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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아카데미에서 나 혼자 선생님이다-137화 (137/146)

〈 137화 〉 강림제.(4)

* * *

자신을 붉은 달의 간부 중 하나라고 말하며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리사가 나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성기사로서의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고혹적인 분위기에, 나는 방금 리사라고 소개한 여인이 진정 리사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찬찬히 그녀의 모습을 살피자, 내가 아는 그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묶어 놓은 푸른색의 말총머리를 푸르면 지금 그녀와 같이 등과 엉덩이의 중간까지 내려오고, 흡혈귀마냥 적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성국 내에서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실제로 흡혈귀 일지도.

“아무리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고 두 번이나 가슴을 만진 여인을 잊어버리신 건가요? 소녀는 슬프옵니다. 흑흑.”

갑자기 흑흑거리는 소리를 내는 리사. 하지만 살짝 보이는 입가의 호선으로 보아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나 또한 농담을 건네기로 했다.

“한 번 더 만지게 해주면 기억날 것 같은데?”

“그럼 만지실레요?”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양 손으로 받치는 리사. 한 눈에 봐도 뭉클하면서 부드러울 것 같은 느낌의 가슴이 그녀의 손을 따라 출렁인다.

“정말?”

“만진다고 닳는 게 아닌데 뭐 어때요. 아니면 저희의 계획에 동참해 주시는 게 어떠세요? 그러면 가슴만이 아니라 제 몸 전체를 가지고 노셔도 되는데.”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의 어깨자락을 살짝 내리는 리사. 새하얀 어깨와 쇄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저걸 참을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 남자가 일단 나는 아닌 것 같았다.

“좋아. 동참할게.”

“정말요? 와아~ 감사해요~!”

리사가 손뼉을 짝! 치며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선생님!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담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깜짝 놀란 표정의 루나가 팔을 파닥였다.

아니, 목소리에 당황함이 묻어나오는 걸로 봐서 루나가 아니라 루아인 것 같았다.

“맞아! 가슴은 내가 더 크다고! 그러니 만질 거면 내 껄 만져!”

아, 이건 다시 루나다.

“너, 넌 또 무슨 소리야..! 가, 가만히 있어..!”

또 루아로 바뀌었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닌가 오해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농담이다, 농담. 넌 그걸 진짜로 받아 들이냐.”

계속 놔두다간 저렇게 자아분열 퍼포먼스를 계속할 것 같아 농담이라고 말하니, 그제야 루나, 혹은 루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순진해서야 나중에 나쁜 남자한테 걸리진 않을까 걱정이다. 꼭 ntr게임의 여주같은 성격이니 원.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여전히 단상 위에 서 있는 리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네가 붉은 달의 간부라고?”

“네, 붉은 달 간부 중 서열 7위인, 적월의 리사랍니다~ 랄까, 방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벌써 잊으신 거예요?”

“그럴 리가. 그냥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물어본 거야.”

붉은 달.

인마 전쟁에서 패배해 사망한 마왕을 부활시켜 다시금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려고 하는 조직이라고 아이테르에게 들었다.

내가 지금 있는 아카데미가 세워진 가장 큰 이유를 제공한 자들도 붉은 달 소속이라고 했었지.

도대체 전쟁을 다시 일으켜서 어쩌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나저나 그들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간부라니. 꽤나 거물 급을 만난 것 같다.

그녀를 잡아서 아이테르한테 넘기면 암부가 사람을 찾는 속도도 더 빨라지려나?

솔직히 넘기기 아까운 외모긴 한데, 일이 다 끝나면 우리 쪽으로 넘어와줄 순 없는지 회유라도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먼저 어째서 그녀가 우리에게 마력을 보내면서까지 초대를 했는지 묻기로 했다.

“그래서, 그런 높으신 분이 우리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길래 마력을 보내면서까지 초대한 거지?”

“당신과는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거든요.”

“싸워보고 싶었다고?”

“네. 4년 전, 저도 성국 반파 사건의 자리에 있었거든요. 물론 그때는 교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중이라 성녀를 지키는 중이어서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저 멀리 날아갔지만요.”

날아간 사람이 꽤 많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중 한 명에 그때의 리사가 섞여 있던 모양이다.

“어째서 두 분이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죠. 교황보다 당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요. 그래서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당신에겐 꼭 한 번 제 전력을 부딪치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리사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그리고 감사함을 전하고 싶기도 했고요.”

“감사함이라니?”

싱긋. 리사가 미소를 지었다.

“교황을 약화시켜준 당신 덕분에 저희가 이번 작전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요.”

“작전?”

“죄송하지만, 제가 얘기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예요. 이 이상 더 듣고 싶으시다면...”

리사가 단상 위에서 뛰어올라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아시죠?”

“싸워서 이기란 말이지?”

“바로 그거에요.”

그렇게 말한 리사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전태세에 돌입한 것 같았다.

마력을 내뿜으며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리사의 모습에서 루나가 싸움의 기색을 느낀 듯 보랏빛이 감도는 낫을 소환하며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녀를, 내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오빠?”

왜 그러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루나.

“뒤로 물러나 있어. 네가 강한 건 알지만, 저건 아직 네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야.”

붉게 빛나는 눈동자.

마치 피가 그 본연의 색 그대로 기체가 된 것 같은 붉은 아우라.

그리고 그녀가 내뿜고 있는 마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피비린내까지.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인 것 같았다.

“저건 시조로부터 최초로 피를 받은, 3명의 적월의 흡혈귀 중 하나이니까.”

그것도 그냥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의 시조로부터 직접 피를 받아 권속이 된 3명의 흡혈귀 중 하나다.

개개인의 강함은 한 나라의 군대 급이며, 그들의 권속 또한 A랭크 상위 모험가 급의 강함을 지니고 있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현성님의 말이 맞아요.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꽤나 강력하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적월의 흡혈귀인 제게 닿을 수 없답니다.”

루나의 진정한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미지수지만, 한 번 싸워본 경험으로 볼 때 그녀는 아직 저것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녀보다 몇 배는 강할, 그녀의 아버지인 레인도 다른 또 한 명의 적월의 흡혈귀에게 죽을 뻔 했으니까.

그에게 그날의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아직도 기억날 정도다.

“그런데, 용케 제가 그냥 흡혈귀가 아니라 적월의 흡혈귀인 걸 눈치채셨네요? 이건 붉은 달 내에서도 간부들만 아는 비밀인데.”

“뭐... 마력에서 느껴지는 게 익숙해서 말이지.”

불순물이 섞이긴 했지만.

“...”

싸움에 끼어들게 하지 못하는 게 불만이었는지 루나의 입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찔거렸다.

“하아...”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낫의 소환을 풀었다.

“알았어. 오빠에게 맡길게. 대신, 꼭 이겨야 해?”

“응? 당연하지. 내가 고작 적월의 흡혈귀에 질 리가 없잖아? 그러니 저기 뒤에 가서 있어. 금방 끝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루나가 예배당의 입구로 향해 문에 기댔다.

“프로텍트.”

그녀가 혹시나 휘말릴 수도 있었기에 그녀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고, 얇고 검은 막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것을 보며 다시 고개를 리사에게 돌렸다.

“고작 적월의 흡혈귀라고요? 그리고, 금방 끝낸다뇨?”

그렇게 말하는 리사의 눈이 가늘게 뜨인 상태였다.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왜, 틀려? 시조한테 피를 받았다는 건, 시조보다 약하다는 소리잖아?”

그럼 문제될 거 없지.

“...마치 직접 싸워봤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아무리 교황을 이긴 당신이라지만 너무 자만에 빠져계시는 게 아닌가요?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초월자라 불리는 분들 중 한 분이신 시조께는 닿지 못 한다고요?”

“못 믿겠으면 직접 시험해보면 되잖아?”

“...좋아요. 그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되겠죠.”

그렇게 말한 리사가 오른손을 펼치자 피로 만든 것 같은 붉은 부채 2개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그것을 양손에 쥐었다.

“혈마법. 피의 축제 제 1막. 피나비의 춤.”

마치 무희가 춤을 추듯 부드럽게 한 바퀴를 돈 리사가 부채를 휘두르자.

­촤라라라락!!

부채에서 무수히 많은 붉은 나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인정할 만한 걸 보여주려면 합일로는 어림도 없겠지.

나는 마력 개방을 위한 반지를 빼기 위해 왼손 약지에 손을 가져다댔다.

하지만 반지가 잡히지 않자 고개를 기울이며 왼손을 살폈고, 그제야 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맞다. 나 반지 없어져서 성국에 온 거였지.

버릇이 이래서 무섭다니까.

어느새 내 지근거리까지 날아온 무수히 많은 피로 만들어진 나비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력 개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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