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강림제.(2)
* * *
“후우... 나이가 있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에 무리가 가는군.”
그렇게 말하며, 백발의 중년 남성이 허리를 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그의 허리가 곧게 펴진다.
“그건 그렇고 의외로군. 설마 이 정도까지 힘을 끌어내게 할 줄이야.”
대단하다는 듯 말하며 백발 중년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이 되었네. 근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인간의 단단함, 기억해둬야겠군.”
그가 시선을 향한 곳에는 여기저기 근육을 키우는데 쓰이는 쇳덩어리들과 현성의 지식으로 재탄생한 운동기구들이 ‘운동 기구였던 것’이 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의 한 가운데.
“허억... 허억...”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근육질의 남성, 알렉세이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바지만이 찢처지지 않은 채로, 힘겹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째서... 쿨럭쿨럭!”
배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알렉세이가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토하듯 내뱉었다. 쿨럭. 기침소리와 함께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피가 침과 함께 튀겼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숨소리에, 백발의 중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게나. 움직이지 못 할 정도로 손을 써놓긴 했지만 계속 말을 하면서 체력을 소진하다가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으니.”
“어째서, 팔라딘인 당신이..!”
걱정하듯 말하는 그의 말에도 알렉세이는 말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불꽃이 더해진다.
“마족의 편에... 선겁니까..!!”
그의 눈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향해 있었다.
“페레우스 님..!!”
정확히는 그의 눈을 향해.
“...”
알렉세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의 남성, 페레우스 무러스의 오른쪽 눈에서 자색의 안광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일렁이는 보랏빛.
그것이 최상급 마족이상 급이 지니고 있다는 마안(??)이라는 것을 알렉세이는 알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페레우스의 몸에서 나오고 있는 자색의 아우라가 그가 인간보단 마족에 가깝다는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예로부터 보라색은 마신의 상징으로서 사람들에게 기피되는 색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도 페레우스 님이라고 불러주는 건가.”
페레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신감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상냥함이 묻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네만, 나는 마족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네. 왜냐하면, 처음부터 마족의 편이었으니까.”
“뭐... 라고요..?”
충격에 빠진 알렉세이의 얼굴을 보며, 페레우스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마족의 편이었다고 말했네. 정확히는 40년 전, 내가 열여섯의 나이로 성국에 입성해 신입 성기사가 됐을 때부터 말이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래, 성국에 입성해 성기사가 된 것도. 몸에 거부감이 드는 신성력을 그나마 거부감이 덜 드는 방어에 특화된 방향으로 갈고 닦으며 팔라딘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도. 7년 전, 교황을 지키기 위해 그와 싸웠던 것도. 4년 전, 동지들의 적에 서서 최전선에서 싸웠던 것도.”
모두 이 날을 위한 것이었다네. 라며 페레우스가 말을 끝마쳤다.
“참 기나긴 시간이었지.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게 용할 수준이었어. 눈치빠른 교황을 속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
충격에 빠진 얼굴로,페레우스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한 채 고개를 떨구는 알렉세이.
그런 그를 본 페레우스는 그가 너무 큰 배신감에 휩쌓여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고 생각해 그를 지나쳐 본래의 목표인 운동실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니까... 당신은 마족이고... 마신의 심장을 강탈하기 위해 성국에 들어와 있었다... 이겁니까?”
하지만 이내 그의 발걸음은 뒤에서 들려오는 알렉세이의 힘겹게 내뱉는 말에 멈추게 되었다.
“그렇다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다가오겠지.”
이제 와서 벌어진 일을 정리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심히 대답한 페레우스는 운동실의 맨 왼쪽부터 천천히 운동실의 벽을 훑기 시작했다.
벽을 가볍게 쓸 거나 툭툭 두드리며, 마치 숨겨진 문이라도 있는 듯 샅샅이 뒤지던 그의 손이 어느 특정한 지점에 닿았다.
“여기군.”
그가 힘을 주며 벽을 누르자, 버튼이 눌리듯 딸깍. 소리가 나며 벽의 일정부분이 움푹 파였다.
이어, 쿠르르르. 돌이 끌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로 옆 벽이 미닫이문이 열리듯 열렸고, 밑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만이 있는 장소가 페레우스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곳만 내려가면 마신의 심장이 있다.’
마신의 심장에 담겨있는 마신의 힘만 얻는다면, 아무리 교황이라고 해도 그를 막을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기 직전에, 뒤에서 느껴지는 가쁜 숨소리에 페레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고 누워서 쉬는 게 좋지 않겠나?”
그의 뒤에서 힘을 이끌어내 가까스로 일어선 알렉세이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우... 후우...”
조금 밖에 회복되지 않은 힘으로 일어난 탓에 그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고, 주먹을 날리려는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한데다가, 이따금씩 휘청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간 봐온 정이 있어서 죽이진 않았네만, 계속 방해한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알렉세이가 페레우스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았기에, 페레우스는 손을 뻗어 알렉세이의 손목을 잡아 그의 주먹을 아주 쉽게 멈출 수 있었다.
“거 보게. 힘이 전혀 실리지 않고 있잖나.”
쯧쯧. 혀를 차며 무리하지 말라는 듯 알렉세이를 보는 페레우스.
그리고 그것이 알렉세이가 노린 것이었다.
“음?”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잡는 알렉세이를 보며, 페레우스가 의문이라는 시선을 보냈다.
“잡았...다.”
거짓된 관계였지만 오랜 시간 그와 함께 지냈기에, 페레우스라면 분명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잡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힘을 싣지 않은 왼팔을 그에게 잡혀준 것이다.
잡히지 않은 남은 팔로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으아아아아아아아!!!”
우렁찬 기합과 함께 알렉세이가 혼신의 힘을 담은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부우웅!!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목표를 향해 내질러졌다.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이끌어낸 최후의 일격. 직격한다면 아무리 페레우스라고 해도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콰과과과광!!
내질러진 주먹에 의한 충격파가 운동실을 휩쓸었다. 쇳덩이들이 하늘을 날거나 여기저기 벽에 박혔고,운동기구였던 것들이 잔해의 소용돌이가 되어 페레우스와 알렉세이 사이에 휘몰아쳤다.
그의 주먹이 내질러진 일직선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로 인한 거대한 구멍이 페레우스의 뒤쪽으로 나있었다.
이곳이 페레우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결계의 안만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달려올 법한 거대한 구멍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일격도 페레우스에게 닿진 못 했다.
“아쉽게 됐군.”
나지막한 페레우스의 목소리와 함께, 알렉세이의 몸이 공중으로 띄워졌다.
페레우스가 알렉세이의 한 팔을 잡은 채로 들어올린 것이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가볍게.
알렉세이의 거체가 아니었다면 상대가 가벼운 게 아닌건가 착각할 정도였다.
이어, 그대로 몸을 돌려 알렉세이의 거체를 땅에 메다꽂았다.
쾅!!
둔탁한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크게 들썩였다.
“커헉..!!”
가해진 충격에 알렉세이의 입에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뜩이나 중상의 몸인데, 방금 전 혼신의 힘을 다한 공격을 날려 근육을 수축시켜 피해를 경감시키는 기술도 쓰지 못 했다.
그렇기에 그동안 키워온 근육이 오히려 그에게 충격을 남들의 몇 배로 받게 하는 독이 되버렸던 것이었다.
“더 할 텐가?”
큰 대자로 땅에 박혀 있는 알렉세이를 보며, 페레우스가 물었다.
“자네의 마지막 일격, 훌륭했네. 하지만 그것도 내게 닿지 않았지. 이 이상 하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을 텐데.”
“큭... 큭큭...”
최후의 일격이 닿지 않았음에도 왜인지 웃기 시작하는 알렉세이.
“...뭐가 웃기지?”
페레우스의 심기가 조금이지만 불편해졌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봐도 웃음이 나올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제 목표는...당신이 아니었으니까요...”
“뭐?”
“작은 틈만 있다면... 쿨럭! 분명 그녀는 눈치챌 수 있을 테니까... 쿨럭 쿨럭..!!”
도대체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의문밖에 남지 않은 그의 말에 쓰러져 있는 알렉세이를 보던 페레우스의 눈에 문득 알렉세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성공이라는 듯 입가에 호선이 그려져 있는 그의 얼굴이.
이어, 그의 귀에 틱. 티틱. 하는 유리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노린 건 내가 아니라 결계였나..!’
그의 의도를 파악함과 동시에 뒤에서 느껴지는 섬찟함에, 페레우스는 반사적으로 뒤로 크게 도약했다.
피잇!
동시에 은빛의 실선이 방금 페레우스가 서 있던 자리를 베고 지나가며 벽에 가로줄의 검흔을 남겼다.
1초라도 늦었다면 저 실선의 검흔은 자신의 몸에 남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페레우스의 얼굴에는 한 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보통 인간의 검격 정도는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데도 말이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알렉세이.”
그의 시선은 어느새 나타난 눈앞의, 알렉세이를 가리고 서 있는 은발의 여인에게 향해있었다.
장기인 속도를 살리는 것에 특화된 가벼운 백색의 갑옷.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묶어 올린 말총머리.
영롱한 백금색의 눈동자.
3명의 팔라딘 중 제일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플뢰르였다.
“같이 강림제를 보자고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안 오길래 드디어 운동에 미쳐버려 약속까지 까먹는 뇌가 된 건가, 생각했다고요? 근처에 오니 결계가 펼쳐져 있어서 다행히 걱정하는 바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요.”
“운동에는... 원래 미쳐있었습니다만..."
운동만큼은 양보하지 못 한다는 듯 힘겹게 말을 내뱉는 알렉세이.
"그리고...이게 우려하지 않은 게 아니라면 뭡니까...”
그런 그를 보며 은발의 여인, 플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대꾸하지 말고 쉬고 계세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회복하세요.”
“말 할 시간에... 치유마법이라도 걸어주면... 안 되는 겁니까..?”
계속해서 볼멘소리를 내는 알렉세이를 보며 플뢰르가 쯧. 혀를 찼다.
“제가 당신처럼 뇌에 근육만 가득 찬 줄 알아요? 당연히 아까부터 신성력을 보내고 있었죠. 꼴이 말이 아니라고 말할 때부터. 하지만 듣질 않는 걸 어떡해요?”
플뢰르의 말대로, 방금 전부터 하얀 빛의 덩어리가 알렉세이의 몸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달라붙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 닿자마자 자색의 불꽃에 휩싸여 불타버렸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회복을 해서 움직일 생각을 하라고요.”
눈앞의 흉흉한 보랏빛의 마력을 내뿜고 있는 페레우스를 보며, 플뢰르는 방금 내질렀던 검에 신성력을 담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녀의 검이 하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빛이 강해짐에 따라 은색이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한 순백색을 띄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광을 내뿜는 한 자루의 빛의 검이 그녀의 손에 들렸다.
검을 든 자세를 다시 잡으며, 플뢰르가 말했다.
“아무리 저라도 저 괴물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으니까요.”
* * *
5성급 호텔의 고급 스위트룸 같은 널따란 방의 안에서, 강림제가 시작하기까지 뒹굴거리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선생님.”
나를 부르는 세레나의 목소리.
“왜.”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은 장소를 선점해 놓으셨다면서요?”
아, 그거에 관한 거구나. 난 또 뭐라고.
“그런데?”
“...좋은 장소 맞아요?”
그렇게 말하며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상견례 자리에서 처음으로 상대편 부모를 만난 딸내미마냥.
“올 사람이 없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면서 뭐였지? 천신의 강림 재현? 그걸 볼 수 있는 장소잖아. 그러면 좋은 장소 아니야?”
“그렇긴 한데요...”
“괜찮아. 괜찮아. 성녀가 우리 뒤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그리고 그 성녀의 뒤에는 내가 있고.
“으. 음...”
괜찮다고 말해줬는데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자꾸 주변을 둘러본다.
정신사납게시리.
“꺄하하~! 나 잡아봐라~!”
“거기 서어~!”
“어, 언니이..! 소, 손은 놓고 뛰어어..!”
그냥 저기서 꺄르르 웃으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리리에나 라네즈, 라헨느 자매처럼 즐기면 되는 건데 말이다.
라헨느는 즐기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선생님, 차 드세요.”
“아, 고마워.”
그녀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와중에 레이가 내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색의 찻잔을 건넸다.
홍차의 색깔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냄새를 맡아봤다. 맡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홍차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한 모금 홀짝였다.
맛은 그렇게 좋다고는 못 하겠지만, 냄새를 맡을 때처럼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에 만족했다.
“로즈마리에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각성제 비슷한 효과가 있어서 준비해 봤어요.”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일찍 일어나셨잖아요. 라면서 레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음. 좋네. 앞으로는 아이테르나 다른 귀족들 만날 때 로즈마리 차를 달라고 해야겠어.
바람이 머릿속을 통과하는 듯 느껴지는 시원함에 만족한 얼굴로 한 모금 더 홀짝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 평안하게들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세레나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문이 막힌다는 듯 허. 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네가 이상한 게 아닐까?”
6명 중 그녀 혼자만 이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제가요? 제가 이상한 거라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세레나의 얼굴.
그녀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게 꽤나 희귀했기에 사진으로 찍어서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제가 정상이고 언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요! 천신의 눈에 들어와 있는 거라고요? 저와 같은 천신교의 신자라면 누구나 저와 같이 행동할 거라고요!”
아무래도 그녀는 천신교의 열렬한 신자인 것 같았다.
“레이는 왜 빼는 건데?”
“언니는 어느 상황에서든 상황에 맞게 행동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 정도는 아닌데...”
뜬금없는 칭찬에 레이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세레나의 말대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오로지 성녀나 교황, 팔라딘 만이 출입할 수 있는, 방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는 유리로 성국 전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인 ‘천신의 눈’이었다.
성국 전역이 한 눈에 보이는 만큼 성국의 어디서든 나쁜 짓을 하면 천신의 눈에 들어 천벌이 내린다고 했던가?
그런 신성한 장소에 일개 신자가 발을 들이다니, 천벌을 받는 게 아닌가 세레나는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진짜 천신의 눈을 찌른 거라면 몰라도 고작해야 이름만 같은 장소에 들어와 있다고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동영상으로 담아뒀다가 두고두고 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세레나를 뒤로 하고, 차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그나저나 이런 곳을 소개시켜 줄 거면 미리 말 좀 해주지. 성녀도 참 사람이 나쁘다.
아마 지금쯤 우리가 도착했다는 말을 리사나 다른 성기사에게 듣고는 당황해하고 있을 우리의 얼굴을 생각하며 ‘후훗.’ 거리며 작게 웃고 있겠지?
만족한다는 듯 의기양양한 성녀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아무래도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되갚아 주던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성녀에게 되갚아주나, 생각하고 있을 때.
“..!”
찌릿. 하고 무언가 등을 타고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느낌이 오는 곳을 향해, 방문을 향해 고개가 돌아간다.
“...”
방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원인모를 기운. 마치 나를 부르는 듯 문의 너머에서 풍겨오는 너무나도 흉흉하고도 어두운 기운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선생님도 느끼셨나요.”
레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아까까지 미소 짓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가늘게 뜬 눈으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도 느꼈냐.”
“네. 대놓고 오라고 부르네요.”
대놓고 오라며 기운을 풍기는 게 꽤나 건방졌기에,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 언니? 선생님? 두, 두 분 다 왜 그러고 계세요..?”
문을 노려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이상해보였던 걸까. 루아가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왜긴~ 저 밖에서 뭔가가 부르는 것을 느꼈으니까 그런 거지~”
갑자기 바뀐 루아의 말투. 루아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 불리는 루나가 튀어나온 것 같았다.
“뭐, 느낀 건 우리 세 명이 전부인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루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저 편에서 뛰어놀고 있는 리리에와 라네즈, 라헨느 자매, 그리고 아직도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는 세레나를 향해있었다.
“그래서? 갈 거야?”
그러더니 다시 내게 시선을 향하며 그렇게 물었다.
“부르고는 있지만 그게 꼭 오빠라는 보장은 없어. 저 정도의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자가 노릴 만한 사람은 성국에 많으니까.”
팔라딘이라던가, 성녀라던가, 교황이라던가.
그렇게 말하며 루나가 어쩔 거냐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가야지.”
저 방문을 넘어 있는 게 사람인지 짐승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대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이왕이면 예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