들려주면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
썰 풀기가 끝나자 때마침 여관의 문이 열리며 옷을 갈아입은 레이가 나타났다.
““”““...”“”“”
그녀의 모습을 본 내 입에서는 어떠한 말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주변이 조용한 걸로 봐선 다른 애들도 나와 마찬가지인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하늘하늘한 검은색의 원피스에 흑발과 어우러지는 하얀 모자를 쓴, 평소의 레이가 입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 의상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봤으니, 입을 다물지 못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청순가련하지만 동시에 고혹적인 매력을 갖춘, 세상에 레이 단 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저기... 왜 말들이 없어..? 안 어울려..?”
그 매력의 늪에 빠져버려 나를 포함한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레이가 자신의 옷차림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건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에요! 엄청 예뻐서 말이 안 나왔던 것뿐이에요! 그쵸, 선생님?”
다행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세레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레이의 옷차림을 칭찬하며 바통을 자연스럽게 내게 넘겼다.
“그. 그래..! 처음 보는 하늘거리는 옷차림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것뿐이야!”
나이스 도움 세레나! 이 빚은 오늘까지 잊지 않으마!
“예, 예뻐요!”
“공주님이야 공주님!!”
“납치하고 싶어...”
다음으로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지원사격을 해주었고,
“그, 그래요? 다행이다... 혹시나 안 어울릴까봐 걱정했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레이로 보아 어떻게 잘 넘어간 것 같았다.
“흠흠. 그럼, 갈까?”
더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나는 레이에게 리리에를 받치고 있지 않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세레나가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오~ 선생님, 신사네요~?”
레이가 평소에는 입지 않는 옷을 입은 이유와 레이에게 손을 내미는 내 모습에서 그녀와 내가 단 둘이 데이트를 나서는 거라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시끄러, 임마.”
쓸데없이 눈치만 좋아가지고.
작게 핀잔을 줘봤지만 그녀는 오히려 니히히거리며 웃더니 놀리듯 말했다.
“두 분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내가 언젠간 꼭 저 입에 롤케이크를 쑤셔 넣고 말테다.
우리의 티키타카를 본 레이가 쿡쿡거리며 작게 웃더니 내가 내민 손에 그녀의 손을 살며시 올려놓았다.
"네,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며 짓는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도 고혹적이라 나도 모르게 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무섭다, 서큐버스...
“자, 잘 다녀오세요..!”
“갔다오면 얘기 들려줘야 돼~!”
그렇게 세레나 일행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우리의 성국 관광이 시작되었다.
* * *
그렇게 리리에와 레이를 데리고 성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 선생님...”
화장실이라도 급한 건지, 레이가 안절부절하지 못 하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왜? 화장실이 급해? 저쪽에 있으니까 갔다 와. 갔다 올 동안 기다리고 있을게.”
“아, 아뇨... 화장실은 아까 갔다왔... 아니, 이게 아니라..!”
요점을 흐리지 말라는 듯한 레이의 말투.
“그럼 왜? 무슨 일 있어?”
“정말 계속 이러고 다녀야 하나요..?”
“데이트라면서? 네가 직접 말했잖아. 그러면 손잡고 걷는 것쯤이야 평범한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자신이 한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도 없는 레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녀가 저렇게 안절부절 못 하며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현재 모습 때문이었다.
현재, 우리를 사이에 두고 리리에가 가운데에서 걷고 있었고, 리리에의 양 손은 우리의 손을 하나씩 잡고 있었으니까.
그래, 마치 부부가 아이와 함께 걷는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이.
신혼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관광 온 건가 봐~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네.
라며 우리 쪽을 흘낏거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던가.
부부야? 아이가 귀여우니 특별히 하나 더 담았어!
좋은 사랑하세요~!
라며 가게의 주인들이 서비스를 주곤 했기에, 그녀는 분명 이런 것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거겠지.
딸이 정말 귀여워~ 역시 우리도 딸이 좋겠지?
이미 딸만 다섯인데 더 낳자고..?
..?
중간에 이상한 게 낀 것 같은데?
“왜?”
대충 흘려듣고, 방금 산 꼬치구이를 우물거리며 뭐가 문제냐는 듯 레이를 바라보자.
“그... 지금 저희의 모습이 마치...”
라며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얼굴에 홍조를 띄우는 레이.
그녀의 홍조가 어떤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건지 알고 있는 나였기에, 그녀가 머뭇거리며 하지 못하고 있는 말을 대신해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나와 부부라고 착각하는 게 불편해?”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좋아요! 하지만...”
“네가 괜찮다면 됐어.”
아마 그녀는 내가 그녀와 엮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까해서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나는 엮어준다면 감사하다.
그도 그럴게, 이득이 되니까.
지금도 봐. 꼬치구이는 3개만 샀는데도 리리에한테 하나 더 주라며 공짜로 하나를 더 받았잖아.
분명 이대로 잘 돌아다닌다면 원 플러스 원 급으로 기념품들을 가져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당사자인 그녀 또한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으니, 문제될 것도 없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데이트를 즐기고, 나는 나대로 이득을 챙기고, 리리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놀면 되고.
그리고 겸사겸사 아까 당한 것도 되갚아주고.
문제될 거 없다는 듯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레이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이상 우리 사이에 이와 관련된 말은 흐르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성국 관광.
중간중간 ‘미래에...’ 이라던가 ‘혹시나 내가...’ 라며 중얼거리는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얼굴을 보니 관광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것 같기에 괜스레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아빠! 저기, 저기!”
“그래, 가자 가.”
그렇게 다시 시작된 성국 관광. 양 손에 한 가득 기념품을 사온 우리가 돌아온 건 해가 넘어가고 달이 떠오르는 늦은 밤 시간대였다.
돌아다니다가 체력을 다 소진했는지 내 품에 안겨 자고 있는 리리에를 침대에 내려놓고,
성녀는 이미 돌아가도 한참 돌아갔을 시간.
그것을 증명하듯 방 안에는 그녀 대신 그녀가 써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한 장 놓여있었다.
편지에는 자신은 리사를 따라 돌아갈 테니 강림제가 끝난 다음날에 찾아와달라고 써져있었다.
아무래도 강림제가 끝난 당일에는 성녀도 체력 소모가 많을 테니 반지를 바로 만들어줄 수 없기에 미리 적어놓은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는데 말이지.
그리고 신전의 한 장소로 가면 강림제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테니 관심 있거나 관심을 보이는 소녀가 있으면 데려가도 좋다는 말도 적혀있었다.
내 자의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이 적혀있었지만 왜인지 꼭 가서 봐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어차피 강림제 구경 말곤 할 것도 없었는데 학생들이나 데리고 가볼까.
잠시 후, 간단하게 씻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레이가 이내 방으로 들어왔고, 내가 리리에가 자고 있어서 침대를 떨어뜨리지 못 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왜인지 한 침대에서 잔다니까 기뻐보이는 얼굴이던데, 착각이겠지?
그렇게 우리는 리리에를 기준으로 양 옆에 누웠고, 꽤나 먼 거리를 돌아다닌 탓인지 레이는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왜인지 눈꺼풀이 무거웠기에 리리에에게 팔배게를 해주던 자세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발 이상하거나 나쁜 꿈 좀 꾸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